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화해의 방법, '아시아주의'가 필요한 이유

○ 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충돌을 억제할 유일한 이념
○ ‘내로남불Naeronamble’의 미래를 위한 ‘아시아주의’
○ 부족주의와 패거리주의는 부끄럽고 나랏님도 귀찮다면…?

정호재 | 아시아연구자 (2022년 1월 10일 작성)


아시아 남쪽의 대도시에서 공중버스를 타보면 한국인 관점에서 낯선 장면이 적잖이 펼쳐진다. 우선 버스 안에서 꽤나 큰 소리로 스마트폰 동영상을 시청하거나 소리치는 분을 종종 마주치는 거다. 이어폰 없이 드라마를 보고 전화통화도 서스럼없이 하는 식이다.

얼굴색이 다종다양하고 쓰는 말 또한 제각기 다르니 자연스레 목청도 커지나 보다. 한국과 일본, 대만의 차분한 지하철과 버스는 정말이지 극히 예외적 상황임을 실감케 된다.

필자가 최근까지 거주한 싱가포르만 해도 버스 안에서 영어와 중국어 그리고 인도말(힌디 혹은 타밀)까지 동시에 스테레오 사운드로 울려 퍼지곤 했다. 화교(華僑)가 많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중국어를 쓰는 것도 아니다. 광둥어와 민난어 만다린 등 3가지 완전히 다른 언어가 뒤섞여 메아리친다. 호남과 영남의 사투리 차이쯤은 애교로 보인다. 비좁은 공간에서 마주쳤으니 “조용히 좀 합시다”라고 누군가 주의를 시킬 법도 한데, 그런건 수년간 한 번도 못 겪어봤다. 아주가끔 싸움이 나면 경찰이 출동해 순식간에 제압할 뿐이다. 관용의 내공이 상당하다는 증거일까?

시끌벅적한 아시아

하지만 속내는 전혀 다르다. 이들 사이에 정치적 견해차이는 광활하기 그지없다. 아시아 사회 속 인종과 종교 그리고 계급의 문제는 정말이지 치명적인 수준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응어리를 안고 산다. 잘못 건들면 죽고사는 문제로까지 커지는 수준이다. 때문에 그것을 요리조리 봉합해 문명적 타협을 이끌어내는 노력 또한 계속된다.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안은 최대한 절제하고 가능하면 조심스레 다루는 식이다. "인도인은 어떻고, 중국인은 이렇고, OO사람은 저렇다"라는 식의 고정관념으로 범벅된 견해를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는 얘기다. 대부분 틀린 얘기니까.

버스 안이든 어디서든 서로 간섭을 안하는 참을성의 배경은 무엇일까? 혹시 과거의 치열했던 다툼 때문이 아닐까. 서로 피튀기게 싸워봤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는 문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간섭이 없는 게 마냥 좋은 일일까? 아무리 관용이 앞선다고 해도 현실정치의 양상은 구태로 가득 차 있다. 어디나 출신 학벌이나 집안, 인종이 중요한 건 큰 차인가 없다. 아시아를 포함해 전세계 그 어디나 “끼리끼리” 해 먹는 문화는 차이. 정치권이라는 특권적 세계에 진입하면 무엇보다 ‘같은 피’가 땡기나 보다.

이 같은 전통적인 정체성―인종, 언어, 관습, 혈연―에 기반한 구태정치를 시쳇말로 ‘부족주의(部族主義)’라고 하나 보다. 언제나 화통했던 미국의 트럼프가 후대에 남긴 유산이 몇 개 있는데, 부족주의(tribalism)라는 표현도 포함될 것이다. 미국에서 이 말은 주로 트럼프에 경도된 중산층 이하의 백인 유권자들이 똘똘뭉친 정치현상을 뜻하며, 동시에 여러 진보세력의 ‘패거리즘’을 비아냥대는 말도 되었다. 아주 괴팍하면서도 치명적 매력의 부족장이 등장해 그의 추종자들을 벌떼처럼 거느리며 자연스레 대화와 토론이란 가치를 내다 버렸기 때문이다. 2018년부터 미국의 정치평론가 사이에서 ‘부족주의’가 스멀스멀 쓰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미국을 넘어 전세계로 수출되었다.

급상승 키워드…"부족주의"

원래는 ‘정치적 부족주의’라고 조금은 길다랗게 학술적 맥락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현대적 부족이란 앞서 말한 고전적 관계보다는 오히려 정체성에 기반을 둔 상징적인 공동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앞에 ‘정치적’이라는 수식어를 넣든빼든 별반 차이가 없어졌다. 인터넷 커뮤니티 혹은 SNS를 기반으로 오늘날 계급과 이념에 따른 새로운 부족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부족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지난해 국제적 관심을 끈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은 전통적 부족정치를 대표한다. 여러 세력 가운데 파슈툰족(族) 중심의 탈레반이 미국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한 모양새가 되었다. 미얀마의 쿠데타를 주도한 버마족 중심의 군부(軍部) 역시 마찬가지다.

인종과 종교, 지역과 성, 계급과 정체성 등, 오늘날에도 "부족"은 끊임없이 만들어 지고 있다 (출처: pixabay) 

한국에서도 2020년부터, 특히 강준만 교수가 “부족주의”라는 어휘를 가장 먼저 수입해 쓰기 시작한 이후로 최근 그 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2021년엔 <부족국가 대한민국>이란 책이 나와 평론가들의 시선을 끌었으며, 올해 새해를 앞둔 중앙일보에도 염재호 전 고대 총장은 “도덕적 부족주의와 과잉 국가주의의 위기”라는 칼럼(12월 29일자)으로 그 불씨를 이어가고 있다. 염 교수는 “부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결합하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파국으로 치닫는다”며 “도덕을 앞세운 정치적 부족주의와 과잉 국가주의를 심각하게 경계할 때”라고 쓴소리를 던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족주의라 말은 “이걸 공공연하게 써도 되나?”싶을 정도의 쌍욕에 가깝다. 한국식으로 따져보면 지역주의, 연고주의, 학벌주의 등보다 더 심한 “원시적 구악(舊惡)이나 퇴행(退行)”으로 번역돼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2000년 넘게 인류가 발전시킨 민주주의와 지방자치, 치밀한 선거법과 미디어법 등의 여러 제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개인들을 마치 마피아의 대부를 추종하는 흔한 조직원 정도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버리고자 발버둥 친 인습과 부패로 가득찬 전근대적인 정치행태가 한 마디로 부족주의였는데, 놀랍게도 가장 팬시한 정치 담론으로 부활한 것이다.

아시타비(我是他非) vs 내로남불(Naeronamble)

필자도 페이스북을 즐겨하는데 가끔은 말을 험하게 내뱉는 일부 페친과의 관계를 고민할 때가 종종 발생한다. 대개 정치적 지향점이 다른 경우다. 너무 극렬하게 특정 정치인을 좋아하는 것도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괴변으로 내가 주목하는 정치인을 깎아내리는 것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런데 친구 삭제 버튼을 누르려고 보면 걱정도 동시에 피어난다. 만약 내 페친이 전부 나와 엇비슷한 정치색으로만 채워지면 어쩌나? 아무리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그럼에도 “동종끼리만 교류하면 열성이 될 것”이란 우려 때문에 선택을 주저하게 된다.

부족주의란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집단과 정치적 담론은 일개 패거리들의 작당으로 보이고 만다. 트럼프를 위해 의회당을 기습한 이들은 어떤 부족으로 불러야 할 것인가, 일종의 트럼프족일까? 한국의 정치평론가들에게는 이제는 586이 된 학생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패거리즘을 비판할 좋은 프레임이 된다. 이미 40-50대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에게는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라는 멸칭까지 선사해놓았다. 박사모, 문사모, 안사모, 윤사모…모든 개인들이 전부 팬클럽수준으로 격하된다. 정체성에 기반한 이념적 지지층으로 몰아붙여 이들 팬클럽들은 일종의 “정치적 부족주의”의 최적의 사례라는거다.

평론가들이 ‘부족주의’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언급하는 논거가 바로 ‘내로남불’이라는 소아병(小兒病)적인 세계관이다. 옳고 그름이 혼란에 빠진 시대, 부족주의의 정수를 설명하는 데 이만한 표현이 없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장기간 한국의 민간에서 돌던 격언이 2000년대 들어 ‘내로남불’이라는 근사한 사자성어로 정립이 되었고, 이제는 정식 표현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가끔 학자들이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我是他非)라는 한자어를 붙여보기도 했지만 ‘내로남불’이 쌓아온 아성을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요즘엔 Naeronamble이라고 한국식 영어단어까지 유통이 된다.

내로남불은 실제로 부족주의의 좋은 근거로 비친다. 법과 원칙이라는 ‘공공의 가치’가 퇴색하고 오로지 부족의 생존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만 남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 겉으론 공정과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19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 정치인 중 상당수가 오늘날 성추행,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제새끼챙기기 등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동시에 그것을 수사하고 판결한 ‘판검사 부족공동체’ 역시도 본인들의 죄를 끼리끼리 감춰주고 사돈의 팔촌집안까지 땅 투기와 부정부패로 썩어있는 현실이 한국사회의 내로남불의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정치권과 법조계 및 고위관료들이라니…. 과연 이제는 누가 “법치(法治)”를 지킬 것인가, 라고 하는 시민들이 불만이 터져 나올 법도 싶다.

포퓰리즘에 물든 국가주의

필자는 근래 한국 바깥에서 한국을 주로 관찰해 왔다. 바깥에서 본 한국은 단연코 시장주의와 민주주의가 동시에 진보를 이룩한 위대한 성취의 국가였다. 바깥에서 보면 한국은 최근 5년뿐 아니라 1999년 이후는 혁신과 창조의 공간이었다. 가장 먼저 탈식민지 프로젝트를 달성하는 나라이자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한 것이다. 한류란 그러한 성취에 대한 세계들의 자연스러운 존경과 수용이었다.

그런데 매번 깜짝깜짝 놀라는 대목이 한 가지 있다. 한국의 엘리트들이 더는 국가발전의 비전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보나 현 집권세력에 대한 복수와 증오심은 쉽게 얘기하는 데 그간의 한국호(號)가 얼마나 위기를 잘 헤쳐왔는지 대한 평가와 칭찬은 오간데 없고 매번 딴죽만 울려대는 모양새다.

한국의 엘리트들이 국가주의란 고전적 비전을 상실했다는 느낌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남북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얘기도 더 엘리트들은 하지 않고, 오로지 시장주의만 탐닉하는 모양새다. 법조인들을 포함한 많은 엘리트가 그들의 자식들을 미국 등 선진국으로 보내 가르쳐 왔던 후폭풍일까? 아니면 더 이상 국가의 연금에 기대지 않아도 좋을 만큼 충분한 재력을 쌓았기 때문일까? 국가로부터 막대한 혜택을 입는 엘리트일수록 국가주의를 비판하고 복지국가에 대한 꿈을 상실하는 아이러니가 펼쳐져왔던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재해보상금 또한 대표적 사례인데, 대부분의 선진국이 시행하고 국민이 절실히 원해도 초엘리트들이 반대하는 기묘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반면 한국의 발전과 균형 잡힌 국가주의에 감사함을 보내는 집단은 서민 이하의 계층과 외국의 이주노동자들과 탈북자들 혹은 해외에서 사업을 하는 변방에 서 있는 이들이다. 나라의 발전이 자기들에게 직접 혜택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족도 국가도 믿지 말아라?

부족주의는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와 더불어 작심하고 정치권과 정치인을 비판하려고 만든 용어라이지만, 유달리 최근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온 배경이 있다. 팬데믹을 핑계로 날로 커지는 정부의 재정적자와 화폐신용의 남발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600조 원 이상까지 증가한 한국 정부의 예산은 ‘복지’를 이상으로 끌어안고 갈수록 ‘큰 정부’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부족과 국가보다는 시장과 개인에 관심이 높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과잉 국가주의는 무서운 괴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그 권력이 줄곧 특정 세력에게만 향하는 것도 우려스럽다.

실제로 행정학을 전공한 염재호 교수는 날로 급증하는 나라예산의 증가를 위험한 사례로 들고 “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만남”을 강하게 경고하고 나서기도 했다. 공공성이 부족한 특정 세력에게 나라의 곳간을 맡기면 나라의 미래가 참담해질 수 있다는 우려였을 것이다.

과거 근대화 시기에는 새로운 국가를 만든다고 자부했던 엘리트들이, 이제는 선거로 권력이 뒤바뀌기 시작하자, 과도한 국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집단은 부족주의니 믿지 못하겠고, 국가는 이들 특정 부족에 지배가 되니 국가 또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20년 전 한국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데 “포퓰리즘”이 동원이 되었다면 이제는 “부족주의”가 새로운 동력이 된 셈이다.

유럽주의와 아시아주의

백번 양보를 해서, 우리나라 초엘리트들이 정치와 국가 모두를 불신한다는 것을 이해 못 할 수준은 아니다. 패거리(부족)주의와 과잉 국가주의는 충분히 문제가 많은 이념인 게 사실이다. 나라를 쪼개기로 하면 한도 끝도 없이 쪼개진다. 수도권과 지방이 나뉘고, 수도권도 인서울과 아웃서울로, 서울 역시도 강남과 강북을 넘어 청담동 대치동 등 끝도 없이 나뉠 수 있다. 국가가 모든 가치의 위에 있다는 국가 중심 사상 역시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광활한 아시아 영역, 지나치게 다양해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모두를 부정하고 남는 것은 무엇일까? 어디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가? 과연 서구의 선진제국들은 어떻게 이 같은 한계를 돌파했던 것일까? 정파주의와 국가주의의 한계를 신자유주의로 전락한 시장주의나 친미친소 노선만으로 돌파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국경의 벽은 언제라도 높기만 했고 뿌리 깊은 전통의 굴레 역시 모든 사회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해답에는 그 이름에서부터 어느정도 힌트가 숨어 있다. 오랜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이미 2004년 저서 <유로피언 드림>을 통해서, 유럽인들이 지난 50년간 추구했던 유럽연합에서 그들이 공통으로 추구한 연결성(connectivity)과 인권존중(respect for human rights)의 가치를 투영시켜 왔다고 설명했다. 특정 학자의 목소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실제로 유럽연합은 유럽주의는 유럽 사회의 오랜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적어도 국가나 민족을 뛰어넘어 아주 오랜 시간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유럽의 문명을 바탕을 둔 정체성을 초월한 공통된 규범과 가치를 강조해 온 것이다.

국적에 관계없이 “유럽인”이라는 포용적인 정체성이, 앞서 설명한 부족주의나 국가주의의 편견과 해악을 어느정도는 보듬어 안아 주었다는 얘기다. 이 유럽인이라는 동질성에 2000년 넘게 지속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바탕이 된 것 역시 널리 알려진 얘기다. 지금도 유럽인들은 국적에 가리지 않고 자신들이 “유럽”이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이를 기반으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적어도 1-2차 세계대전의 폐해를 가져온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뚜렷한 인식의 틀을 공유한 것이다. 유로피언 드림과 비견되는 아메리칸 드림 역시도 50여 개의 주(洲)가 갖는 다양성이 주는 연방제도로 인해 지금까지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럽주의’와 ‘미국주의’는 서로서로 닮아가고 때론 견제하면서 보편주의를 넓히며 세계질서를 이끈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가 속한 아시아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왜 한·중·일 3국은 그 오랜 교류의 역사를 공유하면서도 철천지원수가 되어서 지역의 안보와 평화문제를 함께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까? 아시아에서, 적어도 유럽주의에 비견되는 평화사상만 공유가 되었더라도 북한의 고립문제가 오늘날까지 장기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최근 급가속 중인 중국의 팽창주의나 여전히 아시아 곳곳에서 벌어지는 군부독재와 인권탄압에 대해서 조금은 더 유연하고 효과적인 활로를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더 큰 형태의 지역주의, 즉 아시아주의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필요한 시기일 수도 있다. 아시아는 여전히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비전을 찾지 못한 상태이니 말이다. 결국, 그 해답에는 한국도 일정 정도 책임을 안고 있다.

‘내로남불’의 긍정적인 미래

‘아시아’라는 큰 틀에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의 발전상을 다시 보면, 긍정적으로 판단할 거리도 적지 않다. 어찌되었건 한국과 일본 중국 모두 유럽 이외의 근대화의 3가지 모델을 제시하는 나라들이다. 앞서 한국에서의 부족주의의 근거로 제시가 되었던 ‘내로남불’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날 정치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정답”이라고 주장하고, 반대파는 “오답”이라고 강력하게 몰아붙이며 대립하고 있다. 여기에 언론까지 부화뇌동하니 근대적 이성인 공론장이 작동할 리가 없다. 과연 이러한 극한 대치 속에서도 타협과 공공성의 회복이 가능할 지 우려가 크다.

그런데 구태의 상징으로 읽혔던 ‘내로남불’에도 긍정적인 관점을 뽑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필자도 무척 최근에 깨닫게 되었다. 하용출 워싱턴대 한국학 석좌교수(73)가 지난해 11월에 서울대에서 한 특강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하 교수는 한국의 근대화가 세계 문명사에서 갖는 의미가 뚜렷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화 모델이 한일합방-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이라는 문제를 빚으며 의미가 퇴색했다면, 한국의 발전 모델은 여전히 아시아의 보편 모델로서의 가능성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최근 가장 문제시 삼고 있는 ‘내로남불’의 문제 역시, 거시적으로 본다면 권위주의를 극복한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오히려 ‘내로남불’의 갈등을 치열하게 해야 새로운 합의의 구도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따지고 보면 어느 문명권이나 완벽하게 문제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거나 이상적인 답을 내는 곳은 역사적으로 극히 드물었다. “내로남불” 현상이 진짜 부족주의가 득세하는 미얀마나 아프카니스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권위주의 사회에서 정답은 뚜렷하게 정해져 있기 때무니다. 때문에 한국이 걸어온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이라는 일종의 진보의 뚜렷한 과정일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 아시아의 정신과 가치를 안고서도 세계와 소통할 방법을 찾는 것이 따지고 보면 한국이 보여줄 수 있는 K 모델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의 ‘내로남불’의 시대는 부족주의의 끝판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시아 권위주의 시대의 종식이자 더 큰 아시아 시대의 비전을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는 고민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파벌을 계속 쪼개는 것보다는 더 큰 정체성을 발견하게 만드는 21세기 ‘아시아 주의’의 아이디어를 찾아야할 때가 아닐까?

2022_01_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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