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미얀마 쿠데타, 엇갈린 아세안

○미얀마 쿠데타와 아세안의 불확정적인 미래
○불간섭주의와 건설적 개입이란 모순…혼란에 빠진 아세안
○중국과 미국 G2 에 흔들리는 회원국, 문제 심화시켜

정호재 | 싱가포르국립대


서론

코로나가 퍼지기 몇 해 전 2017~18년 무렵 싱가포르에는 미얀마인들이 대략 20만 명 정도가 사는 것으로 조사된 적이 있다. 물론 이들 전부가 노동자로 일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 외국인이 약 140만 명 정도인데(총인구 약 560만명) 이 가운데 ‘20만’이란 숫자는 절대 낮은 비율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약 4만 명 정도였으니 대략 5배가 넘는 규모다. 더구나 이 숫자는 2011년 이후 미얀마의 개혁과 개방으로 인해 빠르게 증가한 결과이기도 했다. 해외로 나가 일할 기회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20만 가운데 1/3 정도는 젊은 여성들로 싱가포르에서 주로 가정부로 일했고 나머지 남성들은 항구나 건설현장에서의 저숙련 노동자로 활약했다.

싱가포르 사회는 외국인 비숙련 노동자에게 한국과 일본만큼의 높은 임금을 주지는 않는다. 주변에 저개발 국가 노동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얀마인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 숫자가 다른 선진국과 달리 압도적으로 많고 길게는 7~9년까지 장기로도 일할 수 있어 가장 선호되는 나라로 꼽힌다. 같은 아세안 소속 국가라는 친밀성과 지리적 근접성에서 오는 오랜 교류의 축적 덕분일 것이다.

미얀마 출신 노동자는 방글라데시와 더불어 전세계에서 가장 싼 임금에 속한다. 싱가포르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여성들은 한 달에 70~80만 원 정도를 월급으로 받는데, 이 가운데 일정 부분을 에이전트 비용과 생활비로 쓰고 대부분은 고향에 송금하는 식이다. 때문에 싱가포르에서 오는 외화 송금액이 미얀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미얀마 국내에서 받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대개 월 20만 원, 태국으로 건너가 일할 경우는 30~40만 원 정도를 받는다. 미얀마인들이 국경을 접한 태국과 아세안의 부국인 싱가포르 이외 지역에 노동자로 나갈 기회를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상 아세안을 빼놓고는 국제사회와의 연결 고리가 여전히 취약하다는 얘기다.

아세안, 미얀마의 비빌 언덕

미얀마 양곤에 가보면 막 지어진 쇼핑몰이나 최신식 콘도의 외관 디자인을 살펴보면 대체로 싱가포르 건축 양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싱가포르 자본과 기술이 관여된 경우가 그만큼 많다는 증거다. 실제 싱가포르는 중국과 함께 대對 미얀마 투자 1~2위를 다투고 있다. 이보다 절반 정도의 규모로 홍콩과 인접국 태국이 3~4위권 경쟁을 하고 있고, 한국은 이들과 한참이나 차이나는 액수로 EU,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과 함께 5~10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2012년 이후 본격화된 개혁개방의 긍정적인 결과가 바로 아웅산 수찌의 집권과 미얀마로 향하는 투자와 관광객들의 물결일 듯 싶다. 제3세계의 경제발전에 있어 ‘외국인 직접투자’의 중요성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해외자본이 들어와야 기술과 사람이 따라오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공통의 이해관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투자 사례는 중화권(중국+싱가포르+홍콩)이 얼마나 미얀마를 중히 여기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다. 동시에 싱가포르는 태국 등과 함께 아세안으로도 분류되기에, 오랜 폐쇄경제로 고통을 겪은 미얀마에 영향력을 끼치는 세력은 현재 중국과 아세안이 가장 결정적임을 시사한다.

서방세계는 1988년 민주화 시위에 대한 군부의 대대적인 유혈탄압이 이뤄진 직후 2012년까지 고강도의 경제제재를 이어왔다. 자본 투자나 기술제공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서방과 미얀마가 뚜렷한 접점을 찾기 힘든 배경이 된다. 이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62년 쿠데타가 이뤄진 이후부터 미얀마 군부는 꾸준하게 외세의 개입을 거부하고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이상을 제시하고 실천해 온 탓도 크다. 이는 쉽게 설명하면 북한의 주체사상과 흡사한 “고립주의(isolationism)”라고 볼 수 있다. 버마의 자원을 ‘좀 먹는’ 외국인과 외국기업을 내쫓고 서방세계와의 교류를 완전히 끊는 방식의 정책이 연이어 나왔던 것이다.

1950년대 이란에서 본격화된 자원민족주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로 열풍처럼 번졌는데, 영국에 의한 오랜 식민지 경험을 처절하고 비참하게 기억하는 미얀마 군부의 경우 민족주의와 결합된 고립주의에 대한 신념이 유달리 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큰 문제는 그 고립의 강도와 지속성이 인도와 중국이란 지정학적인 틈바구니 속에서 되레 철통처럼 유지되었고, 이후 감히 그 어떤 외세도 미얀마의 고립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십 수 년이 아닌 이미 60년을 훌쩍 넘긴 고립주의의 결과가 근래 미얀마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 인권유린과 경제난 그리고 장기화한 군부독재라고 말할 수 있다.

[표]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가입 순서 및 미얀마 쿠데타에 대한 입장

2021년 4월 미얀마 사태를 논의하는 아세안 정상들 (출처:위키)

※ 각국의 기본 입장은 미얀마 국민의 인권을 중시하고 유혈 사태에 비판적임. 다만 미얀마 정세를 둘러싼 상황변화에 따라 군부에 대한 입장이 중층적이며 유동적이기도. 2021년까지 언론에 표출된 대체적인 경향을 필자의 주관에 따라 정리한 내용이며 일부 변화가능성 있음.

떼인세인을 거쳐 아웅산 수찌로

미얀마의 경제는 2011년 떼인세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개방의 길을 본격화한다. 물론 1990년대 아세안 가입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높여가며 1997년 사상 처음으로 다자협력에 기반을 둔 국제기구(아세안) 가입에 성공하긴 했다. 미얀마의 아세안 가입 신청과 승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하는 데, 무엇보다 냉전이 해체된 1990년대의 시대상황이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양측이 서로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미얀마로서는 오랜 고립으로부터의 탈출로가 필요했고, 아세안 역시도 미얀마를 포섭함으로써 지역의 안보와 자체 영향력의 강화를 꾀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떼인세인은 군부의 고위 장성 출신으로 총리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이전 네윈이나 딴쉐와 달리 군복을 벗고 2008년에 개정된 신헌법에 의해 국가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에 취임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한국적 상황과 비교하면 제 6공화국의 출발인 노태우 전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5년 단임 정부를 이끌었다는 점도 엇비슷하다. 이 시기 미얀마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는데, 미국과 중국이 인도양으로 연결된 미얀마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재인식하면서 경쟁적으로 손을 뻗었던 영향 탓이다. 덕분에 아웅산 수찌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고 정치인으로 변신해 야당지도자가 되었으며 2015년 11월 선거에서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내게 된다. 동시에 미얀마는 급속하게 아세안과의 연결고리가 강화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게 떼인세인 정부(2011~2015)는 군부와 이후 민주정부의 가교역할을 맡았다는 점에 기대와 호평을 받았다. 변화의 기대 속에 2016년 아웅산 수찌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곧바로 질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군부와 일부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를 지양하고 국제적으로 개방된 민주적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NLD 정부의 최종 목표였을 것이다. 군사정부 시절에는 주로 중국과의 교역에 의존하며 경제를 꾸려왔지만 그 교역의 혜택이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미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연스레 기업 활동을 장려하고 관광업을 국가의 핵심 산업으로 지정하는 등의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 그에 걸맞은 사회인프라 건설이 시급해졌다. 본격적인 개방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투자였다. 군부시절 국가안보 탓에 우선순위에서 미뤄진 전기와 도로망 등을 확충하고 국민들의 기본교육과정을 군사 쿠데타 이전으로 되돌리는 국가 정상화의 과정이 뒤따른다. 문제는 내부 자본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외직접의 투자 확대가 필요했다. 수찌에게 있어 미얀마의 ‘정상화’란 무엇보다 아세안 국가들과의 교역을 통한 개방의 효과를 누리는 것에 가까웠고, 아세안 국가들에게는 수찌 정부의 경제수치가 나빠지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이러한 변화의 와중에 5년 임기를 넘어 10년짜리 정권을 구상하던 수찌와 NLD에 커다란 장벽이 펼쳐진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과 2021년의 미얀마의 쿠데타이다. 연이은 이 두 가지 사건은 사실 생채기라는 표현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지난 10년간의 모든 개혁 개방의 성과를 날려버리고 순식간에 수십년 뒤로 후퇴했다고 평가받을 만큼 충격적이라고 표현해야 할 듯싶다.

쿠데타 효과

2020년 2월 1일 쿠데타가 일어난 지 거진 1년이 되었다. 지난 1년간 대략 1천 300명 이상의 시민들이 거리 위에서 군인들의 총칼에 쓰러졌으며, 수십 년간 지속된 연방정부와 소수민족 간의 평화 프로세스도 전면적으로 중단되고 되레 악화되기에 이른다. 장기간 미얀마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된 로힝쟈Rohyngya 난민에 대한 문제 해결 역시도 요원해진 상황. 유력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에게 다시금 재갈이 물려졌고 정치와 경제는 권위주의적 행태가 판치던 2000년대 초반의 상황으로 퇴행하고 말았다. 군인들이 다시금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며 이들과의 오랜 인맥을 가진 일부 기업인과 권위주의 시절 공직자들에게 힘이 집중된 권위주의 사회로 돌아간 것이다.

쿠데타로 인한 내부 정세의 변화보다 더욱 더 큰 영향을 받은 곳이 바로 미얀마의 ‘외교’를 둘러싼 거의 모든 분야일 것이다. 정권교체가 어느 정도의 연속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전면적인 내전 양상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미얀마 쿠데타로 축출된 선출 입법자들과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미얀마의 연방의회 대표위원회가 만든 미얀마 민족통합정부(NUG)라는 이름의 망명정부를 구성했지만, 망명정부가 미얀마 내정과 외교에 미칠 힘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국경지대에 일부 시민군 형태의 조직을 갖추고 한때 정부군과 전면전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1988년 투쟁 이후 망명정부가 그러했듯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찌되었든 오늘날 미얀마의 모든 권력은 다시금 군부에게 돌아간 것이다.

미얀마의 시대착오적인 쿠데타와 이어진 유혈 사태에 대해 전세계가 경악했지만 누구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곳은 동남아국가연합, 즉 아세안(ASEAN) 사회다. 지난 1997년 미얀마의 아세안 가입을 승인한 이후 미얀마의 개혁과 개방에 가장 큰 후원자이자 후견인 역할을 해온 존재가 다름 아닌 아세안이라고 스스로 믿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대통령은 2017년 아세안 창설 50주년 기념 기고문에서 “우리는 미얀마에서의 변화를 2011년 까지는 반쯤 빈 컵으로 바라 본 게 아니라, 반쯤 차있는 컵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충분치는 않지만 확실한 발전이 이루어졌다.”라고 언급했다.

‘반쯤 차있는 컵’ 이란 미얀마의 내적인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던 1989~2010년 사이에도 최대한 긍정적― 일종의 진통의 기간―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는 뜻도 된다. 1997년 미얀마의 아세안 가입을 허용한 것도 바로 이러한 아세안 회원국들의 우직한 기다림, 즉 ‘의리(義理)’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2011년 이후부터는 드디어 고대하던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2021년 쿠데타로 이제껏 진행된 미얀마의 정치발전과 아세안과의 긍정적인 관계 역시도 원점으로 회귀한 셈이 되었다.

무능한 아세안과 미얀마 문제

아세안을 둘러싼 담론 가운데 “아세안의 무능(Inability of ASEAN)”이라는 표현은 창립 이래로 빠지지 않고 반복적으로 나오는 비판이자 공격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왜 아세안은 무능할까. 지역 내 뚜렷한 정치 경제의 발전이나 지역 안보의 성과를 자랑하기 미흡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정적인 눈으로 보면 아세안의 무능을 설명할 수 있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최근 미중 갈등 속에서 아세안의 분열은 심각한 수준인 것도 문제다. 특히 미얀마를 다루는 서투름 역시도 아세안의 무능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동남아시아 국가와 시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뚜렷한 생각 가운데 “아세안끼리 뭉쳐야 한다”는 지역주의 사상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동남아 국가를 가보더라도 자신의 국가 정체성뿐만 아니라 아세안 소속이라는 뚜렷한 지역 정체성을 갖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유럽의 정신과도 유교로 뭉쳐있는 동북아 정서와는 맥락이 조금 다르다. 아세안은 특히 안보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며 지난 18~19세기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제국주의에 대한 가장 큰 피해자라는 역사적 맥락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인종이나 언어적 지리적인 친밀성과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니다. 아세안이라는 지역이데올로기는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무척 어렵지만, 다른지역과 마땅히 직접적인 비교를 하기 힘든 아주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런데 아세안이라는 동질성 및 지역주의에 가장 큰 혼란을 가져온 회원국이 1997년 가입이 승인된 미얀마인 것이다. 미얀마는 회원 가입 신청부터 아세안 내 회원국간의 치열한 논란과 갈등을 불러온 것을 비롯해 2000년대에는 오랜 기간 “로힝쟈 사태”로 커다란 인종과 종교적인 분란을 일으켰으며, 2007년의 싸이클론 나르기스 사태당시 미얀마 군부 정권의 폐쇄적인 구호지원, 2007년 샤프론 혁명 당시 미얀마 승려와 외신에 대한 잔혹한 탄압, 그리고 2021년 아웅산 수찌 정부를 전복한 군부 쿠데타와 1000명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만행으로 아세안 지역 내에 뚜렷한 균열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2021년 4월 아세안 정상들이 미얀마 사태를 논의하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쿠데타에 대한 입장?

미얀마 사태가 지속적으로 아세안 내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얘기는 회원국들마다 바라보는 관점과 해결방안도 조금씩은 다르다는 얘기다. 사안별로 시기별로 미얀마는 아세안의 성격과 미래를 규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기도 했다. 이번 쿠데타와 시민불복종 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 사태가 절대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데 동의하고,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국제사회는 아세안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도 공감대가 퍼져있다. 하지만 아세안 각국들이 미얀마의 악화된 내정 상황에 대한 입장을 뚜렷하게 요약해 정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변수들이 복잡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선, 아세안이라는 기구가 EU처럼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가 무척 힘든 구조로 짜여있다는 점이다. 즉, 유럽의회처럼 주민들의 직접선거로 인해 선출되는 대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10여개 회원국들의 최고지도자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사안별로 정권에 따라 심지어 장소에 따라서 상반된 입장이 종종 표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이후 정권이 뒤바뀐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의 경우는 정권의 교체에 따라서 아세안의 비전과 오랜 갈등의 싹을 제공한 미얀마에 대한 입장이 시시때때로 변해왔다. 둘째는, 이와 같은 문제의 연장에서, 외교적 접근법과 언론에 표출하는 정치인의 입장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직업적 외교관이 ‘자제’와 ‘신중’을 기반으로 ‘국가의 전략적 이해’를 깔고 발언한다면, 대중정치인은 국민감정과 선악의 구분이 때론 더 중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교부의 공식 입장과 정치인의 사견을 명확하게 구분해 대표성을 가늠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세 번째가 가장 결정적인 이유인데, 여전히 아세안에는 “내정불간섭 원칙(non-interference)”이라는 철학이 광범위하게 퍼져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원칙은 1967년 아세안이 설립될 당시부터 아세안의 기본철학으로 자리잡은 것이 사실이다. 오랜 원칙이긴 하지만 ‘절대불변’의 원칙이 아닌 것도 흥미롭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엔 어느정도 후퇴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미얀마와 인접한 태국과 같은 경우에는 미얀마에 대한 외교정책을 공식적으로 ‘건설적 개입’으로 확정하고, 이 같은 원칙을 아세안 전체에 퍼뜨리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세안 이웃의 내정에 대한 ‘불간섭주의’는 아주 널리 퍼져 있는 핵심 철학 가운데 하나이며, 상호간의 ‘건설적 개입’의 정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미완성인 상태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아세안 회원국들은 지역의 안보문제 해결을 위해 그들 사이의 ‘단결(unity)’을 외치면서도 그 단결을 위한 ‘상호간의 협력과 견제’에 대해서는 아직은 어색해하고 회원국들마다 체감하는 수준이 크게 다르다는 얘기다. 미얀마에 대한 접근법이 가장 대표적인데, 이미 미얀마 군부는 1990년대 야당과 소수민족 탄압, 2000년대 로힝쟈 난민 사태, 그리고 최근의 쿠데타로 아세안의 골칫거리이자 지역 안보의 최대 위기로 거론되면서도, 미얀마 군부 지도자에 대한 가장 최고의 압박이 2021년 아세안 정상회의에 초대하지 않는 간접적인 압박 이외엔 뚜렷한 물리적인 제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상회의에 초대하지 않는 수준의 징벌이 과연 어느정도 효과가 있을 지는 미지수다.

2021년 쿠데타 직후인 3월 25일 ‘아세안과 미얀마 사태’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싱가포르의 전직 외교관이자 현재 NUS 법학교수로 재직중인 월터 운청밍(Walter Woon Cheong Ming) 교수의 코멘트로도 아세안이 추구하는 미얀마 사태의 실현하기 쉽지 않은 이중의 접근법을 대략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얀마에서 진행된 것은 대단히 끔직한 일입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세안과 세계 시민의 일원으로 어려운 선택 앞에 서있습니다. 현실은 우리가 그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제재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런 모든 것이 군부의 행위를 승인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유연한 개입” 아세안의 대응

2021년 아세안 회원국들은 미얀마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상당히 빠르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4월 25일 미얀마 사태 해결책을 논의하기 위한 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바로 그것이고, 당시 5개항이 의장성명 부속문건 형태로 국제사회에 공개가 되었다. 특히 아세안 정상들은 미얀마 군부를 이끄는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에게 가장 먼저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한 군경의 폭력 사용 즉각 중단을 촉구했다. 5개항은 다음과 같다.

▲미얀마의 즉각적 폭력중단 및 모든 당사자의 자제 ▲국민을 위한 평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한 건설적 대화 ▲아세안 의장과 사무총장이 특사로서 대화 중재 ▲인도적 지원 제공 ▲특사와 대표단의 미얀마 방문

하지만 미얀마 군부는 겉으로는 이를 수긍하는 듯 했지만 실제를 그렇지 못했다. 이와 같은 ‘5개 요구사항’이 미얀마 정국의 안정과 인권유린에 대해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0월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게 되는데, 아세안 외교장관들은 10월 15일 긴급 화상회의를 열고, 26일부터 28일까지 열리는 아세안 정상회의에 민 아웅 흘라잉 대신 비정치적인 인물을 초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초 자연스럽게 권력을 쟁취하고 외교적 승인까지는 별다른 고민이 없던 민 아웅 흘라잉과 미얀마 정부(외교부)는 이와 같은 조처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군부 지도자인 흘라잉이 외교적인 승인을 받을 곳은 앞선 설명대로 아세안이 유일한데, 정상회의에 참석을 못할 경우 영원히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10월 결정은 불간섭주의 원칙을 기반으로 회원국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침묵을 지켜왔던 아세안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역사적 사건이라는 평가도 잇따랐다.

최근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다. 2022년 의장국인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가 지난 한해 의장국인 브루나이와 인도네시아 등 주요 아세안 정상과의 노력과는 정반대로 1월 7일과 8일 아세안 의장 자격으로 미얀마를 공식방문 한 것이다. 훈센의 미얀마 방문은 흘라잉 정권에 일종의 날개를 달아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는 이 방문을 통해 지난해 아세안 정상들이 쿠데타 평화적 해결을 위해 합의한 '즉각적 폭력 중단' 등 5개 항을 지키도록 흘라잉 사령관을 압박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서방 국가들과 인권시민단체들은 쿠데타 이후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고립이 심화하고 있는 미얀마 군정에 손을 내미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훈센 총리가 과연 아세안 내에서 어떠한 의견을 표출하고 미얀마 방문에 나섰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역시 ‘아세안의 무능’을 입증하는 사례로 회자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뒤집기 어려워진 미얀마 정국

지금까지의 흐름을 정리하면, 훈센이란 예외도 있지만, 아세안의 주요 참여국들은 미얀마의 군부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는 컨센서스가 없지 않다. 우선 아세안의 절대강자인 인도네시아는 미얀마 군부의 방종을 감내하지 못하고 혼내고 최후의 수단으로는 쫓아내야 한다는 강경 의견을 지속해 왔다. 1997년 미얀마의 아세안 가입 논의 당시 마하티르 총리가 나서 뚜렷한 견제 목표를 제시해온 말레이시아는 지난 10월 민 아웅 흘라잉의 정상회의 참석을 막아선 주역으로 알려졌다. 미얀마에 막대한 자본투자를 지속해 온 싱가포르 역시 적극적인 아웅산 수찌지지 세력이다. 리센룽 총리는 지난 14일 훈센 총리와의 화상전화에서 "아세안 합의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군부는 여전히 시민들을 공격하고, 민주 인사들에 대한 형량도 계속 늘리고 있다"며 "수치 고문 면담 허용과 미얀마 내 폭력 사태 종식에 대한 진전이 있기 전까지 군부 지도자들을 아세안 회의에서 계속 배제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훈센의 미얀마 방문이 한국인을 포함한 외부의 시각에는 꺼림칙해 보이지만,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배경도 없지 않다. 일단 미얀마 군부를 대신할 뚜렷한 경쟁세력이 국내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웅산 수찌가 이끄는 야당은 이미 분쇄가 되었고 학생 지식인 계층은 물론이고 언론마저 완벽하게 제압당한 상황에서, 미얀마 군부의 입지는 너무도 확고부동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미얀마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법 이외에는 뚜렷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 오랜 정권 유지 경험으로 아세안 회원국들과 대화 채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사실상의 오랜 독재 정권인 캄보디아가 가장 먼저 회유되었는지, 이미 다른 여타 회원국도 미얀마 군부에 협조적인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다.

아세안의 창설멤버인 태국, 특히 태국 정치를 이끄는 군부의 입장도 관심거리이다. 미얀마와 가장 긴 국경을 공유하며, 실질적으로 미얀마 정국의 불안은 난민 수는 증가하고 태국 내 저임금 노동을 책임진 미얀마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끌려가는 등 등 태국의 정치경제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과거 ‘건설적인 개입’을 주장해왔던 것과는 크게 다른 처지가 된 것이다. 태국 언론의 입장을 살펴보면 그 고민을 짐작할 수 있다. 아세안을 오래 취재한 태국 칼럼니스트인 카비 총키타본(Kavi Chonghittavorn)은 지난해 10월 12일자 방콕포스트에 기고한 칼럼 “두 개의 임무: 아세안과 미얀마 구하기(Dual task: Save Asean, save Myanmar)”에서 미얀마와의 원만한 타협을 주문하면서, “아세안은 미얀마와 협력해야 하며, 미얀마처럼 가장 약한 국가들이 올바르게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만일 아세안이 미얀마를 봉쇄한다면, 이는 장기적으로 미얀마를 더욱 고립시킬 것이고 외부 강대국들의 종속 국가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와 안정 그리고 아세안의 친밀성은 사라질 것이다. 아세안은 더 개방적이고 포괄적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미얀마 군부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아세안, 안정희구로 돌아갈까?

필리핀 역시 태국의 입장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필리핀의 두레르테 정권의 성향이 이웃 국가의 정상화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일 것 같지도 않다. 아세안의 초석을 다진 필리핀과 태국의 태세 전환은 참으로 흥미로운 관점 포인트다. 1960년대 처음 아세안이 구상될 당시 후보국이던 미얀마가 가입을 주저한 이유는, 필리핀과 태국에 거대 군사 기지를 가진 미국 때문이었다. 냉전시기 중립성을 택하고 싶었던 미얀마 군사정부는 의도적으로 아세안을 포기하고 명예로운 고립을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60년의 시간이 지나서 필리핀과 태국은 미얀마 군부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내비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얌전했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나서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아세안의 핵심 주역들은 미얀마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1990년대의 의사결정을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아세안을 강화시킬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라고 반기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이 같은 질문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이미 미얀마를 아세안의 구성원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아마도 이 세 가지 태도 가운데 한 가지 답은 있을 것이지만 당분간은 그 속내가 드러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오늘날 아세안에 있어 ‘미얀마 이슈’는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갈지자 행보와 아세안의 무능이라는 문제가 서로 뒤엉킨 탓도 크다. 과연 팬데믹과 경기침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아세안은 자신만의 탈출구를 찾아낼 것인가. 2022년 가장 중요한 아세안과 국제사회의 숙제일 것이다.

2022년 2월 22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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