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응오딘지엠, 좌절된 개혁과 이유

O 한때 호찌민이 존경했던 남비엣의 최고지도자는 왜 실패했나?
O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던 고딘디엠이 꿈꾼 정치개혁
O 천주교를 기반으로, 유교적인 사회개혁을 시도한 풍운아

글 | 정 호 재

작성일 | 2022년 7월


0.

사이공의 풍경은 여러 모로 신기하다. 자유분방함과 질서가 공존해 있다. 그 가운데 국가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문자를 읽을 지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 국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개인의 자율성이 도드라진 사회로 보인다. 분명 감시와 부패가 심하다고는 하지만, 경찰과 공안은 숨어 있는 것처럼, 때론 하노이 정부가 남쪽 사이공을 방치한 것처럼 느껴진다.

지리적으로 사이공은 도시출발 직후부터 이 지역 최고의 부자 도시였다. 캄보디아 소속이던 17세기 이전은 물론이고 1862년 프랑스 식민도시로 재출발할 무렵, 코친차이나를 거쳐 남비엣남 공화국 그리고 1975년 통일 이전까지는 물론이고, 개방 이후에도 평균 소득이 하노이의 두 배를 웃돌았다. 사이공이 이처럼 거대 독자 경제권을 꾸리고, 국가경제를 이끈 배경엔 이 도시는 남쪽의 수도 특히 '비엣남 공화국(남비엣)'의 수도였던 이유가 커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남비엣의 지도자를 교과서에서 "고딘디엠(1901-1963)"으로 배웠다. 비엣남에서 호찌민 다음으로 암기한 주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Ngo Dinh Diem 응오딘"지"엠으로 바꿔 부른다. D가 Z로 발음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한자이름은 오정염(吳廷琰). 응오를 이젠 "고"자로 부르는 사람은 사라졌다.

1. 종교 갈등?

우리는 남비엣남의 몰락을 주로 "부패"와 "무능"으로 배워서, 그냥 하나의 공식으로 외우고 교훈으로 삼는다. 청나라가 망한 요인은 '부패', 남비엣이 망한 요인도 '부패'. 결국 이를 극복해야 나라가 산다는 서사구조다. 그러나 남비엣의 몰락 배경은 부패 이외도 차고 넘친다. 한국에서 가장 언급이 안되는 게 '종교갈등'이다.

동아시아에서 '종교' 갈등은 이 분야의 탑인 중동 탓인지 간과되기 쉽다. 당연히 '종교' 역시 정치의 크리티컬한 영역이다. 그리고 실패한 국가는 대개 소수와 다수간 종교 균형을 맞추지 못한 경우였다. 1950년대 버마의 우누(U Nu) 정권이 불교를 국교화하려다, 기독교 기반의 소수민족의 반발에 무너진 게 대표적이다. 응오딘지엠은 "카톨릭" 정신에 빠져, 불교도 및 토착종교의 반발에 무너진 사례가 된다.

비엣남의 지리는 한 눈에도 엄청난 해안선 길이(3260km)가 특징이다. 해양 지향적인 나라인 것이다. 해상활동이 왕성했던 남중국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치인 탓에, 17세기 본격화된 제국주의 범선들의 상륙이 잦았다. 당연히 포르투칼부터 화란을 거쳐 프랑스까지 자국의 신부님들을 모시고 이 땅을 찾았고, 어마어마한 종교 전쟁을 치러냈다. 비엣남의 카톨릭 역사가 길고, 자연스레 프랑스 카톨릭 인구가 만만치 않은 배경이 된다.

남비엣남은 1975년 4월 30일 수도 사이공이 점령당하며 그 수명을 다 했다.

2. 유교와 만난 천주교

응오딘지엠의 아버지는 베트남 왕조 최고의 관리고, 게다가 프랑스 시스템에서 자란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다. 자신은 아예 말레이 카톨릭 학교에서 공부했고, 9명의 자녀를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길러냈다. 그 자식 중 1명은 비엣남 '추기경'까지 했을 정도다. 파리로 유학을 보낸 자식도 있는데, 그중 가장 똑똑한 지엠은 하노이 제국대학을 나와 20대 초반에 관리로 커리어를 시작해, 이미 40대 초반에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까지 섭렵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집안은 중국의 유교를 베이스로 삼은 민족주의 성향도 있었고, 당대 최고 선진국이 전파한 프랑스 천주교에 깊은 감화를 받은, 무척이나 독특한 정치철학을 갖게 된다. 이후 이 천주교란 배경은 1950년대 그가 서구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특히 미국 정치권을 설득할 때 결정적 역할을 하고, 아예 나라의 정치이념으로까지 삼아버린다.

그런데, 우리도 이승만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런 행태가 그렇게 엄청나게 특수한 건 아니었다. 우리도 20세기 초반에 기독교를 베이스로 삼은 지도자들이 적지 않았고, 아예 미국에서 활약한 이승만 같은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엣남은 프랑스가 당대 '대부patron'이었기 때문에 카톨릭이 당연했던 것이고, 이념의 극단적 충돌 속에서 남비엣남은 조금은 순수하게 “서구 종교”를 택했던 것 뿐이다.

3. 엠마뉴얼 무니에Mounier의 3지대론

응오딘지엠은 5명의 남자형제를 두었는데, 실제로 온 집안이 "집권"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두가 지엠의 정치를 후원했고, 집권 이후 실제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남동생 뉴Nhu의 역할이 지대했다. 프랑스 정통(?) 유학파로 그는 지엠을 위한 정당까지 만들어 가며 사실상의 친위대장으로 나섰고, 그의 아내는 독신인 지엠을 위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에 나선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응오씨 집안이 내세운 정치철학이다. 이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제 3지대 이론 "인격주의Personalism"을 기치로 대중 설득에 나선 것이다. 이 인격주의를 주장한 무니에(1901~1950)는 프랑스 카톨릭을 기반으로 '반 자본주의와 반 공산주의' 기치로 "소박하지만 신실한 공동체주의"를 꿈꾸었던 사상가다. 1930년 대공황을 떠올리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자본이 득세한 자유주의 대신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종교와 개인의 인격에 기댄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문제는 무니에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자연스럽게 비씨정부 프랑스 밑으로 들어가 히틀러의 파시즘을 간접 지지해 버리는 병크를 떠뜨린 데 있다.

유교주의와 카톨릭을 믿은 응오씨 집안이 공산주의 호찌민과 결합은 싫고, 그렇다고 왕실의 복원에 힘을 싣기는 싫으니 자연스레 무니에의 '인격주의 철학'을 가져와 정통 카톨릭 기반의 남비엣남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비엣남의 국가성격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조화" 였고, 그 조화를 가능케 하는 건 "신앙심"이었다. 일종의 모더니즘 운동이었지만, 문제는 카톨릭 이외의 기존 종교, 불교와 민족종교, 혼합종교를 강력하게 탄압하는 행태가 시작된 것이다.

4. 불교, 거센 반발

남비엣의 참상을 가장 널리 알린 사건은 1963년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이다.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른 사건인데, 이 현장은 미국인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다. 그해 퓰리처상 수상을 하기도 했다. 지엠이 자신의 집권 시기에 불교를 대놓고 탄압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불교만 탄압한 게 아니라, 거의 모든 토착 종교를 탄압했다. 심지어 지방에선 공산주의와 싸우는 상당히 다양한 민족종교 단체들이 있었는데(조선 처럼 동학이나 대종교 등), 이들과도 연대는 커녕 멸시하고 차별했던 것이다.

보통의 국가지도자은 그렇지 않지만, 이는 응오씨 집안 전체로 보면 어찌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응오씨 집안은 남비엣을 진정한 서구형 "카톨릭 국가"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비엣남의 근본 문제를, 공산주의와 낡은 종교로 보고, 아예 이들 모두와 전면적인 싸움을 벌인 것이다.

결국 응오 정권은 1963년 불교도 시위로 촉발된 민중 봉기와 군부의 쿠데타, 그리고 더 이상의 무능을 견디다 못한 케네디 행정부의 쿠데타 방기로 그해 11월에 무너지고 만다. 딘지엠은 쿠데타 군에 의해 차량 안에서 비참하게 즉결처형된다. 정치적 동반자 뉴 역시 다음날 처형. 비엣남의 카톨릭도 응오씨 집안의 붕괴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정황상 응오씨 정권은 사실상 “카톨릭에 진심”이었다고 밖에 설명이 안된다.

5. 미스터리, 비극

지금도 사이공 쪽, 남비엣남쪽에선 응오딘지엠에 대한 평이 좋은 편이다. 개혁을 추진했지만 실패한 인물로 평가되는 것이다.

응오딘지엠은 40대 시절, 이미 가장 유명한 관리였고 민족주의자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보다 10살 많은 호찌민이 일찌감치 지엠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만나 영입하려고까지 했을 정도다. 하두 유명한 이름이라 필자는 응오딘지엠이 1975년 사이공 함락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1963년 그는 군부에 의해 처형이 되었고, 이후 12년은 고만고만한 군벌들이 치고박고 싸우며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부패를 키우고 무능으로 사실상 나라를 북비엣에 헌납하고 만다. 아무리 미군이 주도해서 물량을 밀어주고 싸워도, 이미 이념을 상실하고 지도자를 잃은 남비엣남 체제를 극복할 수 없었떤 것이다.

더 신기한 것은 응오씨 형제들의 그 독실한 카톨릭 정신이다. 지금 나오는 의견들은 진정으로 응오씨 형제, 특히 지엠과 그의 이데올로그 응오딘뉴는 남비엣남에 진정한 카톨릭 국가를 세우려 했던 것으로 결론이 나는 모양새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렇게까지 모질게, 비밀경찰까지 동원해 민족주의 세력들을 탄압했을 리 없었다는 것이다. 남비엣남은 북쪽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내려온 수백만의 다양한 이주민이 집결해 있었다. 그런데 ‘카톨릭 공동체’에 대한 미칠듯한 집착이 남비엣남의 몰락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엠-뉴 형제는 프랑스가 심어 놓은 카톨릭이란 최면과 덫에 스스로 빠져들어간 셈이다. 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인이 되고 싶었던, 비엣남 최고 엘리트들이 행한 민족적 비극인 셈이다.

PS.

1. 사이공에는 지금도 이 ‘인격주의personalism’ 전통이 남아 있어 보임. 인격주의는 지나친 집산주의에 빠지지 않고 인권과 인간 인격의 존중을 추구함, 마르크시즘과 자유주의의 대안으로 한때 유행했고, 사이공이 그 최후의 성지.

2. 응오딘 형제들의 철학은 천주교 기반의 인격주의긴 했지만, 실제 국가운영은 프랑스 제국이 선사한 ‘비밀경찰’, 즉 안기부 중심의 철권통치였음. 그게 얼마나 심했으면 얌전한 불교도들 전체가 일어나 봉기를 벌임.

3. 그는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음. 결국 응오딘 형제들은 프랑스 제국이 남긴 마지막 유산에 가깝고, 그런 낭만적 국가관은 2차대전과 비엣남 전쟁을 견디지 못하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에 의해서 깔끔하게 붕괴. 프랑스 비씨 정부의 후계자가 되기도.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뉴엘 무니에. 반자본주의와 반공산주의을 내건 '인격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지금은 아주 널리 알려진 띡꽝득 스님의 1963년 소신공양 관련 사진. 그해 퓰리처상 사진 부분 수상작이기도 한, 일견 끔찍하면서도 여러 의미를 함축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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