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년 9월 16일
● 9월 14일 밤 취임한 '타르만 신임 대통령'.....70% 압도적 득표율
● 전통적인 '상징적 지도자' 역할을 넘어서는 실질적 지도자 가능성 높인 '압승'
● 중도적, 서민 지향 정치인....싱가폴스러운 가족 구성까지, 상징성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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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 정치'에 관심 가진 사람이 있을리 없지만, 2023년 9월 1일 끝난 대통령 선거에 대해 그 의미를 짚어 본다. 6년 임기의 신임 대통령으로 '타르만 산무가랏남'이 그날 선거로 선출되었고 14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가장 특징적인 대목은 70%라는 압도적 득표율이다. 전례가 없는 득표율이기에 집권여당(PAP)의 흥분이 방송전파를 타고 한국까지 전해질 정도다.
싱가폴에 "정치"라는 게 있을까 싶지만, 아시아 어느 사회나 그렇듯 꽤나 치열한 보-혁 대결이 있었던 동네다. 1990년대 이전엔 주로 '인종'과 '이념'에 관계된 일이었고, 2000년대 들어선 이후엔 "성장 전략"에 대한 반박과 "약자 보호" "세습 체제"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진행되었다.싱가폴 국내에서 1990-2000년대초 출간된 서적을 훑어볼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예상과 달리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 적지 않았다. 이 나라도 은근히 리콴유와 집권여당(인민행동당)을 비판하는 정치 서적이 다수 출간되었던 것이다. 열악한 출판 시장임에도 반골 기질을 가진 지식인들이 꽤나 많았던 것이다. 헌 책 무더기 속에서 "진보주의" 흔적을 발굴하는 재미는 상당했다.
1. 왜 비판할까?
리콴유가 만든 인민행동당(PAP)은 1960년대 이래로 싱가폴 의회 의석의 90% 이상을 점유한 압도적 집권 여당이다.리콴유(1923년생) - 고촉동(1941) - 리센룽(1952)으로 이어진 단 세명의 총리 계보만으로 남양南洋의 가난한 소국을 세계적 경제 강국에 올린, "기적의 국가"가 되었다. 국민소득 증가율이 깜짝 놀랄 수준인데, 2021년에는 7만 2천 US $, 2022년엔 8만 2천 $, 2023년엔 9만 달러에 도전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엔 1년 마다 1만 달러씩 뛰는 셈이니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진다.
한 마디로 1인당 평균소득이 1억 1천만 원이라는 얘긴데.... 1인당 GDP는 보통은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과 엇비슷하다. 그런데 싱가폴의 경우 초봉이 1억에 근접하는가, 라고 생각해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여기도 한국과 엇비슷한 4-5천만원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라가 부자인 것도 맞고, 대기업이 특히 부자인 것은 맞지만, 중산층과 서민층은 생각만큼 부자일리 없다. 부의 편중이 극심하다는 얘기다. 국가의 보호를 받는 금융자산과 부동산 소득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에 연동되는 고위공직자와 국영기업 소득도 높다.
이 문제를 싱가폴 야당은 오래 전부터 지적해 왔다. 싱가폴이 부자가 된 이유는 수백여 가지가 넘지만, 자본이 부족하던 초기 아세안의 "검은 돈"이 집결하는, 즉 아시아의 스위스 은행 포지션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아랍와 아세안의 검은 돈은 물론 최근엔 홍콩과 중국 자본까지 집결하며 GDP가 폭증한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집권당은 정권을 놓고 싶지 않고, 야당은 '투명성'과 '보통국가론'을 주장하며 정권의 은밀한 뒷거래에 비판을 해왔다. 정치금지를 당한 야당 정치인의 상당수는 "싱가폴 권력-해외자본 유착"을 폭로했던 사람들이다.
2. 인도계? 실론계?
필자는 싱가폴 서북쪽 주롱 Jurong 지역에서 2년 반 정도를 살았다. 주말마다 주롱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곤 했는데, 지역 국회의원 가운데 "타르만 샨무가랏남 (Tharman, 1957년생)" 이란 분이 있었다. 얼굴이 딱 봐도 인도 타밀계였다. 그런데 정확히 "실론계"라고 한다.
싱가폴 서쪽 지역은 서울로 따지만 "강북 노도강" 지역과 비견된다. 서민들의 집인, 우리의 주공 아파트격인 HDB가 빼곡하게 들어섰기 때문이다. 당연히 부자들은 전통적 핵심 지역에 살거나 공항에 가까운 곳에 살고, 중산층과 서민은 서쪽 지역에 사는데, 인종적으로는 가난한 인도계와 말레이계가 집중 거주하는 셈이다. 주말에 주롱역에 가면 인도계 이민자들이 잔뜩 모여서 함께 전통 요리를 해먹고 크리켓을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정치인 "타르만"의 인기가 주롱 지역에서 장난이 아니게 높아 놀랬던 적이 많다. 외국인 입장에서 현지 정치인의 인기가 느껴지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가 "인도계"라서 같은 인도계로부터 인기가 높은게 아닌가, 라고 의심했는데, 주위 평판을 들어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이 분이 한때는 "리센룽 현 총리"의 대안이 될뻔한 큰 인물이라고 칭찬이 자자한 것이다. 그런데 운이 나쁜건지 1952년생 리센룽과 불과 5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자연스레 낀 세대가 되어 큰 자리를 맡지 못했다는 해설이었다. 그보다는 친서민적 행보와 발언도 그의 인기와 총리직 실패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
3. 서민적, 화합형
물론 타르만은 경제 관료로 이미 40대에 빛나는 성과를 다수 거뒀고, 50대에는 국회의원으로 권력의 핵심부에서 멀리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9년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 리센룽 후임 경쟁의 승리자는 "헹스위낏" 부총리(1962년생)가 차지했고, 타르만은 쓸쓸하게 은퇴를 목전에 두게 된 것이다. 당연히 총리는 중국계의 몫이었다. 그런데 2020년 선거를 망친 헹스위낏이 밀려나고, 타르만이 2023년 싱가폴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라면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싱가폴에서 "대통령"이란 자리는 군사권이나 외교권을 장악한 직위가 아니라 과거엔 초라하기 그지 없지만, 그럼에도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최고위 공무원이라는 상징성에서 그 중요성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싱가폴 여당은 그동안 인기 높은 대중정치인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리콴유-리센룽이라는 확고한 오너 그룹이 있는데, CEO 인기가 너무 높아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타르만은 서민들에게 지나치게 인기가 많은 게 오히려 약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점이 이제는 대통령 역할을 하는데 좋은 조건이 된 것이다.
한때 차세대로 인정받은 헹스위낏(Heng Swee Keat) 부총리는 이력도 좋고, 같은 화교 출신이기 때문에 권력의 엄청난 후원을 받았지만, 결정적으로 대중이 선호할만한 외모나 언변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그가 하면 차갑고 냉소적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타르만 산무가랏남"이 말하면 따스하고 "품격있는 말"이 되어 버린다. 그의 인기의 배경은 인종과 직업을 뛰어 넘는 뭔가 특별한 대목이 있는 것이다.
4. 싱가포리언 가족
타르만은 '실론-타밀" 이주 3세대로 불리곤 한다. 실론은 오늘날의 스리랑카를 말한다. 영국 식민지 시절 실론섬의 타밀족들이 상당수 싱가포르로 들어와 일했다. 양 지역은 해로로 직접 연결되었기 때문에 영국인 입장에선 실론섬을 먼저 개발했고, 그 다음 말레이시아의 여러 후보지 가운데 싱가폴을 택한 것이다. 자연스레 타밀족이 이주해 오늘날에도 싱가폴 인구의 7-8%를 차지하고 있다.타르만이 더 흥미로운 지점은 아내가 일본계라는 점이다. 유미코 여사와는 영국 유학시절에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유미코 여사는 어릴적 일본에 살았는데, 이후 싱가폴에 살면서 싱가포리언이 되었다. 이름과 문화 배경은 일본이지만, 중국계 혈통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스리랑카 조상을 둔 싱가폴인과 일본 혈통이 만나 새로운 싱가포르 가족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타르만에게 "싱가포르"라는 것은 아주 소중하면서도 거의 유일한 "인종적 접착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인구의 대다수르 차지한 싱가폴 정치인들의 발언은 꽤나 고압적이기도 하고, 언제나 정답만 말하는 공무원 티가 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경제는 성장하고, 나라는 부강해졌으며, 정권이 바뀔 염려는 없다. 그래서 그런지, 실론계 타르만의 "말의 품격"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그의 단어 활용은 "통합"과 "화해" 그리고 "미래"를 언제나 잊지 않는다. 중후한 목소리의 후광 효과와 더불어 그의 국제적 가족 구성까지 "싱가폴적 특색" 덕분에 더욱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5. 정치 갈등, 인종 통합
과거엔 타르만이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압도적 중국계와 전통적 말레이계에 밀린 인도계 소수민족 출신이고, 나이도 애매하게 많 았고, 서민적 취향이었기에 집권층으로부터 뚜렷한 신임을 얻고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싱가폴의 위상이 급속하게 커진 것이다. 세계의 기대감이 커졌고 동시에 주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도 높아진 것이다. 과거 싱가포르 대통령은 적당히 인종을 고려한 정치적 배분에 따른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2011년 선거에서 '탄쳉복'이라는 진보적 어르신이 무려 34%의 득표율로 35%의 여당이 민 후보자를 아슬아슬하게 위협하자, 집권당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이로 인해 선거에 자신감을 상실한 여당 PAP는 2017년 대선에선 아예 선거 자체를 없애버리기도 했다. 당시는 리센룽 세습 체제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을 때였다.
결과적으로, 싱가폴 정치는 '타르만(따만)'의 전격적인 등장으로 숨통을 트인 모양새다. 싱가폴이 영원이 성장만 할 수는 없기에, 대중정치인 타르만이 어느 정도 중산층과 서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마도 그러면서 "싱가폴 정체성" 확립에 기여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의 능력에 따라 리센룽 체제 그 이후에도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PS.
- 타르만의 압도적 승리는, 싱가폴 진보 세력에게는 일종의 패배감을 줄 수도 있는 사안임. 그런데, 이번엔 "타르만"이란 인물의 매력도가 워낙 높았다는 게 중론. 그래서 별로 서운하지 않다는 얘기도...최초의 인종 통합형 대통령이기도.
- 진보진영의 어른 탕쳉복과 단체들은, 탄 킨 리엔(Tan Kin Lian 1948년생)을 지지했음. 득표율이 너무 낮게 나왔음. 70%라는 압도적 득표율은 향후 타르만의 정치적
- 싱가포르는 "선거"를 치룬다는 것 자체가 부담인 나라임. 경제 성장률이 높으면 PAP가 승리한다는 것이 일종의 "법칙"이 되어가고 있음. 그나저나 gdp 성장률이 너무 높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