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니의 전환점, 1997 금융위기

작성일 | 2023년 6월

●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냉전 체제의 종식과 신자유주의 체제 시작
● 태구에서 시작된 금융위기, 인도네시아는 부실 금융과 충돌하며 큰 피해
● 화교 기업들이 가장 큰 피해...혼란기 수천여 화교 사망 혹은 부상 당해


0.

영화 "박열:Anarchist from Colony"에는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사건 때 조선인을 향한 일본인의 적대적 태도를 조명하고 있다. 1920년대 조선은 일본국에 완전 편입이 끝났고, 자연스럽게 3등 국민으로 대우받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노조가 막 조직되고 공산당이 만들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반도에서 도쿄로 막 건너온 조선인은 일단 저렴해서 큰 인기였다. 당연히 막 개화환 나라의 청년 노동자 일당은 일본 노동자의 1/3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헐값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 임노동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악재惡材였다. 오키나와나 홋카이도 등의 신생 편입지역은 인구도 적고 도쿄로 건너올 일도 별로 없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무작정 일본 항구로 몰려든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강도 7.9의 대지진과 대화재가 도쿄를 중심으로 터진 것이다. 보통 이런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지역의 유지와 퇴역 군경, 관변조직을 중심으로 "자경단"이 만들어지고, 임노동자들을 수족으로 쓴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 "조선인들이 독을 탄다"라는 헤이트스피치가 빠르게 유포된 것이다. 결국 자경단은 치안을 유지하는 게 아닌, 혼란 속에 조선인을 죽이는 일을 자행하게 된다. 일본 통계는 300여명, 조선단체는 약 6600명 사망을 발표한다. 사건에 대한 정밀한 조사가 어려운 시기였다.

1. 토사구팽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시작된 아시아의 "냉전"은, 1997년 여름,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 위기를 통해 '종식' 된다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대략 30년 가까이 아시아의 냉전(혹은 이 유지된 것이다. 이 시기 미국은 공산당과 전쟁을 벌이며 '우익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름 미국을 지지하는 정권에 대한 관리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직접 경제 지원와 군사 지원도 있지만 가장 은밀한 지원은 특별하게 이들 우익 정권에 대해 "환율 공세"를 안한다는 대목도 있었다. 즉, 이들 국가들의 화폐가 달러대비 적당한 고평가를 받게끔 어느정도는 달러공급을 충분히 해줬다는 얘기다. 이런 과정에서 혜택을 본 나라들이 "태국" "남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가 된다.

그러는 와중에  탈냉전은 1991년 쏘비엣 몰락과 함께 이미 본격화된 뒤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아시아의 우파 정부들은 "관치 금융"과 "고평가된 자국 화폐" 그리고 "과도한 부채" 등으로 헷지펀드의 환율 공격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이미, 미국의 권력은 워싱턴의 군산복합체와, 뉴욕의 월스트릿 자본으로 분리가 된 상황. 1997년 그 사건이 터졌고, 아시아 군부 정권들은 허수아비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2. 네포티즘+섬나라

네포티즘Nepotism은 '족벌주의'라고 번역이 되는데, 요즘은 '족벌'이란 말을 잘 안쓰기 때문에 "친척 우대주의"라고 표현하는 게 낫겠다. 조카를 뜻하는 Nephew에서 왔다고 한다. 실제로 "조카"는 정말로 가까운 친척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권력자의 "조카"는 정말 흔히 쓰는 카드가 된다. 어릴적부터 가까이서 보고 자라기 때문이다. "아들과 딸"을 챙기는 건 기본이고.이런 네포티즘이 가장 강력하게 행사되는 지역으로는 "섬"이나 "반도" 지역인 경우도 왕왕있다.

인도네시아는 특히 더 네포티즘이 강한 나라로 알려졌다. 누군가 한 번 권력을 잡으면 "조카" 정도는 가볍게 권력자가 챙겨도 무방한 사회였다는 얘기다. 이러한 '네포티즘' 문화는 수하르토 시기에 꽃을 피우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수하르토와 군부였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자신의 친척을 배불리는 데 아낌없이 사용한 것이다.아시아에서 "금융업"이 발달하기 힘든 이유도 바로 이 "네포티즘"이 거론된다. 네포티즘에 의한 대출과 금융거래는 99% 사고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관치금융과 네포티즘의 금융은 사상 최악이다.

인니는 이러한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97년 금융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는 태국이나 한국이 아닌 인니가 된다. 1997년 초 1달러에 2400루피이던 환율은 1998년엔 1달러에 1만 5000 루피가 된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인니에 가보면 싼 이유가 있다.

3. 수하르토 몰락

불안하게 유지해 오던 인니의 금융은 1997~1998년 사이에 박살이 나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인니는 자체로 "섬나라"이기 때문이다. 섬 나라는 모든 분야의 생산시설을 원천적으로 갖기가 힘들다. 원자재를 수출해 공산품을 수입해 오는 경제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러 환율이 박살이 난 것이다. 결국 수하르토 일가는 지난 32년간의 독재의 끝을 "퇴진 시위"로 끝을 마감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만다. 독재에 질린 대학생과 진보지식인들은 수하르토가 하루 빨리 하야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군부와 자경단 극우세력 사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인니의 환율이 박살이 나고, 경제가 어려워진 이유는 화교들이 재산을 중국으로 빼돌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다. 중국계는 1965년 이후 실제로 "바닷가 항구 근처에만 살아야 한다"는 격언을 가질 정도로, 인니 민중과 신뢰감이 적은 상태였다. 1965 대학살을 겪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자산가들은 폭동이 나자 몸을 숨기기도 했다. 그러나 소문은 그야말로 흑색선전이었다.

4. 테러와 방화

곧이어 분노한 민중들은, 반 수하르토 시위대와는 전혀 다른 시위대를 조직되기 시작했다. 화교의 집에 불을 지르고 상가를 약탈하는 폭동세력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화교들이 경제난의 진짜 이유"라고 주장하며 그 생각을 실천에 이르게 된다. "화교들이 달러를 빼돌린다" 라는 흑색선전이다.대략 2000여명의 화인들이 이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러졌다.

수하르토가 하야를 발표하기 직전까지 자카르타, 수라바야, 메단 등 대도시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하루종일 폭도들이 도시를 휘젖고 다니며, 외국인, 특히 얼굴이 하얀 중국인을 겨냥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도 숨어다니기에 바빴다고 한다. 친수하르토 군부와 경찰은 이 과정에서 책임을 방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군부 역시도 네포티즘의 진정한 수혜자이며, 동시에 경제위기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민중들의 폭동에 대해서, 특히 그 화살이 화교에게 향하는 것을 반겼다는 설도 있지만, 당시 적과 아군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웠다는 게 많은 이들의 목격담이다.

5. 수하르토 사임

1998년 5월 수하르토가 물러나면서 폭동과 시위는 잠잠해지기 시작한다. 이후 그는 계속 자카르타에 머물며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하며, 각종 비리 조사와 부패 혐의 조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2004년 건강이 악화되며 조사는 중단된다. 그의 자녀 6명은 모두 대부호에 가까운 사업을 일구었는데, 특별하게 불이익을 받았다는 얘기는 없다. 수하르토는 2008년이 사망한다.

그런데 수하르토가 몰락하면 군부에게서 민주세력으로 권력이 이동하리라 예상했지만 2005년 군부 출신인 유도요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모두의 예상과 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 결과적으로 수하르토의 말년은 그다지 불우하지는 않았다. 그의 죽음은 군부를 비롯한 사실상 국장에 가까운 예우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그의 시신은 조코위가 시장을 한 솔로(수라카르타)에 안장된다. 그의 정치적 고향인 중부자바로 돌아간 것이다.

태국에서 시작된 아시아 금융위기는 인도네시아에 가장 큰 타격을 입혔다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하는 수하르토, 그리고 옆에는 하비비 부통령 

PS.

1. 인니에서 화교의 비중은 1.6%~3% 정도로 파악하는 듯. 3억 인구라고 봤을 때 700만 정도.

2. 위기가 터지면 위기를 타개 하기 위해, 가장 약자를 앞에 내세우는 것으 어디나 동일함

3.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탁월하게 "네포티즘"을 극복했다 싶지만, 최근 이상하게도 그 경향성이 다시 강화되는 게  느껴질 정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