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태국 정계의 풍운아 탁신, 비범했던 도전과 외로운 망명을 뒤로한 아주 평범한 귀환

작성일 | 2023년 8월 31일

● 탁신 친나왓, 태국 정치계의 풍운아....17년 망명생활 접고 태국으로 귀환
● 서민을 대표했던 프어타이당, 이제는 군부정당과 손잡고 중도의 길로  
● 태국의 IT, 통신업계의 거물, 이제는 진보 색깔 버리고 평범한 보수 정치인으로 활약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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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도 흥미로운 정치인이 여럿 있는데, 태국에선 '탁신 친나왓(1949년생)'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를 둘러싼 여러 오해가 있다. 대표적인 게 '재벌 2세' 출신으로 '금권정치'를 주도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첫번째이며, 이와는 정반대엔 그가 급진적 이념을 지니고 낡은 태국을 변혁하려는 '민중의 지도자'를 꿈꾼 인물이라는 이미지도 존재한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근래 왕위 승계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은 1) 그 역시 아주 평범한 정치인이었으며, 2) 무언가 거창한 계획을 갖고 시대에 맞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정치를 지속한 이유는 태국의 독특한 "정경유착" 시스템 때문이었던 것이다. 마치 한바탕 꿈처럼 태국인들이 2000년 이후 20년 가까이 그와 "동상이몽"에 빠졌던 것이다.

2006년 쿠데타로 실각하고 전세계를 떠돌며 망명객으로 살던 탁신이 최근 17년만에 태국으로의 귀국을 택했다. 어렵사리 내린 결정이 공개되자 동시에 태국 상하원은 제2당 푸어타이당의 "쎄타 타위신(Srettha Thavisin, 62년생)"을 총리로 선출하는 결정적 사건을 만들어 낸다. 싱가폴의 cna 방송은 "These will not be the coincidence(이 두 사건은 절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라고 논평했다. 무언가 아리까지하지만 중대한 변화가 태국서 벌어진 것이다.

1. 경찰 인맥

외부의 생각만큼 탁신은 그리 부유했던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물 주유소도 운영하고 비단 가게도 한 중견사업가이긴 했는데, 어떤 기준으로 봐도 "재벌" 급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북부 치앙마이의 화교 집안 출신인데, 조주인으로 어렵싸리 방콕에 도착한 할아버지가 세금징수원으로 치앙마이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즉, 중앙 귀족과 별다른 연이 없는 시골 중산층에 가까운 평범한 내력인 것이다.

탁신 입신양명의 배경은 1) 경찰대 입학 2) 아내 폿자만과 결혼이 결정적이었다. 태국은 엄청난 국가주의 나라로 군대와 중앙공무원 그리고 경찰에게 권력이 집중되있다. 탁신은 좋은 머리를 활용해 경찰대학에 입학했는데, 여기서 또 운이 좋게 경찰청 2인자를 역임한 장인을 만나, 일종의 뚜렷한 후견인(경찰인맥)을 갖게 된 것이다. 나라에서 보내주는 미국 유학을 거쳐 1975년부터 1985년까지 핵심 부서에서 일한 경력을 갖게 된다.

태국의 독특한 문화라고 해야할런지. 엘리트 공무원들은 겸직, 부업을 뛰기도 한다(우리나라도 판사 사위 검사 사위 같은 제도?가 있다). 미국에서 첨단 문명의 세례를 받고 돌아온 탁신은 즉각 컴퓨터와 통신분야 회사를 세워 경찰과 국가에 공급을 시작했는데, 이 사업이 이른바 경찰인맥 덕분에 상당히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당시 OA (오피스 자동화) 흐름과 통신 혁명 덕분에 여러 기자재들이 정부에 필요했는데, 탁신이 뚜렷한 두각을 내보인 것이다. 결국 그는 경찰 옷을 벗고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나선다.

2.  태국의 손정의?

1988~1991년 무렵 탁신을 거물급 비즈니스맨으로 도약시킨 계기는 "위성 통신"이라고 불리는 첨단 비즈니스다. 당시엔 타자기, 컴퓨터, 복사기도 중요했지만 가장 비싼 장비는 단연코 "위성 통신" "위성 방송" 장비였다. 탁신은 발빠르게 외국에서 회선을 사와 태국에 재판매하는 사업을 벌였는데, 그의 감각은 탁월했고 손대는 분야는 족족 태국에서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1990년 아주 작은 무선통신사 TOT를 인수해 AIS로 이름을 바꾼다. 이름도 세련된 Advanced Info Service 였다.

그러니까 1990년대 탁신은 태국 IT 분야의 가장 떠오르는 "초신성"이었다. 2000년대의 일본의 손정의와 엇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고 상상하면 크게 틀리지 않다. 그런 그는 1995년 무렵에 정계에 입문해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갔는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AIS를 크게 키우는 데 사용하게 된다. 당시 태국 정치인들이 흔히 하는 방식, 즉 정경유착이었다.결국 2000년대 AIS는 태국의 1위에 근접하는 최고 통신사로 발돋움하게 되는데, 여기엔 탁신의 좋은 사업감각이 영향을 끼쳤겠지만, 시대적인 영향도 크게 작용을 했다. 우리나라도 1999년 무렵 SK텔레콤이 KT를 무찌르고 발빠르게 1위 통신사로 치고 나간 적이 있는데,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국영기업은 느려 터졌지만 민영 기업은 첨단마케팅을 동원해 사용자들의 선택을 받게 된 원리와 똑같다.

3. 맨체스터시티 FC

탁신의 사업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2006년 망명객이 된 탁신은 자신의 해외 재산을 탈탈 털어, 영국에 있는 2류 축구단 맨체스터시티 FC를 인수한 것이다. 인수 금액이 대략 3천억 정도였다. 물론 2년 뒤에 4천억에 팔아 치우고 말지만, 요즘 맨체스터시티 FC  규모의 축구단을 인수하기 위해서는 5조원 정도로도 부족한게 치열한 프로스포츠 시장이다.

2012년 탁신이 한국에 왔을 때 필자도 그 점이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다. 맨시FC를 산건 대단한 일인데, 왜 그렇게 빨리 팔아치워야 했냐고 말이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아랍의 만수르 집안은 나보다 더 깊은 돈주머니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양보했을 뿐"이라고 답했던 기억. deeper deeper money pocket, he had. 한 마디로 자금이 부족해서 맨시를 크게 키울 자신이 없었다는 얘기다. 탁신이 돈이 없는 건 아니다. 태국내 은행계좌가 동결됐기 때문. 탁신이 쫓겨난 이유는 통신사 M&A와 관계가 있다.

탁신은 자신의 집안 재산을 "친 코퍼레이션Shin corporation"이라는 지주회사에 몰아넣고, 이 지주회사가 AIS 지분을 대거 소유하고 있었는데, 총리 재임시절 통신사 지분이 정치적 부담이 되자 싱가폴의 테마섹에 1.2조원에 증권시장에서 블록딜을 벌인 것이다. 당시 태국 법은 이런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그런데 탁신이 포퓰리즘 정책으로 기득권 심기를 건드니, 태국 검찰은 이 거래가 "국가 자산을 팔아치운, 탈세 거래"라고 보고 탁신을 기소해 버린 것이다.

4. 테마섹, 국가 반역죄

탁신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억울한 일이 될 수 있다. 탁신의 AIS 지분은 사실상 과거 그의 모든 사업의 결과물이 담긴 집안의 꿀단지에 가까운 핵심 자산이다. 그런데 총리로 일하면서 통신사 지분을 대거 갖고 있기 부담스러우니, 2005년 가치로 1.2조원에 싱가폴의 국부펀드에 팔아치운 것. 지금 돈으로 치면 약 10조, 넉넉히 보면 15조쯤 되는 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도 설명했지만 탁신은 기존의 군부정치인과는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정치인이다. 기존의 태국 정치인들은 철저하게 "내수산업" "지대추구형" 산업에 몰두한 것이다. 땅을 확보하고 땅에 도로를 낸다거나, 특정 사업을 독점해 이윤을 챙기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탁신은 망해가는 공기업을 하나 인수해 시장경쟁에서 당당히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자본시장에서 챙기는 묘수를 발휘한다. 통신사 ceo 출신이다보니 당연히 그의 정치 행태 역시 기존 보수와는 달라야 했다. 통신은 전국민을 상대로 한 서비스다. 요금을 올려야 돈을 버는데, 그러기 위해선 국민들의 가처분 소득이 늘어야 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의료보험을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 주자는 아이디어 역시, 나쁘게 보면 통신사업을 위한 밑밥에 가깝다. 그런데 그런 정책이 태국 민중에겐 하나의 감동이었던 것이다.

5. 안전한 보수로

2014년 탁신의 여동생 잉락이 쿠데타로 쫓겨난다. 잉락 총리 역시 나름대로 중산층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 어쩔수 없었던 건 당시 태국 정치권은 "레드셔츠" 와 "옐로셔츠"로 극명하게 양분이 되었던 것이다. 타협의 가능성이 없진 않았지만, 왕권의 교체가 임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잉락을 제거하고 군부가 집권하게 된다.

물론 탁신은 방콕이 아닌 뉴욕과 런던, 홍콩과 아부다비 등을 떠돌던 시점이었다. 이미 탁신이 "중산층 정치"라는 뇌관을 건드리자마자 정치의 흐름은 감히 그가 좌지우지할 수준의 긴장 강도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돈을 더 벌기 위해 정치에 나섰을 뿐인데, 얼결에 왕실과 군부에 대항하는 "혁명가" "외로운 망명객"이 되어 버린 것이다. "태국판 레닌"에 가까웠던 무척이나 힘든 세월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20년이 흐르자, 탁신보다 더 급진적인 "미래당"과 "전진당", 30대 후반의 깨인 정치인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이제 그도 마음의 부담을 덜고 한결 가벼운 맘으로 귀환을 택한 것이다. 군부와 타협을 통해 총리도 배출하게 되었다. 아마도 탁신 집안은 조만간 동결된 계좌 수조 원을 회수하고, 태국의 명문가 집안으로 편입될 것이다. 애써 진보적인 척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탁신은 한때 태국 정계의 희망이자 미래로 불렸다. 치앙마이 탁신 가문의 실크가게 내부
이번 총선에 푸어타이당 간판으로 나선 딸 패텅탄과 탁신

PS.

0. 그러니까 프어타이당은 "탁신의 안전한 귀국"을 협상 카드로 사용 한 것. 즉, 프어타이당의 진보성은 종언을 고했음.1. 진보 정당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기도. 물론 탁신 귀국의 긍정적인 결과도 있음. 한때 진보적이던 프어타이 당이 보수당으로 바뀌어 타협의 정치를 모색하게 되었음.

2. 방콕 시민들의 정치적 판단도 신기함 그 자체. 2010년도엔 그렇게 탁신을 미워했는데, 이제는 자연스레 전진당을 좋아함. 역시 관건은 "누가 지지하냐?"의 문제. 방콕 시민입장에선 북부 촌놈들과 함께 탁신을 지지하기 껄끄러웠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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