작성일 | 2023년. 5월 20일
●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 양쪽 모두 내각 꾸리기 어려운 현실
● 중도 세력인 제 3당 품짜이당의 행보에 다시 주목
● 친군부인 '사법부'의 선거법 적용 판결도 정국에 변수 될 전망
다당제와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태국의 경우 선거에서 이겼다고 이긴 건 아니다.
총선 후 제1당만이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2019년 총선에서도 팔랑쁘라차랏당은 프어타이당에 이은 제2당이었지만 쁘라차티빳당, 품짜이당 및 군소정당들과 함께 하원 과반수 의석을 겨우 넘겨 연립정부를 구성한 후 군부가 지배하는 상원의 지지를 받아 총리를 선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돌풍을 일으켰다고 정권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제부터 연정 구성과 총리선출을 위한 합종연횡의 수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게 될 것이다.
향후 연정구성과 정국전망
총선 전의 원래 야권 5개 정당 의석수는 309석(신생정당 1석까지 포함하면 310석)이며, 여권 6개 정당의 의석수는 182석이다. 야권이 하원 과반수이상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총리를 선출하기 위해서는 상하양원 회의에서 376석을 얻어야 한다.
친 군부 여권은 군부 지명인사들로 채워진 상원 250석의 지지를 모두 받으면 432석이 되지만 하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고도 상원의 지지를 받아 소수파 정부를 구성할 경우에는 심각한 정치불안이 야기될 것이 뻔하다. 현행헌법은 “다음 정부는 하원 의원 500명의 과반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나 양원(750명)에서 과반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여야 양쪽 모두 연정구성과 자신들이 선호하는 총리선출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까우끌라이당의 피타대표는 총선 직후 376석을 확보하지 못해도 야권세력들과만 연정을 구성하고 자신이 총리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일찌감치 프어타이당도 제1당인 까우끌라이당 주도의 연정에 동의했다. 이렇다면 상원이 참여하는 양원회의에서 상원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데 상원이 민의를 무시할 수 없을테니 총리에 당선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총선 후 현직 상원의원을 겸직하고 있는 5인의 군과 경찰 최고수뇌부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 차기 총리선출 투표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총리 선출, 오리무중
하지만 현실을 고려해 비교적 중립적 입장에 있는 구 여권의 품짜이당 등을 연정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도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품짜이당은 일찍이 까우끌라이당이 주장하는 형법 112조 개정(왕실모독죄)에 대해서 날 선 반응을 보인바가 있어서 연정에 선뜻 응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품짜이당은 프어타이당이 연정을 주도하게 되는 정치적 상황이 오면 지지할 것이라는 설도 있어 총선 후 가장 몸값이 오른 정당이 되었다.
또 다른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해 보자면 모든 정치세력에게 껄끄러운 제1당 까우끌라이당과 쿠데타라는 원죄를 저지른 쁘라윳의 루엄타이쌍찻당을 제외하고 여야 헤쳐모여한 상태에서 프어타이당이 중심에 서는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방안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난이 따르긴 하겠으나 연정구성이 지지부진하고 정치적 위기가 도래하면 가능성의 예술인 정치영역에서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원래 탁씬계 정당에서 정치활동을 한 인물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프어타이당, 품짜이타이당, 팔랑쁘라차랏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설을 띄우고 있다.
까우끌라이당과 프어타이당 양 당 관계는 연립정부 구성 이후에도 갈등이 예고돼 있다. 지금은 양 당이 반군부 개혁세력 측에 같이 서 있지만 실용주의 정치를 추구하는 프어타이당과 이상주의 정치 성향이 강한 까우끌라이당이 함께 정부를 구성할 경우에 사사건건 충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프어타이당에게는 까우끌라이당보다 현 여권의 실용주의 정치세력과의 연대가 더 매력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연정구성 방식이 있겠으나 변화를 바라는 총선 민의에 따라 진정한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유사한 개혁이념을 갖는 까우끌라이당과 프어타이당의 양당 연대가 주축이 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그리고 까우끌라이당에게는 정치적 원칙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현실 수용의 폭을 넓혀가면서 연정을 성공시켜야 할 책임이 뒤 따르게 될 것이다.
선거법 위반 여부
야권이 압승을 했다고는 하나 그 앞에는 정치적 장애물도 놓여있다. 양당이 야당 압승이라는 선거결과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선거직전부터 주요 정당들의 선거법위반 사례가 거론되었다. 까우끌라이당의 피타와 프어타이당의 패텅탄의 미디어관련사 주식 보유건이다. 태국 헌법 98조 3항은 후보자들의 미디어회사 주식보유를 금지시키고 있다.
2019년 총선에서 승리한 아나콧마이당(Future Forward Party)의 타나턴 쯩룽르엉낏(Thanathorn Juangroongruangkit, 1978년생)대표도 유사한 사건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프어타이당은 이외에도 탁씬 전 총리가 당무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외부인의 당무간여를 인정하지 않는 정당법상 이는 정당해산과 관련된 중대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선관위는 이미 정당 해산을 요구하는 수많은 민원을 검토 중이라고 언급한 바도 있다.
태국 헌법재판소는 과거에도 정당해산이나 총리직 박탈과 같은 중대 결정을 수차례 내린 바 있다. 헌재는 탁씬이 쿠데타로 물러난 2006년 이래 사실상 권력의 운명을 좌지우지해왔다. 헌재는 2007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탁씬계 정당이었던 타이락타이당(Thais Love Thais Party)을 해산시켰다. 이어 만들어진 탁씬계 정당인 팔랑쁘라차촌당(People's Power Party)도 선거법 위반혐의로 해산되었으며 두 명의 총리도 해임되었다.
군부 편향 사법부
2014년에도 잉락 친나왓 총리(Yingluck Shinawatra, 1967년생)가 치른 선거 무효 판정을 내린 후 군부는 정치위기를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헌재의 이런 행위를 뚤라깐피왓(tulakanphiwat), 즉 사법적 행동주의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를 의미하는 말이다. 현재 헌법재판소 9명의 판사들은 모두 2014년 쿠데타후 게엄령 하에서 만들어진 입법회의에서 선발된 인물들이다.
선거과정에서 까우끌라이당이 주장한 형법 112조 개정이나 군 개혁등과 같이 군과 왕실에 자극적인 이슈들이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심각한 반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미 총선일을 며칠 앞두고 육군사령관 나롱판 찟깨우태(Narongphan Jitkaewthae) 대장은 “국가가 혼란스러워지면 군이 다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는 발언을 한 바있다.
직책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그의 발언은 전 군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후 22차례의 군사쿠데타(성공 13차례, 실패 9차례)를 겪은 태국은 지금까지 하원선거 주기인 4년 남짓에 한번 씩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가 선거를 대신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태국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속설에 따라 그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있다.
"쿠데타" 역사적 현실
2019년 총선 후 지금까지 가장 민감했던 정치적 이슈는 왕실개혁요구였다. 태국헌법에는 국왕은 지존의 존재이며 누구도 국왕의 지위를 침해할 수 없으며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소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태국 형법 112조는 국왕, 왕비, 그의 상속자나 섭정을 비방, 모욕하거나 위협하는 자는 3년에서 15년까지 형벌에 처해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강력한 법적인 제재와 보수적인 사회적 분위기는 왕실개혁운동의 동력을 점차 떨어뜨렸다. 제 1야당인 프어타이당 조차도 이 문제에 대해선 때론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곤했다.
왕실 개혁 요구의 가장 극적인 시위는 2021년 10월에 발생했다.10월 14일 대규모 시위에 이어 10월 15일부터 22일까지 방콕에는 왕실 자동차 행렬이 차단되었다는 이유로 비상사태가 선포되기도 했다. 결국 11월 헌법재판소는 왕실개혁요구는 국가안보를 해친다는 이유를 들어 불법으로 판결한바 있다. 이번 총선을 통해서 까우끌라이당은 왕실개혁을 중요 선거이슈로 삼았다. 이는 까우끌라이당 연정 구성에 심각한 장애요인이 될 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선 정당해산과도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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