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화교의 고향을 찾아서③ 홍콩과 조주인

O 중국적인, 서구적인, 그리고 동남아적인 "홍콩"
O 화교기업들의 요람이 된 국제도시, 밀고 당기며 중국 개방 이끌어
O 조주인 or 테츄인, 홍콩을 넘어 동남아 경제의 주역이 되다

글 | 박 번 순, 고려대 경상대 교수


포그씨는 캘커타에서 선박 “랭군” 호를 타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싱가포르를 거쳐 홍콩에 도착했다. 그가 탄 랭군호는 홍콩의 해협을 메우고 있는 정크선, 유조선, 고깃배 등 수 많은 배들 사이로 홍콩항에 도착했다. 쥘 베른은 홍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홍콩은 1842년 전쟁 후 난징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작은 섬에 지나지 않았다. 대영제국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이곳은 빅토리아 항구가 건설되는 등 몇 년 사이에 몰라볼 만큼 도시화 했다. 홍콩섬은 광둥만 하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반대쪽 해안으로부터 60마일만 가면 포르투갈령 마카오였다. 홍콩은 무역 경쟁에서 마카오를 이겨야만 했다. 현재는 중국 화물 수송의 대부분을 맡고 있었다. 독, 병원, 선창, 창고, 고딕양식의 성당, 총독관저, 자갈을 깐 도로 등 모든 것이 마치 영국의 켄트주나 서리주의 상업지구 한 곳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거의 정반대쪽에 가까운 이 곳 중국 땅에 다시금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코스’

처음에는 홍콩섬만 가져갔던 영국은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 1858년 체결한 천진조약에서 구룡반도 일대를 장악했다. 그리고 1898년에는 구룡반도의 북부 현재의 선전과의 경계지역인 신계지역을 99년간 임대하기로 했다. 중국의 등소평과 영국의 대처수상 정부는 1984년 홍콩반환에 대해서 합의를 했다.

이 시기에 홍콩인들은 장차 중국으로 홍콩이 반환된다는 것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홍콩은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물가는 비싸고 특히 주거비용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들어 삶의 질이란 그다지 높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동안 자유무역항으로서 가장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했고 그 가운데 번영을 누렸던 홍콩 사람들은 중국 공산당 체제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영국, 호주,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돈이 없는 사람은 남았다. 돈이 또 너무 많았던 사람들도 홍콩섬에 남았다. 물론 이들은 언제든지 외국으로 튈 수 있도록 외국에 또 다른 근거지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떠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우울과 착잡함은 영화와 음악 속에 살아남기도 했다.

자유무역항 홍콩의 부침

홍콩경제의 성장은 외부적으로 전후 냉전 체제가 만들어 준 기회를 홍콩이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상하이의 섬유 기업가들은 홍콩으로 내려왔고 이들을 중심으로 섬유, 의류 등 경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공업 제품들은 미국과 유럽에 수출되었고 홍콩은 1970년대가 되면 한국, 대만, 싱가포르와 함께 작은 호랑이 즉 아시아 신흥공업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홍콩이 계속 저임이 경쟁력의 기초가 되는 노동집약적 산업을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중국의 개방은 홍콩과 중국의 비교 우위가 상호 접점을 이루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중국이 개방을 하자 동남아의 화교자본 뿐만 아니라 세계의 기업들이 직접 중국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홍콩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홍콩은 선전을 비롯한 주강 삼각주로 공업생산 시설을 이전하면서 산업구조 고도화를 달성하고 금융센터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서비스 산업이 홍콩의 중심산업으로 전환되었다. 중국이 외국인 직접투자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게 되자 중국 기업도 홍콩으로 진출하여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는 형태를 보였다. 그래서 중국이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던 초기에 외국인직접투자의 대부분은 홍콩을 통해 들어왔다.

화교기업들도 홍콩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기업에게 싱가포르가 외부로 나가는 관문이었다면 다른 국가들에게는 홍콩은 더욱 중요한 관문이었다. 물론 인도네시아 기업들도 홍콩에 진출을 했다.

살림그룹은 홍콩에 퍼스트 퍼시픽이란 자회사를 만들어 중국, 홍콩, 필리핀 사업을 주도했고 세계 최대의 펄프 제지그룹을 이끌었던 시나르 마스 그룹도 창업주의 아들 한 명을 보내 홍콩에서 중국의 정재계 인사들과 관계 형성에 힘을 쏟았다. 그는 젊었을 때 베이징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인도네시아 리뽀 그룹은 리뽀센터라는 건물을 소유하고 홍콩과 중국의 사업을 진행했다.

태국 최대의 민간기업집단인 CP 그룹도 홍콩을 통해 중국에 진출했다. CP 그룹이 홍콩에 진출하기 훨씬 이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국 군부를 피해 방콕은행의 창업주였던 친 소폰파닉Chin Sophonpanich,陳弼臣, 1910-1988은 1950년대를 홍콩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70년대에는 말레이시아의 로버트 콱Robert Kuok이 홍콩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홍콩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고 호텔을 지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에 진출했다.

불안감 딛고 찾은 여유

배가 구룡반도의 부두에 도착하고, 침사추이의 번잡한 거리로 나왔을 때 홍콩의 첫 인상은 그 동안 거쳐 왔던 중국의 도시들의 인상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어디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중국의 도시들에 오토바이를 대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앞으로 나서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한 낮의 해가 쨍쨍 내려쬐는 가운데 홍콩 구룡반도의 맨 끝단인 침사추이의 시민들은 그저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부유함과 여유로 빛나고 있었고 광둥성의 남부 도시들 사람들보다도 체구가 큰 사람들이 많았다.

홍콩 사람들이 광둥성 사람들이지만 영양 상태가 더 좋다든지 아니면 외부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홍콩으로 돌아와 사람들이 섞였다든지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외국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관광객일수도 있고 홍콩에 거주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으나 중산이나 주하이에서 외국인-서양인-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나 침사추이 거리에는 외국인으로 넘쳤다.

동남아 경제를 지배하는 조주인

광둥성에서 주강 삼각주 오른쪽 지역을 차오샨潮汕지역이라고 한다. 홍콩과 선전의 국경지역에 있는 선전 뢰호 버스 터미널에서는 주강 삼각주뿐만 아니라 조산지역의 대소 도시들로 가는 버스가 항상 넘치고 있다. 그래서 선전에서 몇 시간이면 버스는 조산지역의 관문인 샨터우汕頭, 산두에 도착한다.

조산지역은 청나라 시대에는 차오주부潮州府였다. 전통적으로는 광둥성을 월粵이라고 표시하는데 이 조주부 지역을 광둥성 동부지역이라고 하여 월동지역이라고 말한다. 이 지역은 제양시揭陽市, 게양, 조주시, 산두시 등으로 전체면적은 1.6만㎢로 강원도 보다는 약간 적고 상주인구는 2010년 현재 1,717만 명이다.

청나라 시기에는 조주부 산하에 10개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조안潮安 현재의 조주시, 조양潮陽, 변양揭陽, 징해澄海 현재의 산두시를 포함, 요평饒平, 혜래惠來, 보녕普寧, 남오南澳, 大埔, 풍순豊順 등으로 이들을 조주 10읍이라고 한다. 현재 조안과 요평현은 조주시이고, 징해, 조양, 남오현은 산두시 영역이다. 그리고 게양, 혜례, 보령현은 게양시로 통합되어 있다.

나머지 대포大埔, 풍순豊順은 현재는 매주시梅州市에 포함된다. 즉 과거 조주부의 중심은 지금은 산두시, 조주시, 게양시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광의의 조주부 즉 월동지역은 공동의 생활습관, 민속풍속, 문화배경, 언어환경, 가치취향 등을 갖고 있다. 조주인을 표준어로는 차오주라고 하지만 조주어로는 테츄라고 한다. 조주어는 지리적으로 광둥성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푸젠어, 즉 민난어와 유사하다. 조주인들이 푸젠에서 왔기 때문이다.

다른 정체성을 가진 조주인潮州人

동남아에서 조주인의 역사는 길다. 1822년에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에 말라카 조주공사가 설립되었다. 1845년에는 싱가포르에 현재 조주 8읍회관의 전신인 의안공사가 설립되었다. 1864년에는 말레이시아 페낭에 한강가묘, 조주회관 전신이 건립되었다. 동남아에 있는 화교 5파 중에서도 조주파는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태국 화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조주인들은 지역적 연고를 따질 때 조주의 북부에 있는 대포와 풍순현 출신들을 분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 두 지역에는 객가인이 많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는 조주/한강회관과 조주 8읍회관이 있다. 조주회관은 대포大埔, 풍순豊順 출신들도 포함하는 경우가 많지만 후자는 객가인 중심의 大埔, 豊順을 제외한 8읍 사람들만의 동향회관이다. 싱가포르에서 大埔, 豊順 출신 객가인은 푸젠성 용암龍岩지구의 영정현永定縣 출신의 객가인과 함께 풍영대공사豊永大公司를 조직하고 있으며 싱가포르 객가인 최대 동양회관인 남양객주총회南洋客屬總會에 속하고 있다. 이에 비해 태국의 조주회관에는 대포공회, 태국풍순회관도 포함된다.

조주의 변화는 제 2차 아편전쟁 이후 중국과 서구 열강 간에 체결된 천진조약으로 더욱 급속해 졌다. 1860년 조주항, 나중에 산두항이 개항했기 때문이다. 자딘 매치슨이 1867년 홍콩-산두의 기선 항로를 열었고, 1882 산두-방콕 간 정기여객선이 취항했다. 산두항 개항은 조주인들의 해외이주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는데 1876-1898 산두에서 동남아로 출국한 사람들은 약 151만 명에 이르렀다. 20세기 초인 1904-1935 산두항을 떠난 출국자는 약 298만 명에 이르렀고 이 시기 귀국자는 약 146만 명이었다. <출처: 山東下南淸海, 『アジア 華人社會と 中國僑鄕』, 2002, 古今書院, 172쪽>

중국 화교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조주인" 즉, "테츄"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중국 산터우근처의 작은 강하구 마을에 불과하지만, 홍콩 및 동남아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초기 경제 특구로 지정한 이유

이와 같은 산두는 수많은 화교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중국은 초기 4대 경제특구 중의 하나로 산두에 경제특구를 개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싼투시의 모습은 다른 3곳의 빠른 발전에 비해 훨씬 성장이 뒤진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산두의 시외버스 터미널은 우중충 하고 버스에 내리면 오토바이택시 기사들이 10여 명씩 다가온다. 터미널 건물은 낡았고 주변 거리의 건물들도 그렇다. 여기가 산두인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산두시내는 좁은 도로와 질서를 지키지 않는 기사, 행인, 오토바이들로 인해 최악의 교통 상황을 만들어 낸다. 버스터미널에서 산두역으로 가는 중심 도로의 교차로에는 신호등이 있었으나 신호를 지키는 기사는 없는 것 같았다. 신호를 지키지 않은 버스, 택시들 때문에 사거리 마다 차량이 뒤섞인다. 편도 2차선의 한 선은 주차된 차들로 인해 편도 1차선만 이용할 수밖에 없다.

오토바이들은 갑자기 중간에 정거를 하는 경우가 많아. 한 차선 위에서 오토바이를 갑자기 세우고 핸드폰을 만지는 사내도 있었다. 택시나 버스 기사들은 그 서 있는 오토바이를 피해 가야한다. 택시나 버스 기사들은 화를 내지 않는다. 버스들은 속력을 낼 수 없다. 속력을 낸다는 것은 추돌사고를 의미하는 것이고 언제나 방어운전을 해야 한다. 그러니 경적소리는 계속 난다. 여기저기 유턴은 제마음대로고 2차선의 한 차선을 역주행하는 차도 많고 중국 여느 도시에 비해서도 가장 심하고 질서가 없어 보였다.

산두시내 장평동로에는 화교대하가 있다. 한 때는 이 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화교대하 정류장도 생겼다. 그러나 지금 그 호텔의 주 출입구 전광판에는 4시간 객실료를 알리는 광고문구가 흘러가고 있었다. 화교대하 옆에는 대형 쇼핑센터인 로터스 마켓이 있다. 태국 CP 그룹은 상하이에 CP 로터스, 복봉연화卜蜂莲花를 설립하여 운영한 이후 14개 성과 베이징, 상해 등 주요 도시 30여개 도시에 7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 계속

PS.

  1. 남방 화교의 중심 싱가포르에서 만든, "조주인" 소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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