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끝] 화교의 고향⑧ 중국에 밀린 화교

O 중국에 투자한 1세대들과 달리 정서적으로 멀어진 2,3 세대
O 바뀐 중국의 산업구조, 화교자본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아
O 중국과 "서먹서먹"한 관계의 시대로...딜레마에 빠진 화교

글 | 박 번 순, 고려대 경상대 교수


중국이 경제성장을 위해 해외화교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은 하루 이틀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미 1895년 베이징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간 캉유웨이가 베이징에서의 현실을 보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공거상서에는 하나의 방책으로 화교를 국가발전에 이용하자는 주장이 들어가 있다. 또 광서제는 1895년 해외 화교들이 중국에서 공장을 건설하고 기존 중국의 기업들을 인수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청조정은 초기 단계에 있는 중국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체계적으로 화교 유치에 나서 해외자본을 대량으로 유치하기 시작했다.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화교들은, 그들 대부분은 한족이었는데 만주족의 지배에 불만을 가짐과 동시에 청나라가 서구 야만인들에게 수모를 당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이 시기에 동남아의 화교자본도 풍전등화 같던 중국의 운명에 대해 푼돈을 모아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중국에 대한 애국심과 사업기회를 동시에 고려하여 중국에 투자를 시작했다. 매주 출신의 장필사, 장욱남張煜南의 중국에 대한 교육에 대한 투자나 인프라 투자 등은 그런 산물이었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기간에 동남아 화교들은 싱가포르에서 활동하던 탄까키의 주도로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모아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역시 중국의 수모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것이다.

한때 인도네시아 최고 부자였던 장씨 형제 집안 가족사진. 1세대 화교들은 중국에 대한 애국심이 투철했지만 그러한 국가정체성은 후대로 완벽하게 전승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화교는 중국 정서 갖고 있나?

장욱남 형제가 산두-조주 철도를 부설계획을 추진할 때 장욱남은 서태후의 부름을 받아 광서제를 한번 그리고 서태후를 두 번 알현했다. 그가 광서제를 만난 것은 광서 29년 1903년 양력 10월 24일/음력 9월 5일 깊은 가을날 아침 9시30분이었다. 이때는 광서제와 자희태후를 동시에 알현했다. 광서제는 그에게“광둥인인가?” 하고 물었다. 실권이 없던 광서제 그러나 국내외 현실을 이해하고 있었던 그가 해외에서 번 돈으로 고향에 철도를 놓겠다는 장욱남에게 무슨 소리를 할 수 있었겠는가?

장욱남은 같은 해 음력 10월 26일/양력12월 14일에 서태후만 만났다. 광둥의 시골에서 가난을 피해 인도네시아로 갔던 그가 비록 만주족이라는 미묘한 문제는 있었으나, 청나라의 황제와 그보다 더 막강한 힘을 휘둘렀던 서태후를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을 가졌을 것인지는 분명하다. 황제는 천자였고 그래서 하늘의 얼굴을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영예였다.

화교 기업인들의 세대교체 1930년대와 40년대에 중국을 떠나 성공한 화교들, 특히 광둥성이나 푸젠성의 화교들은 성공해서 귀국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이들이 자리를 잡았을 때는 중국은 공산국가가 되어 있었고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혁명 등 정치적 회오리 바람이 계속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이 기반을 갖고 있는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과 정치적 외교적으로 멀리 있었다. 그럼에도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은 자식들을 중국으로 보내 중국식 교육을 받도록 했고 인맥을 쌓도록 했다. 그런 개인적 전략은 후일에 중국 사업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비록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않았고 국가 건설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이 1970년대 말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면서 동남아 화교자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들은 기꺼이 고향을 방문했고 또 투자를 했다. 또 저명한 화교기업인들은 등소평 정책을 자문하기도 했다. 세계의 대형 다국적기업이 투자가 시작되기 이전, 그리고 중국이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 이외에는 경쟁우위가 없었던 시절 동남아 화교자본은 중국 경제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이제 1900년도 전반에 중국을 떠난 이민자도 거의 자연수명을 다한 시대가 되었다. 동남아 경제를 수놓았던 화교기업인 중 중국에서 출생한 기업인은 거의 살아남아 있지 않다. 그들 2세들이 자신들의 아버지가 광둥성이나 푸젠성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갖은 고생을 하고 사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부친의 고향에 애틋한 마음을 가질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CP 그룹의 경우 부친의 고향에 부친의 이름을 딴 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으나 사업상 바쁘다는 이유로 부친의 고향에 가 볼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더구나 중국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경제의 중심은 지금 화남지역에서 상하이, 절강성 등 양자강 삼각주나 베이징 지역으로 북상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택하고 산업구조 고도화를 통해 생산성을 증강시키는 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화교들이 광둥성과 푸젠성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중국의 성장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광둥이나 푸젠에 머물 수가 없다. 라이온그룹 회장은 윌리엄 종William Cheng, 鐘廷森은 1992년에 베이징에 처음 백화점 사업에 진출했는데 이는 그의 가계의 뿌리가 조주였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것이었지만 그가 3세였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중국을 접근할 때 고향이나 정서보다는 순수하게 사업적 관점에서 접근했던 것 같다. 소비수요가 있는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2014년 말 현재 60개의 백화점과 슈퍼마켓을 갖고 있지만 베이징에 3개, 상하이에 3개 등을 설치했다. 베이징 팍슨은 1994년 처음 문을 열었고 상하이의 최초 팍슨은 1996년에 문을 열었다. 팍슨은 가계의 뿌리가 있는 광둥성 조주에는 아직 진출하지 않았다.

화교, 영향력 지속될까

중국 여행을 마칠 때는 상하이의 기온이 섭씨 38도를 오르내리는 2015년 7월 하순이었다. 오후 한시 쯤 와이탄에서 푸동으로 가는 페리를 탄다. 한 때 상하이의 상징은 와이탄이었다. 제국 열강들은 상하이를 영원히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황포강의 서안에 유럽식의 거대한 석조건물들을 다투어 건설했다.

이 건물들은 상하이의 아픈 역사를 나타내지만 현재는 상하이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산이 되었다. 그래서 밤만 되면 와이탄의 야경을 구경하기 위해 상하이 시민이나 관광객은 와이탄의 황포강가로 몰려든다. 그러나 최근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밤이면 이들이 와이탄을 보지 않고 와이탄 강가에 만들어진 계단형 자리에 앉아 모두 푸동지역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푸동의 밤 야경이 와이탄 석조건물들의 야경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제 푸동은 상하이의 상징이 되었다.

배에서 내리면 육중한 고충빌딩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아니면 일반 상하이 시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고층건물들 때문인지 길에는 별로 사람이 없다. 부두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푸동 샹그릴라호텔을 만난다. 1998년에 문을 연 특급 호텔로 천개 이상의 객실을 가진 거대한 호텔이다. 다시 100여 미터를 걸으면 정대광장이라는 쇼핑센터가 있다. 쇼핑센터의 다른 이름은 복봉연화이다. 태국의 CP 그룹이 1997년 중국에 최초로 개업한 쇼핑센터이며 이후 중국 내 70개 이상의 쇼핑센터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이 두 건물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말레이시아와 태국에서 시작되었지만 동남아를 대표하는 다국적 화교기업의 투자였다.

푸동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고 푸동샹그릴라 호텔이나 복봉연화는 푸동지역의 개발초기에 푸동의 가장 중심지역에 자리 잡았다. 지금 정대광장 앞에는 상하이의 상징인 동방명주 방송탑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얼마 멀지 않은 곳에 400미터 이상의 금무대하빌딩과 역시 거의 500미터 높이에 이르는 상하이 세계금융센터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마천루 사이에서 샹그릴라호텔이나 복봉연화의 외형은 점차 작아지고 있다.

내용도 어정쩡하다. 샹글릴라 호텔을 운영하는 샹그릴라 아시아가 중국에서 운영 중인 37개의 호텔의 2014년 평균객실요금은 전년대비 8%가 하락했고, 가중평균객실투숙률은 55%에 불과하다. 객실당 수익률도 2%가 감소했다. 여기 푸동샹그릴라호텔의 객실수익률은 2% 상승했다고 하지만 이제 샹그릴라 호텔은 중국에서 고급호텔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에 직면하고 있다.

복봉연화도 마찬가지이다. 푸동지역의 중심에 자리 잡은 6층의 쇼핑센터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정체가 분명하지 않다. 고급백화점이라고 하기에는 입점 브랜드들의 성격이 모호하다. 1층 가장 중심지역에는 구찌 등 몇 개의 유럽 명품점들이 있으나 한국의 중가 화장품 브랜드가 두 곳이나 들어가 있다. 평일 대낮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쇼핑센터 안은 손님이 별로 없다. 건물의 색조는 푸동과 어울리지 않고 낡은 느낌을 준다. 외벽에는 삼성 갤럭시 광고 휘장막이 펄럭이고 있다. 중국에서 화교의 현 상황을 잘 말해주는 것 같다.

샹하이 푸동지구의 '샹그리라 호텔' 한때는 샹하이의 대표 건물이었지만 이제는 중국자본의 초대형 빌딩에 밀려 오히려 더 초라해 보인다 (출처: 호텔 자료사진) 

중국발전에 밀린 화교?

실제로 개방 초기에 고성장과 고수익을 누리던 화교기업의 중국 진출 사업은 정체를 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에서 가전사업과 디젤엔진 사업을 하고 있는 싱가포르 홍륭의 최근 매출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중국내 가전, 예를들어 냉장고 사업의 매출은 2014년의 경우 2010년 실적보다 못했고 디젤엔진의 경우도 2014년 48만 개를 팔았는데 이는 2013년의 50만 개보다 적었고 2010년의 55만 개보다 적어졌다. 팍슨 백화점의 경우도 매출이 정제하고 수익률은 하락했다.

2014년 팍슨의 중국 매출은 167억 위 안이었는데 이는 2013년의 175억 위안에 비해 감소한 것이었다. 순이익은 더욱 처참해, 2.5억 위안에 불과했는데 이는 2013년의 3.7억 위안에 비해 대폭 감소했고 2011년의 11.5억 위안에 비하면 1/5 수준으로 감소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첫째는 화교기업의 실력과 관계되어 있다. 화교기업은 독자적으로 경쟁우위를 갖고 있는 사업이 많지 않다. 동남아 내에서 주로 정부의 보호를 받아 성장했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에 직면해 본 적이 없다. 화교기업의 경쟁력은 네트워크였지만 이 같은 끈끈한 인맥이 작동하기 어려운 경쟁상황이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다. 중국기업도 성장해야 하고 더 실격이 좋은 다국적기업도 진출한다.

둘째, 중국 경제의 선도 부문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단순한 중저급노동집약적 제품이 시장을 지배하던 시대는 지났다. 핸드폰과 자동차가 대량소비되는 사회가 중국이다. 이러한 첨단 산업들에서 동남아 화교기업은 설 자리가 없다.

또 중국은 그 동안 수출중심으로 경제 구조가 바뀌었다. 내수 중심으로 전환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공산품 수출이 중요하고 그것도 동북아 기업이나 서구기업과 경쟁하는 첨단 산업에서 수출을 하고 있다. 동남아 화교기업이 경쟁하기는 어렵다.

과거 동남아 화교기업이나 자본은 어려운 중국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빈곤한 농촌에서 사업을 하고 성공해서 고국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애국 화교들의 시대는 갔다고 해도 중국이 화교를 필요로 할 때 그들은 중국에 있었지만 이제 2세, 3세로 이어지는 화교기업들이 중국에 대해 맹목적 애국심을 갖기도 어렵고 중국 당국도 그들에게만 특별한 대우를 해 줄 수도 없게 되었다. 동남아 화교기업이 안고 있는 문제이자 딜레마의 시작인 듯 보인다. [연재 끝]

PS.

참고자료

Jonathan D. Spence, The Gate of Heavenly Peace, Penguin Books, 1982. p. 44.

Parkson retail group limited, Annual Report 2014, p. 12

2. 박번순 교수의 “화교의 고향을 찾아서” 연재가 종료하였습니다. 2022년 상황과 조금 달라진 측면이 없진 않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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