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개혁 내세운 '전진당' 거부한 보수 정치, 야합으로 귀결되나?
작성일 | 2023년 8월 12일
● 전진당 '피타 림짜른랏', 미디어 기업 주식 보유 핑계로 헌재 의원 자격정지 결정
● 제2순위 탁신당 '푸어타이'에게 넘어간 조각권.....개혁 의제 포기할 가능성도
● 높아지는 "보수 내각".....그 누구도 정계 주도하지 못할 가능성
태국총선이 끝난 지 이미 3개월이 지났으나 아직도 총리를 선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월 14일 총선에서 제1당이 된 까우끌라이당(전진당)이 두 차례씩이나 총리선출에 실패하자 제2당 프어타이당이 총리선출권을 물려받았지만, 그 미래는 불투명하다.
이번 총선에 출마한 여야 주요 정당은 모두 6개 정당이었다. 여권의 친군부 보수정당은 팔랑쁘라차랏당, 루엄타이쌍찻당, 품짜이타이당, 쁘라차티빳당(민주당)이며, 야권의 반군부 개혁정당은 프어타이당과 까우끌라이당(전진당)이다.
선거 결과 까우끌라이당이 하원 500석 중 151석(지역구 112/비례대표 39)을 차지해 제1당이 되었으며, 탁신 친나왓(74) 전 총리 지지 세력인 프어타이당은 141석(112/29)을 차지해서 제2당이 됐다. 여권의 핵심 정당인 팔랑쁘라차랏당은 40석(39/1)을 얻는 데 그쳤으며, 분당해 나간 루엄타이쌍찻당은 36석(23/13)을 얻었다. 여권에서 유일하게 존재감을 과시한 정당은 품짜이타이당인데 71석(68/3)을 얻어 제3당으로 올라섰다. 또 다른 여권 정당인 쁘라차티빳당은 25석(22/3)을 얻는 데 그쳤다.
5월 총선, 야권의 승리
이번 총선에서 1, 2당을 모두 차지한 야권은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바로 정권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당제와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태국의 경우 제1당이 됐다고 해서 반드시 총리를 배출하고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제1당에만 연정을 구성할 수 있는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총선 후 3개월 동안 연정 구성과 총리선출을 위한 합종연횡의 수 싸움이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유이다. 이외에도 정치권 밖의 변수도 중요하게 작동하여 고도의 정치게임이 벌어지게 된다.
2014년 쿠데타 후 군사정권하에서 만들어진 2017년의 헌법은 ‘다음 정부는 하원 의원 500명 과반의 찬성이 필요하지 않으나, 양원(750명)에서는 과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2017년 헌법에 따라 치러진 2019년 총선 후 5년간만 적용되며, 이 기간에는 군부가 임명하는 상원 250명이 총리선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상원의 임기는 2024년 5월 11일까지다.
총선 결과, 제1당 까우끌라이당을 포함한 8개 정당의 야권 연합세력의 의석수는 312석이며, 여권의 의석수는 188석이었다. 야권은 하원의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자신들이 지지하는 총리를 선출하기 위해서는 상하 양원 회의에서 376석을 얻어야 한다. 친군부 여권은 군부 지명인사들로 채워진 상원 250석의 지지를 모두 받으면 하원 선거의 패배와 관계없이 소수파 정부를 구성할 수도 있다.
까우끌라이당은 지난 7월 13일 상·하원 합동 투표(1차 투표)에서 과반 동의를 얻지 못했으며 상원에서 겨우 13석의 지지를 끌어냈다. 투표가 끝나고 까우끌라이당은 상원의 총리선출권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 272조 개정동의안을 국회에 의안으로 부쳤다. 그러나 개정안이 국회 1차 독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양원의 절반 이상인 최소 376표의 지지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전체 250명의 상원 의원 중 최소 1/3의 표(84표)가 포함되어야 하므로 그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시도는 이날 투표에서 나타난 상원의 문제점을 여론화시키기 위한 정치공세로 보인다. 이와 함께 차라리 현재 총리선출권을 갖는 상원의 임기가 끝나는 내년 5월까지 총리선출을 미루자는 주장도 나왔다.
군부 및 상원의 “억지”
헌법재판소는 같은 날 까우끌라이당 피타 림짜른랏 대표(43)의 의원 자격을 일시 정지시켰다. 태국은 이해 상충을 이유로 의원의 미디어 기업 지분 소유를 금지하는데, 피타 대표는 케이블방송사인 ITV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ITV는 2007년 정부와의 주파수 계약이 종료되면서 방송이 중단됐다. 이와 함께 헌재는 까우끌라이당이 추진하고 있는 형법 112조(일명 왕실모독죄) 개정을 입헌군주 체제를 전복하려는 시도로 위헌이라는 주장의 헌법소원을 심리하기로 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앞으로 정국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주요 변수가 될 것이다.
1차 투표에 이어 19일로 예정됐던 2차 투표에서 야권 연합은 총리 후보로 피타 후보를 재지명했으나 이번에는 투표 자체가 무산됐다. 이미 한번 거부된 동의안은 같은 회기 내에 재심의할 수 없다고 명시된 국회법 41조에 따라서 피타 대표의 총리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 대해서 까우끌라이당은 일반 동의안과 헌법에 따른 총리선출안은 그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피타 후보 재지명 불가 결정의 위헌성 여부를 판단해달라고 옴부즈맨사무소를 통해 헌법재판소에 청원했다.
한편으로 2차례나 총리선출 시도를 했으나 실패한 까우끌라이당은 야권 연합내의 제2당인 프어타이당에게 총리선출권을 넘겨주었다. 프어타이당은 기존의 야권연대를 깨고 까우끌라이당과 협력하지 않는 대신 구여권과의 연정을 추진할 것임을 밝혀 까우끌라이당과 프아타이당 내 강경 세력 및 시민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게 됐다.
여권 정당들은 까우끌라이당이 제외된 프어타이당 주도의 연립정부 구성을 원하고 있으며 까우끌라이당은 2014년 쿠데타 주도 세력인 쁘라윳 짠오차(69)의 루엄타이쌍찻당과 쁘라윗 웡쑤완(78)의 팔랑프라차랏당과는 연립정부를 구성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까우끌라이당은 프어타이당이 여권과 연정을 구성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이 성사되면 친군부 여권 보수정당들에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가 정치개혁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프어타이당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제2당에게 넘어간 공
현재 거론되고 있거나 예측 가능한 앞으로의 총리선출과 연정 구성 방식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프어타이당은 친군부 여권 정당을 모두 연정에 포함하고 싶다. 그러나 역풍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걱정스럽다. 총선 기간 중 쁘라윗 웡쑤완의 팔랑프라차랏당과의 밀약설이 불거졌을 때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 대국민 약속에 관해서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팔랑프라차랏당과 루엄타이쌍찻당 양 당을 배제하는 경우 프어타이당이 추천하는 총리 후보의 선출이 쉽지 않게 된다.
양 당은 구여권의 핵심 세력일 뿐 아니라 상원에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프어타이당은 일차적으로 구여권정당 가운데 비교적 중도성향인 품짜이타이당(71석)을 비롯한 6개 군소정당을 참여시켜 총 8개 정당 228석을 확보했다. 하지만 하원 과반에 못 미치기 때문에 결국은 팔랑프라차랏당이나 루엄타이쌍찻당과의 연정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돼 있다. 민심을 의식해서 양 당 의원들의 개별적 지지(당 차원의 참여가 아닌)를 끌어내는 방안도 모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여권 정당 중 하나인 쁘라차티빳당(25석)은 당내 파벌투쟁으로 의견이 갈려 연정 참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프어타이당은 까우끌라이당을 연정에는 포함하지 않으나 구여권정당들과의 연정 구성 추진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 다양한 정치적 시도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프어타이당이 총리선출 때 까우끌라이당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양 당은 앞으로 여야로 갈리더라도 헌법개정 등 개혁 입법 추진을 위해서 협력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프어타이당의 총리 후보(228석 확보)는 친군부세력의 핵심인 팔랑프라차랏당이나 루엄타이쌍찻당의 지지를 받지 못하더라도 까우끌라이당의 지지(151석)를 받게 되면 상하 양원 회의에서 과반인 376석을 상회하는 지지(379석)를 받아 총리에 당선될 수 있다. 까우끌라이당은 상원의 총리선출권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 272조 개정동의안을 국회에 의안으로 부친 만큼 상원을 무력화시킨다는 의미에서 프어타이당을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
복잡해진 계산법
프어타이당은 세 명의 총리 후보 중 쎗타 타위씬(60)를 총리 후보로 내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총선 과정에서 형법 112조 개정 가능성을 시사한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고 있으며, 부동산업체인 쌘씨리그룹 회장으로 재직 때 토지매매에 따른 세금포탈의 의혹도 불거져 있는 상태이다. 112조 개정에 강력한 반대자인 품짜이타이당의 아누틴 찬위라꾼(57) 대표는 국회에서 총리 선출시 이에 대한 해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쎗타 후보도 총리선출에 실패한 까우끌라이당의 피타 대표의 경우와 같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 만일 그가 중도하차하게 된다면 탁신의 딸인 패텅탄 친나왓(37)에게 기회가 올 수 있지만, 탁신의 직계라는 점에서 치러야 할 모종의 정치적 대가는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이런 이유로 프어타이당이 구여권과 연정을 구성하되 총리 후보는 팔랑쁘라차랏당의 쁘라윗 대표에게 넘기는 방안도 모색되고 있다. 반대급부로 구여권 세력들과 상원은 프어타이당의 실소유주인 탁신의 귀국과 사면 추진을 용인하겠다는 것이다. 탁신은 2008년 부정부패 등의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해외로 도피했고, 법원은 지금까지 진행된 다양한 사건의 궐석 재판에서 모두 징역 12년 형을 선고한 바 있다. 그는 프어타이당이 집권하면 국왕의 사면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귀국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연정 구성이 마무리될 것으로 생각했던 8월 10일 귀국할 것이라고 했지만 정치적 상황변화에 따라 다시 귀국일을 몇 주 뒤로 늦추고 있다.
이번 총선 과정 내내 프어타이당과 팔랑쁘라차랏당과의 빅딜설이 파다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프어타이당이 제1당을 까우끌라이당에게 뺏겼던 주요 이유는 이런 설을 조기에 진화시키지 못하고 야당 선명성 경쟁에서 뒤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현재 상원 의원들은 2014년 쿠데타 후 만들어진 군사평의회(NCPO)가 임명했다. 이 기구를 실제로 운용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 자문회의 의장이었던 쁘라윗은 쁘라윳 총리의 군 선배로 군부와 상원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쁘라윗 차기 총리 가능성을 높이는 근거가 된다.
만일 프어타이당 주도의 연정이 실패하게 되면 제3당인 픔짜이타이당(71석, 68/3)이 중심이 된 총리선출과 연립정부 구성도 가능할 수 있다. 품짜이타이당은 원래 탁신계 정당인 타이락타이당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정당이다. 품짜이타이당 대표인 아누틴은 차기 총리로 다크호스가 될 수도 있는 인물이라는 평이 많았다. 그는 부총리 겸 보건부 장관을 겸직하면서 의료용 대마초 재배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유명해졌다. 품짜이타이당은 중도정당으로의 적절한 자리매김이나 정치적 양극화를 지양하는 정책 등이 호응을 얻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솔로몬’ 되나?
팔랑프라차랏당의 쁘라윗 대표가 주도하는 소수 정부가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구여권이 188석을 확보하고 있으니 상원 250석 지지를 받으면 충분히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이 경우에 프어타이당은 까우끌라이당과 함께 야당 대열에 서게 되는 구도이다, 하지만 하원에서 과반의석을 차지하지 못 한 채로 연정을 구성하는 것은 정상적이지 못하다. 법안 처리가 어렵고, 야권의 불신임 투표 등으로 의회 조기해산 가능성이 커지며 정치 불안이 심화할 것이 뻔하다. 더구나 지금과 같이 정치사회 변화에 대한 유권자들의 열망이 폭발적인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현재 헌재가 까우끌라이당과 관련해서 심리 중인 사건들이 유죄판결이 나서 피타 대표의 의원직이 상실되고 정당이 해산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소수 정부 구성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총리선출과 관련해서는 현재 각 정당에서 추천한 인사 외에도 외부인사를 영입하는 방법도 있다. 헌법 272조는 정당의 총리 후보가 아닌 외부인의 지명을 허용하고 있는데 양원 국회의원 중 최소 3분의 2(500표)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총리선출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열쇠는 헌법재판소가 쥐고 있다. 8월 3일 헌법재판소는 총리선출 2차 투표 무산과 관련한 위헌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청원을 받아들일지에 관한 결정을 연기했다. 그리고 8월 16일 회의에서 청원 수락 여부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정이 나고 프어타이당이 추진하는 연정 구성이 성공하면 추천 후보에 대한 국회 투표가 조만간 추진되겠지만 청원이 받아들여지는 경우 총리선출은 또다시 한동안 네버엔딩 스토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