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거대한 '중정기념관' 또는 사후정치에 필요한 '염치': 2023 타이페이 방문기 ③

작성일 | 2023년 9월

● 21세기 한국인들이 점찰 '덜' 중요하게 인식하는 '장개석'
● 장개석과 송미령 부부는 20세기 한국사에 결정적인 역할
● 거인의 죽음을 어떻게 기리는가? 더 이상 국가개입 없이 민간운동에 맡겨야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 그 한가운데 위치한 장개석, 장제스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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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인의 타이베이 패키지 관광에 "중정기념관"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과거에 가본 사람이 워낙 많기도 하고, 특히 요즘 40대 이하는 "장개석"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기 때문인 이유가 결정적이다. 그가 88세로 죽은 시점이 1975년이니, 박정희보다 1세대 이전의 사람인 것이다. 무려 20년 전 송미령 여사가 106세로 맨하튼에서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한국의 젊은이들은 "송씨 세 자매가 누구야?"라며 뉴스 언저리를 두리번거려야 했다. "장개석 부인이라네?" "그렇다네"..일종의 '심드렁'한 자세였던 것이다.

필자 역시도 15년 훨씬 전에 대만을 첫 방문해 중정기념관을 스쳐지나갔지만, 이번에 동아시아 현대사를 좋아하는 관광가이드 덕에 제대로 관람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원래 계획은 중부 "화련"에 가야했지만 태풍으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타이베이 시내 역사 관광지를 여럿 돌아다녔다. 올해로 건립 43년이 된 "중정기념관"을 돌아보니, 우리가 배워야할 대목이 여럿 떠올랐다.

1. "부자" 국민당

우리나라 정당도 "재산"을 갖고 있다. 민정당 "부산당사" "연수원 건물" 등이 대표적이다. 보통 지역당 건물을 대물림하는 수준이라 역사가 깊은 국힘이라도 가진 재산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한국 정당은 주로 국고보조금에 절대 의존한다. 반면 아시아 주요 정치세력은 그렇지 않다. 대개 "핵심정치세력"이 국가의 주요 기구를 장악하고 50년 가까이 집권했기 때문에 정당과 집권층에 쌓인 부가 상당하다.

대만도 오랜시간 군부 독재 국가로 분류됐다. 특히 국민당 정부는 1947년 이후 대만섬을 장악하고 철권통치를 벌인 외부 세력. 자연스레 "국가의 부", 공기업 지분과 부동산이 대거 국민당을 중심으로 쌓이고 대물림되었다. 예를들어 대만의 자랑, 중화의 혼 "대만국립고궁박물원"의 60만점 역사 유물도, 공식적으론 국민당이 들고 온, 국민당 소유 재산이다. 천문학적 땅값을 기록한, 타이베이 곳곳의 토지도 국민당 소유가 적지 않다.

장개석은, 잠시나마 대륙을 통일한 민국시대의 위대한 총독이자, 대만의 아버지, 전세계 1억 화교의 심리적 지도자 역할을 반 세기 가까이 수행한 큰 인물이다. 그가 1975년 사망하자, 대만 정부는 상당한 고민을 했을 듯 싶다. 기념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첫째는 대만 정부가 주도적으로 "시신처리"나 "기념관" 건설을 주도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공산당 방식이다. 정당인, 국민당이 주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국민당은 원래 부자고, 국민당이 "장제스" 기념관하나 주도못할 무능하거나 가난한 조직은 아니다.

2. 아시아 최대규모?

중정기념관은 그의 사후 5년 뒤 1980년에 완공 되었다. 시내 중심가에 면적 7.5만평의 광활한 부지, 작은 대학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이자 언뜻보면 국회의사당 정도의 건물로 적합해 보인다. "자유광장"이라는 큼지막한 광장 좌우에 베이징의 자금성이 연상되는 황금색 건물을 품고, 이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장제스 동상이 압도적 위용을 자랑한다. 아, 그리고 푸른 지붕의 하늘로 솟구치는 본관 건물도 멋지다.

"대충문" "대효문" 이 좌우로 뚫렸는데, 장제스 기념관 뒤로는 문이 없다. 배수의 진을 치고 "중국"을 바라보는 상징적인 동상 배치라니 흥미롭다. 내부엔 "과학"이라는 장제스의 국가 통치 이념이 내걸렸다. "과학부국" 여러모로 장제스의 대만은 박정희 정부에 영향을 끼쳤다. "과학"이란 국시는 지금도 대만 국체의 유지와 무관치 않다. 사실상 마지막 중국 황제였던 그의 존재감, 2차대전에서 항일 전쟁을 이끈, 승전국 지도자로서의 역사성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놀랍게도 아시아의 모든 독립국에는 "국부" 타이틀과 그에 준하는 영예를 안은 지도자들이 존재한다. 비엣남의 호치민,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모택동, 인니의 수카르노, 미얀마의 아웅산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죽은 뒤 그의 후임들은 "사후정치"에 매달렸다. 죽은 선배를 최대한 예우하고 "영웅화" 하는 게 자신의 집권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크고 더 멋진 기념관 건립에 국가의 예산을 아낌없이 투자한 것이다.

3. 전세계 화교 모금, 민간주도

그런데 장제스 정도의 높은 이름값의 지도자라도 사후 "기념관 건립"은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은 원래 그러한 존재다. 물론 역사라는 흐름이 한 인간의 삶을 경배하고, 존경을 표하는 경우도 있다. 정말이지 희귀한 일이고, 역사의 평가는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국민당, 자유중국, 장개석의 현실정치도 수많은 반대자와 비판에 직면한, 오점이 많은 인간이었을 뿐이다.

1975년 사후 5년이 지난 1980년도에 완공된 중정기념관은, 요즘 가치로 약 1.2조원이 훌쩍 넘는 막대한 건설비가 투입이 되었다고. 실제 규모와 위용이 그 정도의 비용에 납득이 간다. 이것을 미망인 송미령의 돈으로 할 것인지, 대만 정부가 나설 것인지, 혹은 국민당이 나설 수도 있었겠지만, 정치의 현실성을 고려하면, 신중한 판단이 필요했다. 결국 대만은 "전세계 화교"의 후원금 모집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국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의 기념관 건립 방식을 택해 "자유중국"이 "공상다른 지향점을 입증해낸 것이다.

만일 정부 주도라면, 어떤 리스크가 있을까? 당연히 정권이 바뀌었을 경우 "격하" 운동에 직면할 위험이 있다. 동상이 철거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장제스가 "민주적 방식"으로 장기집권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대만의 "국부" 급 인물이라고 해도, 사후에 나랏돈으로 기념관을 만드는건 바람직한 모양새가 아니다. 인물을 기리는 운동은 "민간"에서 하는게 합리적이고, 정치인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4. 우남기념관?

대만 시민은 물론 전세계 화교 사업가들이 앞다퉈 기념관 건립에 돈을 기부하고 니섰다 (부지 선정 문제는 대만 정부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데, 큰 돈을 주고 샀는지 여부는 확인이 필요). 이렇게 민간주도 "정치인 기념관" 건립 문제를 떠올린 이유는, 우리나라 국가보훈처가 고려중인 "우남 기념관" 때문이다.

우남 이승만 동상이나 기념관 초상화가 국내에 없었던 것이 아니다. 1960년 이전까지 서울시내 곳곳에 그의 초상화와 기념물이 사방에 깔려있었다. 서울시 이름이 "우남시"로 바뀔뻔도 했다. 생전 화려한 권력과 영예를 누린 "초대 대통령"은 국민을 배신한 죄로 4.19 혁명으로 축출된다. 이후 "국부의 부재"는 우리나라 보수세혁의 커다란 컴플렉스이자, 숙제로 남았다.

그래서 1995년 조선일보의 "이승만과 나라만들기" 캠페인 이후, 보수세력은 꾸준히 "우남 기념관" 건립을 통한 "국부 회복"에 매진했다. 민주당엔 김대중과 노무현이란 거목이 있는데, 보수우익엔 전부 쫓겨나거나 구속된 대통령만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남 이승만"이 거의 유일한 후보자가 된다. 그는 구한말 봉건타파 운동과 일제 시대엔 독립운동을 했고, 미국을 배후로 시장민주주의 도입과 대한민국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했기 때문이다.

5. 민립운동으로 해야

정부나 지자체가 유명인사 기념관을 만드는 건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인물은 역사에 의해 검증될.시간이 필요하다. 자리와 직위는 오래가기 힘들다. 그런 돈과 열정이 있다면 사실은 "대학 내"에 그의 이름을 기리는 펀드를 조성하고, 장학금과 연구기금으로 쓰는 게 백번 더 좋겠다.

보훈처의 "우남 기념관"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인을 기리는 운동은 "민간 주도"로 하는 게 타당하다. 이승만이라는 인물도 충분히 역사성이 큰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기리기 위해서는 우남의 뜻에 동참하는 수많은 기업가들과 시민들의 후원으로 시작되는 게 마땅하다. 심지어 "장개석의 중정기념관" 역시도 민간 주도로 이뤄진 것이다. 그게 바로 복잡한 아시아 현대 거인들, 특히 이들의 사후(死後) 정치에 있어 "염치" 가 아닐까 싶다.

근위대 교대식은 타이페이 관광의 중요 포인트가 된다
인도의 간디를 만난 장제스-송미령 부부. 이들은 20세기 아시아 정치의 한 정점이었다
푸른색 기와로 치장된 대만 정치의 거대한 상징물 '중정 기념관'

PS.
1. 송미령 여사는 현대아시아 여성 정치의 "첫 장"을 써내려간 인물. 그러나, 장제스가 잊혀져가는 판국에 그녀가 후세에도 의미 있게 기억될 확률은 계속 낮아지는 듯.

2. 송미령과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의 권력 다툼도 주요 포인트. "퍼스트레이디" 역시 권력을 행사하고 유명세를 타면 독자적 권력행사를 꿈꾸기 마련. 오늘날 장징궈는 민주주의의 초석을 깐 인물로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고.

3. 천하의 송미령도, 장제스에 의해 "정치 파트너"라고 인정받은 그녀도, 공식 정상회담이나 국제행사에서 키작은 장제스를 밀치고 중심에 서려는 "오버"를 한 적이 없고, 철저하게 서포트 역할에 머뭄. 엄청난 갑부 출신인 송미령 여사를 (그분께서는) 연구해 보셨으면 좋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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