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화교의 고향⑤ 객가인, 또 하나의 중국인

O 객가客家인, 천년의 시간 속 대륙의 중북부에서 동남부로
O 사업과 정치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 제 4의 화교
O 미사일 기지로 오해 받았던, 복건성의 객가인 전통 가옥 '토루'

글 | 박 번 순, 고려대 경상대 교수


중국에서 객가인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언어 공동체이다. 단어의 어의가 그렇듯이 그들은 떠돌이거나 손님이다. 흔히 중국판 집시족이라고 불리는데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와 민족 유대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객가인으로서는 중산출신의 손문, 이광요, 등소평 등 정치가가 있고 만병통치약처럼 인식된 호랑이표 고약을 만든 후원후胡文虎, 1882~1954가 객가인이다.

객가인은 오랜 역사 동안 중국 북부와 중부 평원지대에서 동남부로 이주해 정착한 중국인들이다. 이들의 이동은 자연 지형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기존 원주민들과의 관계 또한 이들의 거주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남으로 내려 올 때 험한 산맥을 넘지 않고 우회했을 것이며 토착 주민들의 텃세 때문에 원주민들이 경작하지 않는 험한 지역에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의 집시족 객가인

푸젠에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객가인이 많이 살고 있다. 그런데 대체로 이들은 해안보다는 내륙에 더 많이 거주했다. 최종적으로 바다에 이르지는 못하고 남하하는 과정에서 옆으로 확산되어 광둥성 매주, 혜주 그리고 뇌주에 상대적으로 많은 객가인이 살고 있다. 또한 푸젠성 객가인은 현지인의 텃세에 밀려 험한 산골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래서 해외이주의 유인이 더 컸을 것이다.

주강 삼각주 지역의 가장 오른쪽에는 혜주시가 있다. 혜주는 푸젠성의 북부에서 이동해 온 객가인의 주요한 거주지이다. 남송 시절에 소동파가 혜주로 귀양을 와서 리치를 맛있게 먹고서는 하루 300알의 리치를 먹을 수 있다면 여기서 살아도 좋겠다고 역설적으로 이야기 했다는 혜주다. 그 시절에는 오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동북부에서 이주하이 온 객가인이 여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혜주의 중심어는 객가어였다.

그러나 혜주는 동완의 오른쪽, 선전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의 경제개혁의 덕분에 급속히 발전했다. 공업화로 부동산 시장도 붐을 이루어 홍콩이나 대만의 부동산 투자도 늘었다. 혜주는 세계적인 석유화학, 정보통신을 기반을 발전해 왔는데 정보통신의 경우 초기의 대만기업의 투자뿐만 아니라 한국기업의 투자도 활발했다. 공업화로 외부인구가 유입되면서 이제 혜주의 언어도 상당부분 표준어 만다린의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광둥과 푸젠의 객가인

혜주 역시 객가인의 주요한 출향지이다. 전 세계에 수백만의 혜주 화교가 있다. 동남아에서 주요도시에 혜주 출신들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말레이시아에는 말라카 셀랑고르, 네그리셈빌라, 페낭, 타이핑, 이포 등 다수의 지역에서 혜주 향우회관을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혜주에서 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광둥성의 동부로 이동하면 내륙에는 매주시가 있다. 조주부의 북쪽지역이다. 매주시는 청나라 시대의 가응주嘉應州 지역이며 현재는 2개 구區, 1개 시市,5개 현縣이 있다. 현재 매주시 관할인 대포현과 풍순현은 조주부 소속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매주시 소속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모두 유명한 화교의 고향이다. 가장 먼저 만나는 지역이 풍순현이다. 태국의 전 수상 탁신 시나와트라의 고조부는 여기 당시 조주부 풍순현 포채진 출신의 객가인이다.

대포현에 출신의 애국심

풍순현과 경계를 이루는 대포현은 면적이 제주도의 1.3배 이상이 되는 큰 현이다. 대포현은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의 뿌리가 있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광요 수상의 증조부 이목문李沐文은 1846년 대포현 당계唐溪에서 나서 싱가포르로 이주했고, 1870년 싱가포르에서 난 객가인 여인에게 장가를 들었다. 이민자로서 결혼이 늦었던 셈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큰 집도 짓고 유지로 대접받을 만큼 돈이 모이자 1882년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청나라 말기에 화교들에게 명예관직을 팔았던 시기이다. 중국 땅에서 태어나지 않은 그의 부인은 아이를 데리고 친정 식구들과 함께 숨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조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귀국을 한 증조부는 고향에서 큰 집을 짓고 새 부인도 얻었다. 보잘 것 없지만 벼슬도 하나 얻었다. 그는 전통 중국식 저택 그림과 관복을 입은 초상화를 그려 싱가포르로 보냈다. 2015년 3월 이광요씨가 사망했을 때 여기 대포현

의 당계촌 이씨들은 리복분의 옛집 중한재中翰第에서 추념식을 거행했다. 중한재는 1884년 리복분이 건축을 했으며 2008년 중국 당국이 수선을 했다. 이광요씨가 이곳을 얼마나 자주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증조부의 집 뒤뜰 무덤과 그 비문에서 증조부의 이력에 대해 정보를

객가인 출신 세계적 거상

이 시기에 그는 아예 중국으로 귀국해 광서제 시기인 1897년 화교들이 상하이에 설립한 최초의 은행인 중국통상은행 설립에 참여했고 곧 은행의 총재를 지냈다. 당시 중국의 철도 건설권을 따내기 위해 열강들이 경쟁을 했는데 청나라 당국도 중국의 힘으로 철도건설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여러 철도 건설계획의 책임자로 일했고, 혜주에 유리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1910년 전국상공회의소연합회장을 지냈으며 신해혁명 이후에는 원세개 총통의 고문을 지냈으며 화교연합회명예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15년에는 시찰단을 조직하여 미국에 다녀왔고, 교육사업에도 투자를 했다. 대포현에는 장필사고거가 남아 있다. 청나라 객가 양식 건물로는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또 말레이시아의 페낭에는 그의 고택, 불루맨션Blue manꠓsion이 남아 있어 페낭의 가장 중요한 문화 및 관광자산이 되고 있다.

매주시에서 푸젠성 영정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매강梅江가를 따라 나 있고, 시내를 벗어나면 곧 버스는 고속도로로 올라선다. 고속도로 이정표 표지판은 계속 매주시 매현구 응양보梅縣區雁洋堡 출신의 1세대 공산당 지도자였던 염겸영葉劍英 고거를 안내해 준다. 객가인이었던 그는 군사 전문가로서 모택동이나 주은래보다 오래 살았고 등소평 체제의 안착을 도왔다. 버스가 좀 더 달리면 송구진을 만난다.

장필사의 사업 파트너이자 또 다른 성공한 사업가가 바로 장욱남張煜南, 1851-1911과 장홍남張鴻南,1861-1921 형제가 난 곳이다. 그들은 엽겸영 고거와 10여 킬로 떨어진 매현구 송구진에서 태어났다. 대포현과 멀지 않고 푸젠의 영정과도 멀지 않는 내륙이다. 장욱남은 어려서 단신으로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로 이주했다. 1878년에는 장필사와 합작으로 고무플랜테이션, 커피, 야자유 사업을 했다. 1880년 동생 장홍남이 합류해서 사업을 키웠다.

1897년 장필사가 청나라 정부의 부름을 받고 간 이후 사업을 이어 받았다. 그들 역시 장필사의 영향을 받아 고향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향 송구진에 학교를 건설하고 가응주매주의 전 이름 관련 출판사업에 자금을 기부했으며 이후 “실업구국”의 일념으로 막대한 자금을 다양한 사업에 지원했다.

이들의 가장 큰 사업은 1903년 고향에 철도건설에 나선 것이었다. 그들이 떠났을 항구 산두에서 시작해 북으로 조안현재 조주시를 연결하는 39km의 조산철도의 자본금은 300만원이었으며 장욱남 형제가 각각 100만원씩을 냈다. 조산철도는 1904년 건설을 시작해 1906년 10월 완공되어, 11월 16일 정식으로 통행이 시작되었다. 중국 역사상 화교가 건설한 최초의 철도였다.

청나라 말엽은 서구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었던 시기이다. 청나라가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난 이후 청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청나라는 여기저기 열강에게 철도부설권을 매각하거나 빼앗기고 있었다. 철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1912년 손문이 짧은 중화민국임시대총통 자리에서 물러나 맡은 직책이 전국철도를 책임지는 자리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객가인들의 삶의 터전 토루

매주에서 영정永定으로 가는 버스는 영정에 들어오기 한 시간 이전부터 산악지역을 달린다. 이제 푸젠성이다. 푸젠성의 면적은 12.4만 ㎢이고 인구는 2014년 3,806만 명이다. 면적은 남한보다 1.25배 정도 크고 인구는 75% 정도이다. 푸젠성은 북부로 강소성과 절강성, 그리고 남쪽으로는 광둥성과 접하고 있다. 푸젠성은 산악이 발달하고 그 산악사이로 여러 개의 강이 남중국해로 들어가고 있으나 농토가 상대적으로 협소하다. 태풍이 자주 불어오고, 강우량이 많아 홍수가 자주 발생한다. 따라서 옛날부터 사람이 살기에는 좋지 못했다. 북에서 남하한 객가인들은 현지인으로부터 환영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정은 객가인의 혜주-매주-영정- 용암으로 연결되는 객가인 분포의 중심 도시이다. 2015년 현재는 용암시의 영정구로 일종의 승격을 했으나 2014년까지는 영정현이었다. 영정 역시 동남아에서 화교가 활발한 향우회 활동을 하는 지역이다. 싱가포르나 페낭 등에는 영정회관이 있다. 영정의 자랑은 토루土樓와 천후궁이다. 토루土樓는 흙으로 쌓아 올린 원형 혹은 사각형의 객가인 주거지였다. 영정은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형성된 도시로 푸젠토루라고 말하는 영정지역의 토루는 여기저기 산재한 객가인이 거주한 공동체 건물을 말한다.

복건성의 세계적 관광지, 토루, 객가인의 전통적 가옥 형태다 (출처: 중국 관광사무소)

흙으로 쌓아올린 토루 한 동은 3~ 4층 정도로 건축되며 토루 안에 방이 수십에서 수백개가 되어 한 씨족 공동체가 공동생활을 했다. 그러니 많으면 1천명 정도가 한 건물 안에서 살았다. 대부분 원형이고 외부에서 볼 때 1, 2층에는 창문이 없는데 적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한다. 큰 토루 내부에는 가축을 기르기도 했다. 현재의 아파트의 원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벌집 같다. 다만 벌집의 입구가 내부로 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장 유명한 토루는 고토우 토루 영역에 있다. 이 일대를 들어서면 먼저 만나는 토루가 교복루僑福樓이다. 교복루는 강씨들의 집이고 남향이다. 내부는 테라스를 두었고 방과 홀이 30개에 이른다. 조상신을 모시는 사당은 건물의 내부 1층 북쪽 중앙에 설치했다. 교복루는 1962년부터 해외에 있는 집 주인의 형제들이 돈을 모아 보내주면 한 해에 한 층씩을 3년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해외교포들의 복이 모아졌다는 의미에서 교복루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건물에서 무려 11명의 박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에 교복루의 다른 명칭은 박사루라 한다. 지금 이 건물은 객가인들이 잘 공부하다가 인생역전을 한다는 모범과 후대를 격려하는 본보기가 되었다.

교복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토루의 대표작인 승계루承啓樓가 있다. 승계루는 명나라 말기인 숭정제 때 건설을 시작하여 청나라 강희제 48년1709에 걸쳐 강씨 집안의 3대가 완성한 것이다. 전체루는 원형으로 내부에 두 개의 원이 또 설치된 것이다. 가장 외부의 원 건물은 4층이고 한 층에 방이 72개라고 한다. 두번째 원 건물은 2층이고 각각 방을 40개 만들었고 가장 내부의 원형 건물은 단층으로 방은 32개이다. 전체 건물은 400개의 방을 갖고 있다.

역사성이나 건축의 아름다움 크기 등으로 인해 토루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제로 승계루는 일대의 다른 토로에 비해서 훨씬 규모가 크다. 객가인들은 외지에서 남하하면서 생존하기 위해 척박한 산악지대로 찾아들었고 이렇게 큰 집을 지어 공동체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생활을 답답하게 여겼던 사람들은 해외로 탈출을 했을 것이다.

(계속)

PS.

  1. 객가인은 복건이나 광동인처럼 핵심 주류는 아니지만 동남아 화교 사회 어디에나 있고, 보통 갈등의 중재자 노릇을 하곤 한다. 싱가폴의 리콴유가 대표적이다. 그는 평생 싱가폴 내의 정치적 주류인 복건(푸지엔)인을 설득하기 위해 실제로 민남어를 능숙하게 배워 활용했음.
  2. 호랑이약이라고 알려진 연고는 만병통치약처럼 동남아에서 지금도 널리 쓰임. 객가인이 만든 세계적인 상품.
  3. 도올 김용옥 선생은, 객가인을 "동양의 유대인" 이라고 표현함
Newsletter
디지털 시대, 새로운 정보를 받아보세요!
1 이달에 읽은
무료 콘텐츠의 수

여러분의 구독이, 다양한 고품질의 기사로~

구독하시면 갯수 제한 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
닫기
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