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호찌민, 훨씬 깊은 한반도와의 인연


O 29살 호찌민과 39살 김규식,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다
O 김일성의 호찌민에 대한 컴플렉스, 차가워진 북과 비엣의 관계
O '호찌민'이라는 거대한 산, 한반도와 맺은 깊은 관계 널리 알려져야

글 | 정 호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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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엣남에 왔더니, 어릴 적 소련 국기에서 봤던 적색 배경 위 "낫과 망치" 그림이 너무 자주 보여 놀랍다. 필자가 '남한' 출신이라는 게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아직도 붉은 공산당 기만 보면 온몸에 살짝 냉기가 서린다. 저건, 이적 표현물 아니던가? 간첩 신고는 111...

필자가 예전에 "미얀마와 북한"의 관계를 설명했던 적이 있다. 같은 사회주의 '군부'체제였던 양국은, 국가의 지정학적 성격상 완벽에 가까운 "상호 보완적complementary" 관계였다. 만일, 북한과 미얀마가 '아웅산 묘지 테러' 없이, 협력적 관계를 유지했다면, 동아시아 역사가 바뀌었을 가능성까지 있었다.

북한과 제3세계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는 비교적 좋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게 '비엣남' 관계일 것이다. 얼핏보면 엄청 닮아있고 친해 보이지만, 사실 두 나라는 전생에 부부라도 했었는지, 완벽한 상극에 가까운 경쟁적competitive 관계였다. 그리고, 비엣남은 지속해서 북한에 100%에 가까운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북한이 너무도 비엣남을 질시(?)한 나머지, 상당기간의 "냉전"을 치렀다는 평가도 받았다.

1. 김규식 따른 호찌민

비엣남의 국부인 호찌민(1890~1969)의 삶은 너무 드라마틱해서, 겨우 80년을 살아간 인간의 삶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대략 전세계를 떠돌며 독립투쟁을 한 것이다.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불란서에서 요리사로 위장한 혁명가로, 소비에트에서 코민테른에 참가하고, 중국에선 감옥 생활을 하고, 태국에선 신문을 발행하고, 홍콩에서 공산당을 창당하는 식이다. 그 사이에 미국, 벨기에, 영국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다이나믹하게 산 사람들이 많다. 여운형(1886~1948) 선생 정도가 호찌민과 비교될 수 있을지 모른다. 몽양 선생의 독립운동 역시 국제적이었고 적지의 한 가운데서까지 이뤄졌다. 역시 모스크바에서 레닌도 만나고, 모택동도 만나고, 싱가폴을 돌아서, 상하이에서 아시아의 혁명가들과 사상적 교류를 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호찌민에게 강한 사상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김규식 선생(1880~1950) 이다. 1919년 파리에서 만난 그들은 9살 위인 김규식이 사실상 스승 노릇을 했고, 3살 위인 조소앙이 형 노릇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거주 시절부터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자주 접한 호찌민은 1919년 파리강화조약 참가 이후 김규식을 비롯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의 비타협 투쟁이 강한 영감을 받고, 반제국주의 투쟁 노선을 정하게 된다. 1919년은 한국의 "3.1 운동"이 발발한 시점이다. 당시 그 사건이 비엣남의 청년 호찌민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곁엔, 그 사건의 중요성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김규식이 있었다.

호찌민과 김규식, 1919년 파리에서 처음 만나 1945년까지도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1964년 비엣남을 방문해 호찌민을 만난 김일성. 1958년에 이어 두 차례나 방문했다.

2. 우사尤史 김규식  

한국의 해방 정국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 '우사' 선생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역사교육이 잘못된 건지, 필자만 해도 우사란 존재를 접한건 30대 후반이 다 되어서다. 김규식-여운형-김구-송진우-이승만의 구도를 겨우 이해하게 된 것이다.

교과서엔 한국의 독립에 있어 "외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고, 보통은 우남 이승만을 집중 조명하기 마련인데, 실제로 임정에서 외교는 김규식과 여운형 선생의 역할이 훨씬 컸다. 김규식은 그의 탁월한 어학실력과 민족의식으로 임정 외교사를 주도적으로 써내려간 인물인데, 해방정국에서도 좌우통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에, 몽양 암살 이후 미군정으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이끌어 냈다. 그런 그가 젊은 시절 호찌민에게까지 큰 영향을 준 것은, 우리가 아시아 현대사를 기록할 때 반드시 "방점"을 찍어야 한다.

문제는, 김규식 같은 역전의 용사들이 남북한의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1950년 이후 아무런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북한엔, 자연스레 스탈린의 지지를 받은 김일성만 남게 되었고, 베트남의 호찌민에겐 조선과의 특별한 인연과 부채감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관계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3. 북비엣 vs 북한

조선의 청년들과 오래 교류한 당연히 호찌민은 북조선에 특별한 애정이 있었고, 북한 역시도 북비엣남은 동아시에서 가장 큰 동질성을 지닌 끈끈한 이념적 동맹국이었다. 1960년대말까지 지속된 이러한 관계는 이후 완벽한 갈등관계로 변질이 되는 데, 그 배경엔 호찌민이 제3세계 반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영웅"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

김일성 역시도 호찌민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글로벌 위상을 갖고 싶었지만, 결국엔 아무런 성과도 없이 평범한 독재자로 늙어 버리고 만다. 반면 호찌민은 숭고한 민족적 이상을 위해 싸웠고, 1969년 그가 사망할 무렵엔 민족의 위인을 넘어 세계적 위상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1969년 이후 1994년 죽기 직전까지 김일성은 호찌민이란 유령과 싸운 것일 수 있다.

1960년대 미국과의 전쟁 와중, 호찌민은 다양한 협상전략을 동반했는데, 이같은 대화노력은 북한에겐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그러니까, 미군이 비엣남 전선에 남아있는게, 북한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월맹에 비행기 조종사까지 파병하며 사실상의 참전을 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지정학적으로 상반된 이해관계는, 1970년대 북비엣남의 승리에 이은 중국과의 국경분쟁, 나아가 비엣남의 캄보디아 개입으로 완전하게 갈라서는 계기가 된다.  

당시 캄보디아는 북한의 형제국가였다. 김일성은 비엣남 대신 캄보디아를 택한 셈이다. 때문에 북한은 비엣남을 "공산주의 이상을 버리고 지역맹주를 추구하는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친중 노선을 확정했고, 비엣남은 북한을 가리켜 "그저 우리를 질시하는 거 아니냐"라고 팩폭하며 반중친소 노선을 확립한 것이다. 이 갈등은 이후 무역과 쌀거래 등으로도 이어지는데, 한 번은 북한이 비엣남 쌀을 수입하고 대금을 지금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뤄왔는데, 이를 빌미로 1990년대 말 북한이 기아로 가장 절박했을 때, 북한의 쌀 긴급지원 요청을 비엣남이 차갑게 거절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북한이 이 사건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했다.

4. 호찌민과 김일성

호찌민은 새삼 그의 이력을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위대한 인물이다. 예전엔 아시아 해방의 위인을 거론할 때, 호찌민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도 거론되었지만, 1990년대 이후엔 결국 호찌민만이 제3세계 ‘자주노선’의 대표성을 지니게 되었다.

김일성 입장에선, 호찌민은 거대한 산과 같았을 것이다. 호찌민은 김일성이 갖지 못한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이룬 인물이고, 심지어 그의 사후 후계자들이 남비엣을 빠르게 해방시킴으로써 오랜시간 인류의 숙제인 아시아-아프리카 민족주의를 완성시켰다. 북한에게 "질투"라는 공격이, 사실은 너무도 적확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주체 사상은 몰락하고 호찌민의 ‘반제’ ‘자주’ ‘통일’ 사상은 역사에 남은 것이니 말이다.

만일 김규식이나 여운형이 만일 북조선 혹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아마도 전혀 다른 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완전히 다른 아시아 역사가 펼쳐졌을 가능성이 컸다.  아시아 민족해방운동과 전혀 무관했던 김일성이 여러 선배들을 제치고 정권을 잡았고, 이후 "주체"라는 폐쇄적인 사상을 들고 온 것 역시 어찌보면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결과적으로 아시아와 한반도 민중에게는 안타까운 현실이 펼쳐졌다.

5. 비엣남 밝은 미래

우리가 비엣남의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는, 당연히 공산주의 이념의 우위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은 아니다. 호찌민이 보여준 비전과 그 비전을 믿고 따른 국민통합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비엣남은 여타 제3세계 국가들과는 달리, 외세를 배격하고 완벽에 가깝게 독립된 정부를 꾸렸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개혁과 개방정책을 펼쳐왔다. 민족자결권을 제국들로부터 자신의 힘으로 돌려 받은 건, 비엣남이 전세계 최초다. 이를 근거로 경제발전에 나선 것 역시 기념비적이다. 아직도 내전을 벌이는 여러 3세계 국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조건 위에 서 있는 것이다.

1980년대가 아닌, 무려 2022년에도 북한이 비엣남 모델을 택해야 한다는 얘기는, 김일성의 손자인 김정은에게도 상당히 수치스러운 일이 될 지 모른다. 그러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비엣남 모델 이외에는 북한에 적합한 더 나은 모델은 없어 보인다. 북한은 결국 비엣남과의 관계를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 2019년 북-미 하노이 회담이 실패했다지만, 그래도 지속적으로 북한은 비엣남을 찾아야 한다.

PS.

1. 김규식이란 거대한 인물의 역사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제대로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음. 호찌민이라는 세계적이 위인이 가장 따르고 배운 아시아 인물이 김규식 선생이었다.

2. 스탈인의 지지만을 받은 김일성이 북조선의 지도자가 된 것이, 북한 쇠퇴의 근본적이 원인일 지도. 만일 38선이 이북에 서울이 포함이 되었다면, 당연히 김일성이 아닌 더 국제적인 인물이 나섰을 것임.

3. 1945년 일제가 패망을 하자, 윈난성에 있던 호찌민이 상하이에 가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조선의 여러 독립운동가에게 축하인사를 전했다고. 호찌민과 한국이 단지 "비엣남 전쟁"의 악연만 있는 것은 아님. 더 깊은 관계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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