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화교의 고향⑦ 동남아 돈줄 바꾼 거물들
O 화교의 최대 계파인 "복주인" 아시아 경제사를 바꾸다
O 동남아 각국 최대 재벌로 성장하며 정치경제 막후 실력자로
O 이제는 원재료 중심에서 벗어나 호텔과 유통, 세계적 투자회사로
글 | 박 번 순, 고려대 경상대 교수
더욱 흥미 있는 자료는 특정 지역의 동족들이 어느 시대에 해외로 이주했는가를 나타낸 것이다. 안계현의 대건 임씨大墘林氏 집안이나 진강현의 수산이씨圳山李氏 들의 사례이다. 양 가문 모두 1880년 이후 20여년 기간에 가장 많이 해외로 이주했다. 수산이씨 가문의 이주자들은 87%가 필리핀에 가 있고 대건임씨들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얀마에 각각 25% 이상이 진출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건 임씨가 나간3국은 모두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말레이 반도가 존경하는 '이광전’
많은 사람이 해외로 나갔기 때문에 이지역 출신의 화교기업들인 많다. 남안시 매산진梅山鎭 출신의 이광전李光前,Lee Kong Chian, 1893-1967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동일하게 존경받는 인사이다.
그는 진가경의 사위로 역시 장인의 예를 따라 중국의 독립과정에 많은 기여를 했고 말레이반도의 화교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10살 때 아버지가 있던 싱가포르로 이주하이서 교육을 받았고 1909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역시 교육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이 나면서 그의 모국 유학은 끝이 났고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1915년에 탄카키의 회사에 입사했고, 1920년에는 탄카키의 딸 탄 아이레Tan AiLeh와 결혼했다.
그는 1927년에 말레이시아의 조호의 무아르에서 고무가공 사업을 하여 대성공을 거두어 동남아 전역으로 사업장을 확대해 동남아 최대의 고무가공업체를 만들었다. 이광전의 사업은 고무에서 시작하여 은행업 등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는 축적한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교육 사업에 돈을 댔다.
현재의 싱가포르국립대학이나 말라야대학에 돈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분리되기 이전 말레이시아는 그에게 최고의 영예인 탄스리Tan Sri 칭호를 주었다.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 이후에는 싱가포르 쪽에 더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가 사망할 때 그는 싱가포르의 화교은행OCBC의 회장이었다.
말레이의 도박왕도 이곳 출신
남안의 북쪽에는 우롱차 철관음으로 유명한 안시安溪가 있다. 안계 역시 역사적 고향이다. 안계를 찾았을 때는 가는비가 내렸는데 안계현을 구비쳐 흐르는 시시西溪는 누런 물을 쏟아 내고 있었고 도시 전체를 안개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버스터미널 옆의 넓은 원형 광장을 둘러싼 모든 점포가 차를 팔고 있었다.
그들은 시음용 차를 준비해 두고 있었고 소량의 차를 포장하는 기계들이 철커덕철커덕 돌아가고 있었다. 터미널 옆에는 또 차를 파는 난장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직접 재배한 농민들인지 중개상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비 때문에 사겠다는 사람 보다는 팔겠다는 사람이 더 많다.
안계가 낳은 화교기업인으로는 말레이시아의 겐팅하일랜드를 만든 임오동林梧桐, Lim Goh Tong, 1918-2007이 첫 손에 꼽힌다. 임오동은 안계현에서 7형제 중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에는 형이 한명 누나가 3명이 있었고 아래로 각각 남동생과 여동생이 1명이 있었다.
이미 12살 때 형이 세상을 떠나고 16살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서 그는 가장이 되어 식구들을 책임져야 했다. 19살이 되었을 때 일본이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을 때 그는 말레이시아로 왔다. 26세 때 결혼을 하고 40대에 들어서 겐팅하일랜드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말레이시아의 카지노 산업을 지배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21세기 들어 성장 동력을 상실한 싱가포르가 카지노를 열기로 하자 그의 겐팅은 싱가포르 센토사 섬에 거대한 카지노 리조트를 열었다.
필리핀 최고의 부자 ‘헨리 시’
천주의 남쪽 진강시 출신의 대표적인 화교는 필리핀의 헨리 시이다. 그의 SM 투자사는 쇼핑몰, 유통, 부동산개발, 은행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 필리핀 최대의 기업집단이다. 특히 SM은 전국에 47개의 SM백화점, 38개의 SM 슈퍼마켓, 그리고 37개의 SM 하이퍼마켓을 갖고 있는 등 필리핀에서 가장 지배력이 높은 유통업체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아시아 최대의 자산가로 알려져 있는데 2015년 5월 세계적 경제잡지인 포브스Forbes가 밝힌 세계 부호 순위에서 그는 73위로 동남아 최대의 자산가로 인정받고 있다.
SM 최초의 중국 사업이 바로 이 시아멘에 설립한 백화점이었다. 시아멘의 SM 백화점은 2001년 12월에 문을 열었고, 그 다음은 헨리 시의 고향인 진강에 2005년 백화점을 열었다. 이후 2006년 10월 사천성의 청두성도에 새 백화점 을 열었고, 2009년 10월에는 시아멘에 추가로 백화점을 열었다. 대대적인 확장을 했으며 2011년 9월에는 이제 중국 경제의 중심지인 소주로 진출했다. 2012 년 12월에는 다시 충칭重慶에 백화점을 열었다.
동남아에서 천주시 출신들은 동남아에서 지연관계를 크게 활용해 사업을 했을 것이다. 1894년에 말레이시아 페낭에서는 처음 남안회관이 건립되었다. 영춘 출신들은 1800년에 이미 말레이시아 말라카에 회관을 건설했다. 싱가포르에서는 1867년 영춘 출신들이 영춘회관을, 진강현 출신들은 1918년 진강회관을, 1918년 혜안출신들이 모여 혜안회관을 설립했으며, 1922년에는 안계현 출신들은 안계회관을, 또 남안인들은 또 1926년 싱가포르남안회관을 설립했다. 이들은 향우회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동향출신들의 사업상 교류역할을 했을 것이다.
복주인들 이야기
복주는 푸젠성의 성도로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진 도시이다. 천주에서 출발한 버스는 푸티엔보전, 莆田을 거쳐 푸조우福州의 한 지역인 푸칭복청, 福靑으로 간다. 보전과 복주는 같은 푸젠성에 있고 지리적으로 아주 근거리에 있지만 서로 약간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복주-복청 사람들은 복주인이라고 하고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등에서는 이들을 혹차라고 부른다.
복주는 송원시대에 인구,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급격히 발전해 황금기를 보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을 다스렸던 관리들은 수리사업을 일으켰고 치수를 했다. 복주시내의 하수도 시설은 이미 송대에 다 완성되었다고 한다. 송나라 시기의 복주는 중국의 유수의 도시 주의 하나였고, 농업이 고도로 발전했으며 조선업의 중심지였다. 조선업은 명나라 초기까지도 성했다. 정화의 함대도 모두 복주에서 제작되었다.
원나라 때 복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복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복주에 있는 왕국- 아마도 지방정부를 이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주민들은 “온갖 더러운 것들을 먹는데 만약 자연사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의 고기까지 아주 기꺼이 먹는다. 칼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경우를 매우 좋은 고기로 여겨 모조리 먹어치운다.”고 했다. 다소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을 적고 있으나 분명한 것도 있다. 그는 “이 도시 가운데로 폭이 거의 1마일인 커다란 강이 관통하고 있고, 그 강을 따라 많은 배가 이 도시로 들어온다.” 고 했다. 바론 민강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복주는 또한 역사적으로 유구국琉球國-현재의 오키나와-과 통상 관문 유구국 사신은 복주를 통해 명나라나 청나라로 들어왔다. 명나라가 해외무역을 금지하게 되자 일본 왜구의 준동이 심해졌는데 16세기 중국의 왜구 침략을 물리친 척계광의 주요 활동지도 복주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안정되기 이전에는 복주는 반청세력이 웅거하기도 했다. 아편전쟁 이후 1844년 복주는 정식으로 개항을 하게 되었고 서구열강은 복주에 대거 진출했다. 1845년 영국이 영사관을 설치 한 이후 17개 국가가 복주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이와 함께 복주항을 통한 중국인의 해외이민도 증가했음은 물론이다.
복주인들은 동남아에서도 상당한 결속력을 보여 주었고 국제적 비즈니스의 파트너가 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여러 명의 걸출한 화교기업인들의 연고지이기도 하다.
수하르토와 결탁했던 ‘림소양’
몇 년 전에 작고한 인도네시아의 살림그룹을 창업했던 스드노 살림 림소양은 복청시 해구진省福淸市海口鎭에서 태어났다. 고향 이름이 증명하듯이 해구진은 복청을 지나는 용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그는 여기서 1916년에 태어나 2012년에 싱가포르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한 때는 세계 10대 부호의 순위에 들기도 했고 인도네시아를 넘어 동남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룹인 살림그룹을 만든 사람이었지만 중국도 인도네시아도 아닌 싱가포르에서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된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1935년 부친이 세상을 뜬 후, 1938년 봄에 그는 숙부가 있던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숙부의 가게 일을 도우다가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 그는 1952년 자카르타로 이주를 하여 부를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부의 가장 큰 원천은 밀가루 사업과 밀수입의 독점이었다. 바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연고를 이용하여 정부로부터 다양한 사업에서 독점권을 얻었고 독점이윤을 쌓아 땅 집고 헤엄치기로 자산을 축적했다.
1990년대 전반 인도네시아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이전 살림그룹은 동남아시아 최대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그의 임씨 왕국은 다각화된 집단으로 방적, 화학, 전자, 임업, 어업, 항공, 보험, 부동산. 금융. 보석, 호텔, 의료기기, 철강업, 시멘트, 자동차 등 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수하르토의 도움으로 성장했다는 끊임없는 비판을 받아야 했고 그가 인도네시아어를 잘 못 구사한다는데도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어려서 중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어가 유창할 수 없다고 변명을 했고 인도네시아에서 수십 년을 살았고 수만 명의 인도네시아인 에게 일자리를 주고 있다고 항변했다.
1997년 인도네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다음해 5월 수하르토에 물러나자 온 국민은 림소양의 시대도 끝났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은행인 BCA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했다. 그 시기 자카르타의 그의 집 담벼락에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써 갈긴 “수하르토의 개”라는 문구가 그에 대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시각을 보여 주었다. 위기 이후 그는 싱가포르에 거주했고 병원에서 2012년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가난했으나 그는 부를 쌓았고 천수를 누렸던 것이다.
아시아의 설탕왕 ‘로버트 곽’
복주시내에서 오룡강과 민강은 거대한 섬을 만들어 내는데 한강의 여의도와 같다. 그 섬의 한 쪽에 개산진福州市 倉山區 盖山鎭이 있다. 바로 동남아의 가장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인인 로버트 곽郭鶴年, 1923-의 원적지이다. 로버트 곽은 현재 동남아 최대의 기업집단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외부인에게는 그의 핵심 사업이 동남아, 중국, 그리고 세계에 퍼져있는 샹그릴라 호텔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그의 주 수입원은 샹그릴라 호텔보다는 그가 지배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의 설탕사업, 홍콩과 싱가포르의 부동산, 세계 최대의 팜오일 관련제품 생산업체인 윌마 인터내셔널에서 나오고 있다. 그의 사업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에 본부를 둔 세 개의 지주회사가 관리를 하고 있고 물론 이 3개의 지주회사의 정점에는 로버트 곽의 일가가 장악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홍콩, 싱가포르의 본부는 그밑에 수많은 기업들을 거느리고 있다.
로버트 곽의 부친 곽흠감郭欽鑒은 개산진에서 출생했는데 당시의 개산진은 복주의 외곽에 있었다. 로버트 곽의 부친 곽흥감은 1900년대 초에 말레이시아 조호바루로 이주했다. 부친의 형제는 6형제였고 모두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만안당이라는 약국을 하면서 고향을 지키는 장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말레이시아로 이주를 했는데, 그들은 같이 사업을 했고 후손들도 아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지금도 말레이시아의 지주회사는 곽 브러더스Kuok brothers 라는 회사이다.
일찍이 자리를 잡은 곽흠감은 아들 3형제에게 좋은 교육을 시켰는데 장자는 말레이시아의 외교관이 되었고 둘째는 다소 다르게 공산주의자로서 영국으로부터 말레이시아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싱가포르의 명문이었던 래플즈에서 공부를 했다.
원재료 장악한 "복주인"
로버트 곽의 사업은 초기 사업은 제당업이었다. 영국에서 말레이시아가 독립한 이후 정부와 손잡고 말레이시아 설탕시장을 독점했는데 그 배경에는 원당수입의 독점이 있었다. 설탕사업이 번성해 한 때 그는 ‘아시아의 설탕왕’으로 불렸다. 이후 1970년대에 호텔업에 진출했고 장기적으로 홍콩 반환을 염두에 두고 홍콩에도 진출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중국에 진출하였다. 로버트 곽의 사업 역시 살림 그룹에 비해 못하지 않게 다각화되었으며 동남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로버트 곽은 90이 넘은 나이에도 그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림그룹의 스드노 살림과는 같은 복주인으로서 오랫동안 협력을 했다. 1950년대 말부터 말레이시아의 설탕과 제분 분야의 정부 보호를 받던 로버트 곽은 인도네시아 진출을 모색하고 림소양에게 접근했다. 지역적 연고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결국 그들은 합작으로 인도네시아의 제분 독점회사인 보가사리를 만들었다. 언론들은 양측의 출신지인 복주와 복청이 40킬로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하면서 그들의 협력에 대해 늘 이야기 하고는 했다.
그러나 로버트 곽은 살림 측이 이윤을 적절하게 배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1990년대 중반 동업에서 발을 뺐다. 그리고는 1998년 위기가 나고 살림 그룹이 자금난에 빠져 로버트 곽에게 도움을 청하자 로버트 곽 쪽에서는 70%의 이자를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계속]
PS,
메인사진
말레이시아의 경제 거물인 곽 브라더스. Robert Kuok (L) with President Suharto of Indonesia (C) and Yani Haryanto (R) in the president's country home in Chiomas, outside Jakarta in 1970. (Photo: Robert Kuok, A Memoir)
참고서적
1. 김호동 역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사계절, 2000, 406쪽. 마르코 폴로는 두개의 항구 중 하나라고 말했지만 다른 한 개의 항구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2. Joe Studwell, Asian Godfathers: Money and Power in Hong Kong and Southeast Asia, Grove Press 2007, pp. 7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