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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책을 다시 읽던 도중 흥미로운 사건이 있어 기록 차원에서 정리했다. 버마는 1962년 이후 독재자 네윈 장군이 집권하는데, 그는1988년 국민의 저항에 의해 하야하게 된다. 네윈 장군의 전성기인 1976년 무렵 젊은 장교들 중심으로 그를 몰아내려는 쿠데타 논의가 은밀하게 진행된 적이 있다. 원래 군부라는 게 그렇다지만, 이미 혁명의 신선한 의욕은 사라지고 독재와 권력 독점의 길로 접어든 시점이었다.쿠데타 모의는 당시 시대적 배경 때문에 무산된다.
1975년 무렵엔 공산당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인데, 미국은 미얀마 군부를 지원해 산악지대 공산당 빨치산과 복잡한 전쟁을 수행 중이었다. 네윈 군부를 내칠 이유가 별로 없었다. 1975년 네윈 군부는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지는데, 온건파 중심에 섰던 인물이 바로 "띤 우(Tin OO 1927~ ) 장군이고, 이번 스토리의 안타까운 주인공이다.1970년대 들어 버마 민중은 군부의 독재에 대해 서서히 불만의 수위를 높여갔다.
그러다 1974년 UN 사무총장을 역임한 우 딴트(U Thant)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세계적 영웅이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따른 실망감에 더해, 그의 시신이 고국에 당도하자 대학생들이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대규모 반군부 시위에 나선다. 백수 십명이 군경의 총칼에 사망할 정도의 날카로운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졌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소장파는 군부 개혁과 쿠데타 논의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시민들이 대안으로 주목한 인물이 바로 "띤우" 총사령관 겸 국방부장관이었다.
- 미묘한 정국, 탄핵
당연히 군부의 정보기관인 "보안사"에 비상이 걸렸다. 네윈 장군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온건파 장군인 띤우의 이름을 연호하는 현상이 포착이 된 것이다. 젊은 엘리트 장군인 띤우는 "군대는 시민 편에 서야 한다"는 온건파 엘리트. 이러한 태도는 군부 입장에선, 무척이나 위협적이며, 동시에 네윈 체제를 뒤흔드는 심각한 일이었다. 그래서 군 수뇌부는 '띤우'를 제거하기로 맘먹는다.
문제는 온건파 띤우가 오랜기간 네윈의 총애를 받아 온 현직 서열 2위의 실력파 장군이라는 사실이었다(당시 나이 48). 1975년 당시 그는 전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과 심지어 국방부 장관을 겸직하고 있었고, 당연히 후배 군인들은 네윈의 뒤를 잇는 차기 지도자 감으로 그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군부의 현역 2인자인 4성 장군을 무력이나 위협으로 굴복시킬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당시 군 정보국과 강경파 정치인의 대표격인 산유(San yu, 1918~1996) 등은 기가막힌 꾀를 하나 내는데, 바로 가족에게 "비리" 혐의를 덮어 씌우는 일이었다.
1975년 여름, 띤우의 아내가 검찰로 부터 갑작스러운 기소를 당하게 된다. 띤우 아내의 부패 혐의는 당시 그야말로 엄청난 스캔들로 비화된다. 군사 정권의 실질적 2인자의 아내가 부패 혐의로 기소를 당하다니, 그것도 비리 혐의였다. 도대체 어떤 범죄였을까?
2. 가족 공격
그러니까 띤우의 아내가 '공짜선물', 즉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 기소의 핵심 내용. 당시 띤우 집안은 그의 저택을 새로이 건축하게 되었는데, 그가 사용한 건축물 자재에 태국에서 온 고가의 '힌지(hinge)', 경첩이 포함이 되었다는 혐의였다. 문제는 이것을 그의 아내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사실상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르바 당시 값비싼 수입품 뇌물 비리 사건이었던 셈이다.
문짝에 쓰이는 경첩(hinge)따위가 얼마나 고가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버마는 목재 생산엔 강하지만, 그 이외 장식품을 수입을 할 수도 있기에 1970년대엔 커다란 스캔들로 비화한 것이리라. 훗날 알려진 일이지만, 여러 건축 자재가 집으로 도착을 하는 와중에 주문하지도 않은 물건이 '슬쩍' 끼워져 배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의 아내가 배달된 물건에 대해 값을 지불을 하려고 했지만, 배달자는 "이미 돈을 받았다"라며 완강하게 물건을 놓고 갔다는 얘기다. 물론 그 물건을 보낸 사람은 정보사령부, 군 관계자였다. 없는 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새로이 집을 짓는 와중에 아내의 기소를 접한 띤우는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가 건축자재로 도착한 경첩이 단순한 배달 사고인지, 아니면 의도된 셋업범죄인지, 그가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군부가 출범한 지 15년도 채 안되었던 때라, 언론과 국가 기능이 살아 있었는지, 총사령관 띤우의 "부패" 문제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며 그의 거취를 압박하게 된다.
3. 사임, 구속, 야당 변신
장관 아내의 뇌물 사건은 직접적인 타격이 되었다. 결국 띤우는 1976년 3월 국방부 장관직에서 강제로 물러나면서, 아무런 직책도 없이 일종의 백의종군하게 된다. 그러자 네윈을 둘러싼 군부 강경파는 그에게 1975년 쿠데타의 책임을 몰아 붙이는 작업을 이어가고, 결국 그는 1976년 "반역죄"로 7년형을 언도 받고 영어의 몸이 되어버린다. 버마 국민들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차세대 엘리트 정치인이 순식간에 반역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작업의 배후에는 독재자 "네윈 대통령"이 있다는 설과 군부의 강경파 배후론이 대립해 왔지만, 결과적으로 군부에서 온건파가 완전하게 제거되고 "네윈 충성파"가 득세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1988년 전국민적 시위가 벌어지기 전까지, 미얀마 정치와 경제 시스템이 완전히 박살이 나게 된다.
한동안 정치 현장에서 물러난 띤우는 1988년 3월 시위 물결이 전국을 휘감게되자 강제로 국민들에게 소환당한다. 아웅지-띤우는 당시 버마 엘리트 시스템이 배출할 수 있는 최고의 차세대 대통령 후보였다. 실제로 1988년 7월 네윈이 사임을 발표한다. 당시 상당수의 시민들은 띤우를 차기 대통령으로 연호하기도 했다. 그런데 1988년 4월 영국에서 날아온 40대 초반 여성이 정국의 판을 뒤흔들고 만다. 아웅산 수찌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4. NLD, 수찌, 아쉬움
1988년 7월 네윈이 사임을 발표하고, 8월 8일 전국적 봉기가 최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9월에 이르러서야 전국 단위의 반군부 민주정당이 만들어 진다. 지금은 NLD라고 부르는 민족민주연합이라는 연합 정당이다. 이 정당의 설립자가 바로 바로 1918년생 아웅지와 1927년생 띤우 장군이었다. 1945년생 아웅산 수찌는 정치 경험이 전무하고 고향에 지지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사무총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30년 가까이 집권한 군부에 대해 저항을 선택한 버마 시민사회는 1988년 7월 사실상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권을 인수 받을 준비가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이유가 있다. 1975년 온건파가 패배하며 시민 사회를 강력하게 통제한 탓이 크다. 학생들은 너무 급진적이었고, 띤우와 전직 군부 엘리트들은 선뜻 정권을 인수할 욕심을 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 사이에 "아웅산 수찌"라는 걸출한 여걸이 폭발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결국 정궈을 인수할 정당이 만들어 지는 데 두 달 넘게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패닉에 빠졌던 군부는 전열을 정비해 대대적으로 시민을 탄압할 수 있었고, 그 사이에 약 3천~5천명이 거리에서 사망하며 사실상 1988년 8월 혁명은 미완으로 끝나고 만다.이후 "띤우" 장군은 NLD를 비교적 무난하게 이끌었지만, 국민들의 눈길은 가택연금을 당한 초대 대통령 딸인 "아웅산 수찌"에게 향하고 만다. 띤우는 지금도 살아 있으며 조만간 100세를 맞이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의 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듯 싶다. 거의 유일하게 미얀마 군부에서 2인자를 해보았고, 다시 아웅산 수찌 아래에서 20년 가까이 2인자를 한 인물로 기억될 전망이다.
PS.
1. 유능하고, 젊고, 실력 있는 정치인을 공격하는 방법은 "가족과 아내"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음. 굉장히 고전적인 방법이라는 게 핵심임.
2. 아시아의 "부패" 혐의는 대개 선택적으로 적용 됨. 이른바 '셋업Set up' 범죄의 일종일 수 있음. 국가엘리트 역시 사익과 감정을 앞세운 어둠의 정치를 하기 때문임. 한국에서도 왕왕 벌어지는 일임.
3. 띤 우Tin OO, 라는 인물에 대한 아쉬움. 나라를 더 사랑했다면, 본인이 권력욕을 더 부렸어야 함. 두 번의 기회를 다 걷어 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