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화교의 고향⑥ 푸젠의 황금 삼각지역
O 최대 화교 집단, 푸젠성 출신...동남아 화교의 60% 차지
O 싱가폴-말레이사아 최대의 거상 "탄까키"
O 중국의 최대 해양세력, 중국의 부를 좌지우지하다
글 | 박 번 순, 고려대학교 경상대 교수
산맥과 강은 사람들의 교통을 방해하고 언어의 소통을 막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푸젠성 사람과 언어는 다양하고 극단적으로 일부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푸젠성은 민閩이라고 하는데 이는 성도인 복주를 관통하는 민강閩江에서 유래한 것이다. 푸젠성 민강의 북쪽을 민북이라 하고 그 남을 민남이라고 부르는데, 민북의 경우는 절강성 문화에 가깝다. 민남인은 여러 하위 그룹으로 나뉘고 있는데 결국 민남어와 민남인들은 평야와 해안지역의 인구들이고 강 및 바다와 농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산악 지역인들과는 구별된다. 그래서 민남인들의 주식은 쌀과 해산물이다.
민남인들은 소위 민남 황금의 삼각지대라고 하는 천주-장주-시아멘여기에 대만이 포함된다 지역에 사는 푸젠어를 쓰는 사람들을 말하고 청나라 시기에는 천주부, 장주부, 영춘주 등을 포괄하여 지역적으로도 매우 넓은 범위에 살고 있다.
민남과 민북을 가르는 민강
용암에서 아침에 출발한 버스가 수많은 터널을 지난다. 조주인들은 푸젠성에서 서쪽으로 이동했는데 이 산맥을 넘지 않고 산맥의 북쪽으로 해서 서부로 이동하지 않았을까 싶다. 상당수의 객가인들 역시 이 산맥을 넘지 못하고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매주, 혜주로 확산되었을 것 같다. 물론 장주에도 토루가 남아 있으니 더 강인한 객가인들은 이 산맥을 넘었을 것이다. 구장주부는 용계, 해등 등 보통 장주 10속 지역을 포괄했고 면적은 1.26만km²로 전라남도 면적 보다 약간 크다. 장주지역은 농업이 발달되어 있고 주변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공업도 활발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산맥을 뚫고 고속도로를 닦았다. 그래서 용암에서 장주까지는 두 시간이 못 걸려 도착했다. 장주시 자체보다는 장주시의 한 작은 포구로 전락한 해징에 관심이 많았다. 해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1544년 이었고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월항月港이라고 불렸다.
월항은 송나라 시기에는 푸젠성 조선업의 중심지였다고 하며, 원나라 시기에도 천주항에 버금갈 정도로 국제항으로 이름을 날렸다. 명나라시기에는 정부가 해상무역을 금해도 월항은 유일하게 외국과 사무역이 활발했다고 한다. 해징의 쇠락은 시아멘의 개항과 함께 찾아왔다. 무역항으로서 역할은 끝낫고 해징현은 이웃 용계현과 합쳐져서 용해현이 되었고, 용해현이 시로 승격된 이후 해징은 해징진으로 쇠락한 항구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해징부두에서는 시아멘으로 가는 배가 운항되고 있었다. 사실 해징에서 시아멘으로 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우회해야 하지만 배를 타면 50분 만에 시아멘에 도착할 수 있다.
시아멘厦門은 표준어로 시아멘이지만 푸젠어로는 아모이이다. 그래서 현지와 외국에서의 이름은 아모이라고 불린다. 시아멘은 19세기 중반부터 유수의 항구도시였다. 외국인들은 시아멘의 따뜻한 날씨와 풍광 때문에 시아멘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 구랑서에 별장을 지었다.
그러나 시아멘이 본격적으로 변한 것은 경제특구로 지정된 것이 크게 작용했다. 행정단위로서 시아멘시의 면적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적은 1,699km²이고, 2014년 상주인구는 381만 명 정도 된다. 시아멘 시는 시아멘 섬과 육지에 있는 주변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섬 내에는 두개의 구 즉 사명구와 호리구가 있고 바로 육지로 연결된 곳에 집미구, 상안구, 그리고 해창구가 있다. 집미구 외곽에는 또 동안구가 있다. 이 지역 전체가 청나라 이전에는 동안현이었지만 아편전쟁 이후 시아멘 섬이 개방되면서 시아멘 섬은 급속히 발전하였고 이제는 시아멘 섬이 동안현 전체를 집어삼킨 모양이 되었다.
말레이시아 탄카키의 시아멘
시아멘 섬 그 자체로는 특별한 역사적 관광지가 없다. 시아멘이 근대에 만들어진 도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아멘은 화교 탄카키陳嘉庚, Tan Kah Kee,1874 – 1961의 도시이다. 1874년에 현재의 시아멘시 집미구, 당시 동안현에서 출생한 탄카끼는 10대 때 싱가포르로 가서 1900년대 초에 자신의 사업을 했다. 고무 플랜테이션을 시작한 그는 고무왕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성공했고,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러나 언제나 중국이 그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고 중국의 근대화에 관심을 가졌다. 청나라를 붕괴시킬 목적으로 손문이 만든 동맹회에 가입하여 손문을 지원했고, 손문의 사후에는 장개석의 국민당을 지원했다.
그의 활동은 교육, 항일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1910-1920년대에는 푸젠성에 학교 설립에 노력했다. 그가 1918년 고향 집미에 세운 사범학교는 오늘 집미대학이 되었다. 또한 1921년 시아멘 대학을 열어 최초 2년간의 대학 운영비로 연간 100만 달러를 내 놓았으며 다음 12년간 운영비로 연간 25만 달러 즉 300만 달러를 기부했다. 푸젠성 최초의 대학이었다. 세계대공황을 거치면서 사업이 어려워지자 그는 1937년에 시아멘 대학을 조건 없이 정부에 귀속시켰다. 시아멘 대학은 중국에서도 명문대학의 하나로 성장했다.
1930년대 중일전쟁 기간에 그는 동남아 화교들의 자금을 모아 중국에 전달했으며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 주도의 공산당이 경쟁했을 때는 가장 성공한 화교기업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국민당의 부패를 보고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자산은 모두 중국의 독립과 건국 과정에 쓰여졌음은 물론이다. 중국 정부는 탄까끼의 기여를 잊지 않기 위해 그의 생가가 있는 집미의 바닷가에 탄까기 공원, 탄까기 기념관, 그리고 탄까키 체육관을 지었고 탄카끼 고거를 국가보호문화재로 지정했다.
탄까기의 흔적은 시아멘 대학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화교박물관에도 있다. 공식 명칭은 화교박물관이지만 시아멘 사람들은 그저 박물관으로 부르고 있었다. 화교박물관의 뜰에는 두개의 큰 돌비가서 있고 각각 붉은 글씨로 勿忘故國과 天下爲公이 쓰여 있다. 물망고국은 강유위, 천하위공은 손문의 글이다. 두 사람 모두 국외를 떠돌면서 화교들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고 생활했다. 그들의 활동은 화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따라서 강유위나 손문의 말을 통해 고국을 잊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데 화교가 큰 기여를 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화교의 롤모델 '탄까키'
화교박물관은 1956년 탄까키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화교박물관이 시아멘 지역을 대표하는 화교박물관이라기 보다는 전 중국을 대표하여 화교박물관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중국에는 화교박물관이 몇 개 더 있다. 광둥화교박물관은 광저우시에 있는데 성급 화교박물관이라고 자랑하고 있으며 2011년에 정식 외부개방을 했다. 베이징에는 중국화교역사박물관이 있으나 2014년에 낙성되었다. 시아멘과 경쟁할 수 있는 천주에도 화교역사박물관이 있으나 이 또한 1990년대에 건설되었다. 이처럼 시아멘 화교박물관을 건설할 당시 탄까키는 비록 그의 고향이 바로 이 시아멘 동안현 집미이기는 하지만 전체 화교를 대표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시아멘시의 한 구區로 전락했지만 시아멘의 북부에 있는 동안은 역사적인 고장이다. 청나라시대에는 시아멘 지역을 포함하는 동안현으로 유서가 깊어 역사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동안현 소재지에는 공자묘가 있는데 한국의 향교와 같은 것이다. 정문에 써진 동안공묘同安孔廟는 주자의 글씨라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수나라 때 건설된 두개의 큰절 범천사와 매산사가 동계東溪를 사이에 두고 있다.
오랜 기간을 걸쳐 많은 화교가 동안을 떠났다. 그 중에서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화교기업으로 인정받는 곽흥풍郭芳楓, Kwek Hong Png, 1912-1994 등 홍륭그룹의 창업주 형제들이 동안출신이다. 동안현 연화진同安縣 蓮花鎭에서 1912년 태어난 곽흥풍은 가난 때문에 짧은 교육을 마치고 16살에 싱가포르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자형의 가게에서 일했는데 당시 그의 월급이 5달러였고, 그는 가게 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다고 한다. 그는 곧 독립하여 홍륭상사를 설립하고 고향에 있는 동생들을 불러 사업에 참여시켰다. 일본이 싱가포르를 지배하고 있던 2차 대전 직전 일본에 군수품을 공급하고 또 인도네시아로부터 고무를 밀수하기도 하여 부를 축적했다.
광둥이나 푸젠에서 온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이 땅을 소유하고 싶었던 그는 싱가포르의 중심가에 땅을 샀다. 막내 동생이 말레이시아의 사업을 책임졌다. 시간이 흘러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분리되면서 현재는 그들의 2세들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홍륭그룹을 각각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송원시대의 국제항구 천주항
시아멘시에서 동쪽으로 접한 지역이 바로 치앤저우천주, 泉州이다. 청나라 시기의 구천주부는 진강, 남안, 혜안, 동안, 안계 등을 포함했다. 천주시 면적은 1.1만㎢로 한국의 강원도와 같고 인구는 800만 명 이상이다. 천주시는 4개의 중심지역의 구, 주변 4개시, 그리고 5개현을 포함한다. 3개의 시는 석사, 진강, 남안시이며 현은 안계, 영춘, 덕화, 금문이다.
이 중 금문도는 현재 대만이 지배하고 있다. 송나라와 원나라시기에 천주는 중국을 넘어 세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항구 중의 하나였고 유라시아를 걸쳐 많은 외국인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 시기와 관련된 많은 유물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천주는 별명인 자동刺桐의 서구식 발음인 자이툰Zayton으로 표기되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값비싼 보석과 크고 좋은 진주를 비롯하여 비싸고 멋진 물건들을 잔뜩 싣고 인도에서 오는 배들이 정박하는 항구가 있다…기독교도들의 지방으로 팔려 나갈 후추를 실은 배가 한척 알렉산드리아나 다른 항구에 들어간다면 이 차이톤 항구에는 그런 것이 100척이나 들어온다. 이곳은 세계에서 상품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두 개의 항구 가운데 하나다.” 고 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해 천주시는 천주해외관계박물관Quanzhou Overseas Relations Museum을 설립했다. 해외관계박물관은 천주의 국제관계 측면에서 천주의 역할, 이슬람과 기독교인의 이주, 천주시에서 발굴된 이슬람교도들의 무덤 비석들을 모아 놓았다. 또한 교통수단으로서 중국의 역사적으로 조선의 변화과정을 자세하게 정리해 두었다. 박물관 1층에는 시아멘선이라는 실물 배를 전시해 놓았는데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적어 놓지 않았다. 2층에는 중국 선박의 발전사 그리고 다양한 지역과 강에서 운행되던 배들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해외관계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교역사박물관이 있다. 시아멘의 화교박물관이 진가경 등 화교들이 중심으로 돈을 모아 건설한 데 비해 천주의 화교역사박물관은 천주시가 화교의 고향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설립한 것 같았다. 실제 천주는 중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화교의 고향 중의 하나로서 전 세계 129개국에 천주에 연고를 둔 화교화인은 모두 750만 명이라고 한다. 이는 푸젠성 화교의 전체 수의 60%에 이른다. 화교박물관은 천주시의 지역별 화교수를 정리한 자료도 소개했다.
1986~1998년 기간의 통계로 표시한 것인데 남안현 출신이 128.6만 명, 진강시 76.4만 명, 안계현 68만 명, 혜안현 67.4만 명 그리고 영춘시가 60.5만 명 등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동남아로 나가 있다고 봐야 한다. 현재 각 시나 현의 전체 인구가 화교수보다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한 때 얼마나 많은 이 지역 중국인들이 새 삶은 개척하기 위해 미지의 땅으로 갔는지를 알 수 있다. [계속]
PS.
- 푸젠성 출신은 화교의 본류이자, 동남아 사회의 주류적 정체성임. 탄까키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해석됨.
2. 메인사진: Bridge over river, Fuzhou, Fujian, China, ca.1911-1913 (impa-m57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