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년 7월 31일
● 1980년대 이후 한국 대중문화에 가장 큰 영햐을 끼친 홍콩 영화,
● 대만의 정체성을 대표한 대륙계 왕조현과 대만계 송운화의 공통점과 차이
● 대만으로의 이주 시기에 따라 다른 대만 주민의 '정체성', 점차 대륙과 차이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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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도 "잘 사는 나라의 미녀"를 동경하기 십상이다. 선진국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 x세대가 느꼈던 최초의 충격은 1988-89년 무렵 개봉했던 영화《천녀유혼1,2》이었다. 이 영화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냐면, 또래 중딩 친구들이 극장에 다녀온 뒤 차마 왕조현에 반했다는 말은 못하고, 그저 조용히 그녀의 사진이 들어간 책받침과 브로마이드를 구매했던 것이다. 남자들은 원래 그런 거, 잘 못하는 데 말이다.
시원한 외모에, 백옥같이 흰 피부, 그리고 뭔가 아련한 눈빛과 초승달처럼 동양적 아름다움을 머금은 눈썹이, 영화 스크린을 가득 채웠을 때, 남조선에 평생을 살아온 어린 수컷들은 말과 글로 형언하기 힘든 "컬처 쇼크"를 느꼈더랬다. 당시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의 수준은 글로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다. 방화(邦畵)에 등장하는 여배우가 가끔 노출을 하긴 했지만, "멋지다"라던가 "아름답다"라는 탄성을 일으킨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왕조현이, 처음이었다.
1. 큰 키의 왕조현
왕조현의 선풍적인 인기는 당시 막 개화하던 연예뉴스와 CF 시장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한국의 방송은 홍콩의 무비스타들의 동정을 쫓는 뉴스를 내보내기 시작한 거다. 1990년대가 되자 mbc 《일.밤》은 홍콩의 왕조현을 모셔와 "방한 쑈"를 기획했고, 해태 크리미는 "밀키스의 주윤발"에 대항해 그녀를 모델로 내세웠다. 당시 중고생이던 X 세대의 열화와 같은 지지가 있었고,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도 당시 우리 또래는 《주윤발》 《임청하》 《왕조현》이 등장한 홍콩 영화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극장에서 관람했더랬다.
왕조현에 대한 정보도 차츰 업데이트 되었는데, 그녀가 홍콩 사람이 아닌 "대만" 출신이라는 점, 영어 이름은 "조이 왕", 중학교 시절 172cm의 큰 키를 활용해 농구를 했다는 사실, 1967년생으로 우리보다 한참 누나라는 사실도 전해졌다. 1990년대 성룡과 주성치의 코믹 영화에 가끔 얼굴을 내밀던 그녀는 갑작스레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결정, 이후 독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아련한 소식만 간간히 전하고 있다.
영화《천녀유혼》은 그야말로 왕조현의 독무대인데, 여기엔 그녀의 큰 키가 작용을 했던 듯싶다. 남방계 중국인, 그러니까 광둥 사람의 키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장국영(175cm)과 피지컬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원체 하늘하늘한 선녀복을 입고 긴 생머리까지 늘어뜨렸기 때문인지 더 도드라져 보인다. 영화를 보고 온 또래들은, 당시 삼국지 읽기가 유행이었는데 "미녀 초선(貂蟬)은 왕조현을 닮았을 것이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2. 내성인, 외성인
대만이 1945년 유엔체제 성립이후 1971년까지 상임이사국 자리를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중화민국의 법통이라 자연스러운 일었다. 하지만 핑퐁외교로 미국과 중국이 관계를 회복하자, 대만은 유엔에서 밀려나고 점차 외교 시장에서 고립된다. 오늘날 대만과 수교국은 고작 13개국.중국 동해의 외딴 섬 대만은 중국에서 밀려온 사람들의 '이주 시기'에 따라 정치성향이 갈리는 특수한 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이를 내성인 vs. 외성인外省人 대결이라고 한다. 명나라 시대에 온 사람과 청나라시기에 온 사람, 민국 시대 이주한 사람의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지향점이 각기 다르다는 얘기다.
가장 결정적인 게 1949년 이후 밀려들어 오기 시작한 국민당 세력이다. 그런데 1945년 독립 당시 타이완 인구가 600만 정도였는데, 이후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이 채 20만이 되지 않는다. 인구 구성비로 3% 정도의 인구가 대만의 '정체성'을 장악하고, 권력을 행사한 시기가 1990년대까지 국민당 정권 시기라는 얘기다. 나머지 90%의 주민들은 본토와는 다른 "대만 정체성"을 추구해왔는데, 뜬금없이 '대륙 수복'을 외치는 국민당 세력에 숨죽여 살아야 했다.
3. 외성인 '왕조현'
이러한 국민당(KMT)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이 바로 "임청하" "왕조현" 등 선굵은 대륙계 여신들로, 이들은 1970-80년대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여배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둘은 대만 태생이긴 하지만, 이미 부친이나 조부가 국민당 정부와 인연이 깊어 대륙에서 살 수 없기에 대만으로 건너온 케이스다. 특히 왕조현 집안 사례가 유명하다.
왕 씨의 증조부인 왕인봉(王仁峰) 선생은 중국의 백과사전에도 나오는 명망가이자 큰 인물이다. 1910~11년은 중국엔 신해혁명 이란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당시 23살의 안후이 성 출신 그는 상하이에서 공부하며 혁명 사업에 매진했고, 이후 손문과도 교류하며 지도자급 인사로 활약했다고 한다. 학문과 서예의 수준이 높아 존경을 받으며 공산화 이후에도 인민대의원 역할을 했다고.
다만 그의 아들, 즉, 왕조현의 할아버지는 국민당의 지독한 정보경찰로 활약한 탓에 '국부천대國府遷臺(대만으로의 후퇴)' 시기 타이완 섬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한다. 이러한 집안 내력은 왕조현에게 큰 키와 중국적 외모를 대물림했다. 그녀의 부드럽고 선한 인상은 요즘 나오는 각진 중국 미녀 '판빙빙'과도 크게 다르고, 남방계 미녀와도 다른 남북이 잘 조화된 중화계 미녀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4. 대만화 Taiwanisation
대만 섬을 표현하는 가장 적확한 표현이 "동북아와 동남아 특성을 모두 갖췄다"라는 것이다. 즉, 남방과 북방의 경계에 있다는 뜻. 대만 섬은 작은 섬이지만, 지리학이나 언어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데, 남태평양 인종의 모체가 되는 오스트로 어족(南方語族)의 중심지가 바로 대만 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빙하기 시절 해수면이 훨씬 낮았던 시절의 유산일 것이다.대만 섬은 명나라 시기부터 화인(華人)들의 이주가 시작이 되었지만, 그 수는 절대로 많지 않았고 원주민과 동화되는 과정을 겪어왔다.
현대 대만의 최대의 비극이라고 불리는 1947년 2.28 사태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권력과 인종 사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권력은 소수파 외성인이 잡았지만 이후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점차 "대만화"의 과정을 겪을 수 밖에 없는 배경이 된다.
임청하와 왕조현 등은 1980년대 대만의 무비스타들은 다들 키도 크고 대륙계 얼굴을 하고 있지만, 2010년대 영화 《나의 소녀시대》 송운화 배우(1992년 생)의 경우는, 뚜렷하게 대만적인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대만에 직접 가서 대만의 명동거리라고 불리는 서문정西門町에 가서 거리를 오가는 젊은이들의 얼굴을 잔잔히 살펴보니, 다들 과감한 옷차림에 멋진 몸매를 하고 있지만, 외모는 "왕조현"보다는 '송운화'에 가까운 이들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누가 나보고 "광둥" "대만" "싱가폴" 화교를 구분할 수 있겠냐, 라고 묻는다면, "불가능하다"라고 대답해야할 것이다. 확실히, 대만엔 남방계 미인이 많지 한국과 중국과는 다름이 느껴지는 듯싶었다.
5. 정치적, 문명적 "다름"
1947년 이후, 대만은 뚜렷한 정치적 격변기를 거쳤다. 국민당 정부에게 탄압을 받은 내성인은 "차라리 일제 강점기가 좋았다"라는 반응을 쏟아내, 한동안 "친일 국가"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대만을 볼 때 "친일 프레임"을 먼저 들이민다. 일종의 대륙과 섬나라의 사이에 있는 '애매모호한, 국가 아닌 국가'라는 설명인데, 이는 우리가 대만을 볼 때 "친일" "친중" 이외에는 뚜렷한 관점이 없다는 얘기도 된다.
천수이벤陳水扁과 차이잉원蔡英文의 등장은 지난 70년이 넘는 대만 민주주의의 발전의 산물이자, 대만적인 정체성의 확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차이잉원은, 올해가 마지막 집권해인데,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높은 평가를 받을 공산이 크다. "대만"이라는 정체성 유지를 위한 노력은 후배 대만인들이 더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대만의 정치와 외교가 어떠한 격량을 맞이하더라도, 대만의 미래는 과거 400년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즉, 대륙에 속하지도 않고, 열도에 속하지도 않는, 대만적인 정체성을 장시간 유지할 공산이 크다. 향후 대륙서 10만, 100만이 건너오더라도 2300만 명에 달하는 대만인의 숫자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PS.
1. 요즘 아이돌 "장원영" 선생을 볼 때마다, 필자는 "왕조현"이 떠오름. 아, 늘씬한 중국의 미녀라는 것은 저런 느낌이구나, 하고 생각함.
2. 《나의 소녀시대》2015년작을 너무 재밌게 보았음. 등장하는 소년소녀들이 딱 "대만적"이라서 강렬한 기억. 여주인공 송운화의 인상이 너무 대만적.
3. 왕조현의 증조부는 몰락하는 청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상하이서 무장 봉기를 준비중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오폭 사고가 터져 한 팔을 잃었다고. 엄청난 기개의 선비였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