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동양의 아테네 or 스파르타? 홍콩과 싱가폴

O 시민권 텃세-빈부 양극화 속 정치 거세, 이질적인 문명의 용광로...싱가포르
O 2019년 아시아를 강타한 홍콩 사태, 싱가포르 반사 이익
O 홍콩과 싱가포르의 상호 보완적, 경쟁적인 관계

글 | 정 호 재


싱가포르 중심지 모습. 빌딩 숲을 이뤘지만 홍콩만큼 유명한 기업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촬영: rootasia)

싱가포르서 5년 넘게 비즈니스가 아닌 주로 공부를 하면서 살았다. 좁은 도시국가라지만 한국인의 눈으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라고 생각한다. 초반 2년은 중산층에 속한 콘도에서 여유롭게 수영을 즐기며 살았고, 2019년 하반기 몇 달은 '동가식서가숙'하며 싱가포르 현지인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지냈다. 그 덕분에 적잖은 싱가포르 사람을 만났고, 물론 아주 많은 한국 사람과 이곳에 일하거나 공부하러 온 다수의 아세안 사람도 만났다.

그러니까 싱가포르는 아세안 지역의 일종의 경제수도와 물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쌓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지속될 아시아-해양문명 시대의 주도권을 놓지 않을 것이란 야심을 감추지 않는 동네였다.

싱가포르는 일견 "동양의 아테네"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기도 했지만 동시에 "동남아의 스파르타"와도 비견되는 특징도 갖고 있는 무척이나 이중적인 도시국가였다. 앞으로 이 자리를 통해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의 문화와 경제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를 풀어내고 싶다.

1. "이주민" vs "시민권"

싱가포르가 작은 나라라 뭔가 묘사하기 쉬울듯 하지만 무척이나 이중적이고 까다로운 나라다. 당장 중국의 주요 화교 집단에 대한 이해와 그 사이의 경쟁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1차적 설명이 가능하고, 거기에 14% 이루는 말레이계와 9% 인도계에 대한 이해도 필수적이다.

가장 먼저 싱가포르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대목은 일반적인 영토국가와 달리 주로 이주민으로 구성된 무척이나 이질적인 사회라는 점이다. 인종 이외에도 뚜렷한 두 개의 뚜렷한 시민-계급 집단이라는 대립항이 눈길을 끈다.

첫째는 시민 vs. 외국인이다. 싱가포르에서 시민권은 그 무엇에 우선한다. 시민권이 무척 강력하기에 외국인이 내국인에게 법적으로 대항하기 상당히 까다롭다. 싱가포르에는 무척이나 다종다양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 일하고 있는 사회다. 그 때문인지 시민권의 존개감이 무게감을 더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 덕분에 집주인들의 텃세는 상상을 초월한다. 사소한 분쟁이 발생해도 "나는 내국인인 걸  너 같은 외국인 따위가"라는 고압적인 자세로 간단히 제압해 버리기도 한다. 한국에서 익히 배웠던 만민평등이나 외국인 특혜 같은 건 이곳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둘째는 연봉의 격차에 따른 부자 vs 빈자의 구도다. 싱가포르에 2억 원을 훌쩍 넘기는 연봉을 자랑하는 초일류 외국계기업의 직원들이 즐비한 것이야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 가구소득 5000만원 미만의 차상위 계층도 의외로 적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부유한 사회지만 양극화 경향도 강하다는 얘기다. 이 같은 현상은 점심 밥값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중산층 이상은 2만 원짜리 이상의 점심을 먹고 그 이하는 4000원짜리 점심이 익숙하다. 흥미롭게도 1만 원 짜리 점심은 여러 조건 탓에 한국처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2. 거세된 정치, 관심은 돈?

싱가포르는 무척이나 심심한 사회다. 우선 영토의 크기가 작은 탓이다. 이끝에서 저끝까지 1시간 반이면 이동이 가능한 사회다. 주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하고, 저녁에 반찬을 사서 퇴근해 집에서 먹는 게 일상의 전부다. 적도 기후인 탓에 사람들이 술을 즐겨마시는 것도 그다지 환영 받진 못한다. 물론 주류세와 담배세금이 높은 탓도 그 이유가 된다.

때문에 해외여행과 상대적으로 느슨한 스포츠 정도가 유일한 탈출구일 듯 싶다. 실제로 싱가포르 중산층은 유럽이나 선진국으로의 해외여행에 아주 많은 돈과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좁은 땅에서 높은 장벽을 유지하면서 살다보니 주기적으로 해외여행을 하지 못하면 그 스트레스를 어디에 풀 수가 없어보인다. 유흥과 정치가 사실상 통제됐지만 상대적으로 해외 스포츠와 문화 콘텐츠는 전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활발하게 소비된다는 점도 특징이다. 싱가포르의 영국 프로축구(EPL) 사랑은 정평이 나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쫓아 들어가면 싱가포르 사회가 무미건조한 이유는 정치활동이 억제당하고 있는 탓도 무시 못한다. 최근 싱가포르의 선거결과를 보면 여당과 야당의 득표율은 5.5 대 4.5 정도로 팽팽하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미디어에서 야당 관련 뉴스를 접하는 것은 무척이나 희귀한 일이다. 신문과 방송이 야당 소속 정치인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독립 이후 정부 여당이 독주해온 사회이기 때문에 한국처럼 정권교체와 정부비판 목소리가 높은 사회에서 온 사람은 상당히 무미건조하고 다양성이 결여된 사회로 보이기 십상이다.

때문에 대다수의 싱가포르 중산층들은 좁은 곳에서 사는 스트레스를 돈 버는 것으로 푼다고 한다. 저축하고 펀드 가입하고, 해외 주식투자해서 고급 콘도나 아파트 사는 게 최고의 지상목표다. 일부는 아주 많은 돈을 벌어 호주 퍼스나 영국으로 이민을 실제로 실천하기도 한다.

싱가포르의 최고 엘리트인 정부고위 관료들은 10억 대가 훌쩍 넘는 연봉을 받으며 세계적 자본의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위치에 오르기도 한다. 싱가포르 국민이나 정부 모두 끊임없이 재테크에 열심인 셈이다.

싱가포르는 뚜렷한 개성 강한 개인들이 돋보이기보다는 정부의 존재감이 너무 커보이는 나라로 볼 수 있다. 정부는 언제나 과학적이고, 전략적이며, 무척이나 미래지향적인 어젠다를 선점하고 국민들을 이끌고 있다. 쉽게 약점이나 단점을 찾아보기 힘든 그런 철벽수비를 자랑하는 수문장 같은 느낌이다.

반면 개인들은 좌절된 정치적 욕망과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새로 건국한 싱가포르라는 새로운 사회와 개인의 성취(재산)를 통해 에둘러 표현하는 모양새가 됐다. 물론 이 같은 거친 묘사는 어느 정도 단편적이고 한계를 갖는다고 본다. 오히려 미국 사회처럼 "용광로" 같은 사회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앞으로 어떻게 싱가포르를 설명하고 이해해야할까? 당분간 필자도 무거운 숙제를 짊어진 셈이 됐다.

홍콩 빅토리아 항구의 야경 (촬영: rootasia)

3. 아시아 강타한 '홍콩사태'

2019년 아시아 최고의 화두는 단연 홍콩사태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 전체 아시아 사회의 상당지분을 차지하는 동남아 화교 사회에서, 홍콩 문제는 일종의 정치경제적 문제를 뛰어넘는 실존적 문제였다.

홍콩은 지리적으론 중국에 포함돼 있지만 화교사회와 오랜 밀접한 관계를 지녀왔다. 지난 150년간 베이징과 멀지감치떨어져 경제적 부와 정치적 자유를 누렸지만, 이제 이 같은 자유와 번영이 과거의 역사가 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나라를 잃은 화교들은 복건과 광동 등 고향을 떠나 지난 200년간 아주 복잡 다단한 유랑과 정치적 박해를 거쳐야 했다. 이 가운데 소규모지만 정치적 독립을 이뤄낸 곳이 바로 싱가포르다.

21세기 '중국의 급성장'은 커다란 충격이면서도 어찌보면 화교 사회에게는 아주 익숙한 황제의 귀환인 셈도 됐다. 홍콩은 가장 먼저 그 폭풍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 셈이 됐고, 싱가포르 역시도 강건너 불이 아닌 상황이 됐다.

"홍콩은 주식-외환! 싱가포르는 현물-선물!"

싱가포르에서 똑똑한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석유 관련 선물시장에서 일한다. 여기서 영역을 조금 확장하면 석유 현물, 비철금속, 금은채권, 화물로지스틱스 등으로 확장된다.

홍콩은 익히 알려진 대로 증권시장을 비롯한 외환 금융시장으로 아시아를 대표해 왔다. 쉽게 얘기해 아시아와 중국의 제조업과 자원 시장을 캐피털라이즈화하여 미국과 유럽시장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이 두 국제도시가 아시아에서 200년간 수행해온 것이다. 홍콩은 동아시아 대표항구, 싱가포르는 동남아 대표항구인 것이다.

4. 아시아 양대 자본시장

그런데 홍콩과 싱가포르는 묘하게 도시의 정체성이 다르다. 우선 싱가포르는 독립 이후 집중적으로 항구경쟁력을 끌어올려, 인근의 거의 모든 경쟁도시를 제압하고 아시아 1등 물류도시가 됐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는 석유저장시설에 투자를 집중시켜 동아시아 석유거래의 중심이 됐다. 한중일이 쓰는 99% 석유가 바로 이 싱가포르에서 숙성된 석유다.

물류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싱가포르는 100년 전부터 "동양의 스위스 전략"을 추구해왔다. 항구와 이 석유창고의 의미는 시설이 너무 중요해, 외적에게 항복할지언정 파괴가 되면 곤란해진. 때문에 정치적 자유보다는 안보(security)가 압도적으로 중요해진다. 화물선주가 맡긴 물건이 파괴되면 항구도 같이 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중립이다. 러시아도 미국도 중국도 싱가포르 앞 해협을 맘 놓고 지나가야 세계평화가 이뤄진다.

그런데 홍콩은 좀 다르다. 홍콩이 홍콩인 이유는 이른바 글로벌 자본시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홍콩의 자본시장의 원주인은 영국, 미국 자본이었다. 자본시장은 자유로운 정보유통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서구사회가 정보왜곡을 가장 혐오하는 이유도 사실은 자본시장 논리 때문이다. 구글 검색을 못하는 땅에서 투자시장을 열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그리하여 홍콩은 영국 수준의 언론 자유를 오래 전부터 누릴 수 있었다.

1980년대까지 손톱만한 크기의 홍콩의 GDP는 중국 대륙의 40%를 넘나들었다. 사실 홍콩이라는 여의주가 없었다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이렇게 빨리 성공했을 리도 없다. 홍콩은 자신이 가진 압도적인 자본시장, 외환시장, 채권시장을 통해 지난 30년간 중국의 젖과 꿀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토사구팽이라고, 홍콩의 자유민주체제가 부유해진 베이징 정부의 눈엣 가시가 된 것. 그래서 근래 홍콩 자본들이 자유를 찾아 여러 동남아 도시들로 이전하기도 했고, 홍콩을 대신할 아시아의 국제도시 후보들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아주 멀치감치 떨어진 싱가포르도 홍콩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과연 싱가포르가 홍콩을 대신하는 상황이 오게 될까?

---2019년 말 홍콩시위대의 최후의 보루가 됐던 홍콩 이공대 정문 모습. 홍콩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시위대를 옹호했다.

5. 아시아 국제도시의 조건

혹자는 싱가포르의 집세와 차량 및 물가가 너무 비싸다고 혹평을 하기도 한다. 이건 홍콩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농업과 제조업 기반의 영토국가가 아닌 좁은 항구도시이기 때문이다. 이런 국제도시는 외국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일종의 조세회피지역의 역할도 일부 수행하기 때문에 자본세와 소득세 법인세 등이 일반 국가에 비해 혁신적으로 낮출 수 있다.

이렇게 소득세를 낮췄으니, 싱가포르 정부는 다른 방식으로 세금을 뜯어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외국인은 월세 500만 원의 집세를 내고 1억 원짜리 렌터카를 타게 되는 식이다. 평범한 밥값에도 텐텐 세금이 붙기 마련이다. 외국 자본이 충분히 벌었으니 일부는 토해내라는 거다. 때문에 싱가포르와 서울과의 직접 물가비교는 상당히 틀린 발상이다.

싱가포르는 사회 시스템이 안정적이고 변호사 회계사 등의 전문인력 충원도 원활하지만 증권시장은 사실 턱없이 약하다. 미디어를 전공한 내 관점에서 싱가포르는 자본시장이 발전하기 힘든 사회다. 자본시장은 결국 루머와 오보를 어떻게 스스로 걸러내는지(자정작용)에 달렸기 때문이다. 즉, 금융시장에는 뛰어난 미디어 시장이 함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싱가포르는 안보에 신경써야 하는 사회 특성상 미디어 시장이 턱없이 약하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홍콩을 대신할 중국의 도시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싱가포르도 힘들다면, 중국은 더더욱 힘들다. 그야말로 홍콩은 아시아에서 대체가 불가능한 엄청나게 소중한 자원인 셈이다. 사실 홍콩에 대한 탄압은 미중무역갈등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 있다. 중국에게 홍콩은 껄끄럽지만 대체불가능한 파트너라는 생각에서다.

사실 한국의 서울도 홍콩에 버금가는 국제도시가 될 잠재력이 있다. 하지만 필자 역시도 일부 도시국가에게만 허용되는 외국자본에 대한 무제한적 자유를 한국은 허용하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우리야 우리 나름의 생존 모델을 개발해야 할것이다.

최근 싱가포르인들도 아주 참담한 심정으로 홍콩사태를 지켜보았고, 반중감정이라고 표현하긴 좀 그렇고, 중국경계 심리가 살짝 높아졌던 것도 사실이다. 싱가포르의 화두는 실용주의다. 절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꼽만치도 각을 세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바로 싱가포르 외교의 절대 노선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외교가의 오랜 격언으로 "싱가포르 앞바다서 전쟁이 일어나게 하지 마라"가 있다. 언제나 그 길을 찾을 것이다. (끝)

우산 시위 중인 홍콩 이공대 2019년 12월 모습 (촬영:root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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