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세안의 접점
작성자 | 정 호 재 bradelview@naver.com
미얀마와 한국은 닮은 점이 많은 나라다. 특히 현대사는 무척이나 흡사한데, 식민지 경험과 독립을 위한 노력, 그리고 군부독재와 민주화 투쟁까지도 마치 쌍둥이처럼 엇비슷하다.
이 같은 공통 기억을 갖고 있는 이유는 두 나라가 각 지역에서 갖는 지정학적인 중요도 때문일 수도 있다. 특히 중국과 국경을 맞대면서 대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미얀마가 아시아의 양대 축인 중국과 인도의 중간지대에 있다면, 한국은 중국과 미일 세력의 중간지대에 위치했다는 점이 그렇다.
여기서 파생되는 부수적 공통점이 한 가지가 있는데, 아시아에서 '유이(唯二)'하게 미얀마와 한국만이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물론 과한 억측일 수도 있지만, 강대국 출신 인물은 무조건 사무총장 후보에서 배제되는 국제정치의 관례상, 상대적으로 넓고 깊은 외교경험을 쌓을 수 있는 지정학적 중요도가 큰 나라 출신 인물이 국제무대에서 유리한 점은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의 외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2006~2016)이 아시아가 배출한 두 번째 유엔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인물의 이름을 대라면 상당히 답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렇다. 우 딴트(1909-1974) 제3대 유엔 총장(1961-1971)이 그 주인공이다. 랑군 대학 재학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1948년, 만 39세의 나이로 내각의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신생독립국 버마국의 지도자로 경력을 쌓은 뒤 1961년, 만 52세의 나이로 유색인종 최초의 국제기구 지도자가 된 인물이다.
미국과 소련이 극심하게 대립하던 냉전 시대에 유엔이 이에 휘둘리지 않고 인권과 약소국의 주권수호에 도움을 주는 방향을 잡는데 일조한 그는, 오늘날까지도 가장 성공적인 유엔 사무총장의 롤모델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뼛속까지 불교도인 아시아인이었고, 모국의 군부독재를 비판하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1974년 그가 사망하고 그의 유해가 고국에 돌아오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수만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국장(國葬)’을 거부한 군부에 항의하고 결국 이 같은 움직임은 이후 지속된 전국적인 시민운동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미얀마의 "지정학적 가치"
앞서 언급한 대로 최근 미얀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이유에는 이 땅이 가진 천문학적 가치의 지정학적 요인이 한몫한다.
그런데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표현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맹점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좋은 의미가 대부분이지만 반대로 이는 강대국이 아니라는 뜻이고,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여러 강대국들이 탐을 내기에 결국 ‘화약고’가 될 운명도 상존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과거 버마나 한반도(특히 북한)나 강대국들의 여러 외침을 받고 이로 인한 반작용으로 장기간 ‘고립’된 시기를 겪어야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하다.
19세기 초 인도지배를 꿈꿨던 영국함대는 벵골만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인도 정벌에 앞서 미얀마까지 정복했다. 그렇게 미얀마는 독립왕국의 위상을 잃고 대영제국 식민지 말석의 자리로 격하됐던 아픔이 있다.
1940년대에는 대동아 공영권을 꿈꾼 일본제국의 가장 최전선으로 영국과 대치했던 지역이자, 21세기에는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의 핵심적인 지역으로 중국의 인도양 진출의 핵심루트가 되었다.
오늘날 미얀마는 자체 인구만 5300만 명 이상의 신흥시장이자, 세계 3대 인구밀집 지역인 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세안(ASEAN)이 만나는 지역의 광활한 평지와 항구를 갖고 있는 잠재력이 큰 지역으로 분류된다. 국제정치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전략적 요충지라는 가치가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지정학적인 가치는 역사가 증명하지만 현재에 와서도 그 절묘한 위치로 인해 여러모로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중이다. 후발주자인 한국의 입장에서도 한 번쯤 곱씹어 볼만한 대목이다. 과거의 아픔은 현재는 미얀마가 지닌 소중한 전략적 자원으로 탈바꿈하기도 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주요 열강들과의 관계를 통해 미얀마의 지정학적 위치를 재조명해 본다.
1) 영국이 미얀마를 점령한 이유...인도-중국 잇는내륙 '중계무역' 요충지
미얀마의 전략적 가치는 인도와 중국을 잇는 내륙 ‘중계무역’의 요충지라는 사실이 크다.
18세기 당시 해양제국 영국은 인도와 인도양을 지배하기 위해 미얀마의 해안지역 점령의 필요성으로 인해 미얀마와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18세기 끝자락에 아예 북부의 내륙왕국까지 완전히 정벌해 버리고 만다.
복잡한 국제질서가 배경에 깔리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미얀마의 북부왕국이 인도와 중국을 잇는 유일한 무역로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재배한 차, 아편, 섬유 등을 중국 대륙에 내다 팔기 위해서 영국은 이 교역로가 절실했고, 이를 다른 유럽의 열강에게 빼앗길 경우 손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전략적 위상은 2차 대전 전후에도 지속됐다. 1937년에 건설이 시작된 ‘버마 로드’는 충칭으로 퇴각한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후원하기 위한 서구세계의 거의 유일한 보급로였다.
영국의 식민지를 길게는 100년, 짧게는 50년 넘게 경험한 미얀마는 군부독재시절 이 서구열강과의 관계를 끊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외국인 사업체를 빼앗아 모두 국유화하는 것에서 시작해, 마치 독립한 남북한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듯, 미얀마 역시 50년 넘게 영국의 식민지 잔재청소에 열을 올렸다.
그럼에도 영국과 서구 열강의 영향력은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고 사실상 아웅산 수치 여사의 민주화 운동을 후원한 최대의 세력이 영국과 미국 등의 영연방 국가들이었다. 1991년의 노벨평화상 수여는 그러한 미얀마를 향한 서방세계의 관심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한때 영어가 지식인의 공용어였던 나라인 탓에 영어의 습득력이 빠른 것은 물론이고 서구의 문화에 대한 흡수력도 여타 아시아 국가들과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발빠르다. 최근에는 프랑스와 독일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특징이다.
▲ 미얀마는 중국 대륙에서 인도양으로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다. 현재도 가스와 천연자원은 물론이고 각종 공산품들이 이 육로를 타고 교역이 된다.
큰 손, 일본의 존재감
일본은 미얀마와 이웃한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미얀마의 가장 큰 특수관계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2년부터 패망 때까지 실제로 미얀마라는 나라를 직접 경영하며 최하위 행정구역과 자원지도까지 일일이 다 챙긴 것은 유명한 얘기다. 현재도 일본은 미얀마 투자의 가장 큰 손 가운데 하나다. 5년간 10조 원 가량의 투자를 진행할 정도로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꾸준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이 미얀마의 관계는 1941년 일본의 군부가 아웅산 장군을 비롯한 미얀마의 독립운동가 30명을 중국의 하이난다오 섬으로 초빙해 군사훈련을 한 데서 비롯한다.
일찌감치 중국 포위망의 핵심지역이자 인도 진출의 길목으로 미얀마를 주목하고 반영 독립단체에게 군사훈련과 무기를 쥐어주고 대동아 공영권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실제로 아웅산 장군을 비롯한 미얀마의 젊은 지도자들은 일본군 군복과 흡사한 디자인의 군복을 입고 영국으로 날아가 독립협상을 벌일 정도였고, 독립한 이후에도 상당히 끈끈한 관계를 지속해왔다.
오늘날에도 일본이 미얀마에 쏟는 정성과 애정공세는 유명하다. 장기적으로는 태국과 베트남을 대체할 일본의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여기는 눈치다.
실제 미얀마의 주요 금융시스템은 전부 일본에서 전수한 것이다. 띨라와 공업단지에는 도요타 공장 등 수많은 제조업체들이 일찌감치 미얀마 현지업체와 손잡고 일제 기술과 자본을 이식하려고 시도중이다. 미얀마 젊은이들에게도 ‘일본어’는 영어에 버금가는 두 번째 인기 언어인 것도 현실이다.
3) 국경을 맞댄 중국의 '러브콜'
북한과 미얀마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중국과의 복잡하지만 미묘한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겉으로는 ‘반중(反中)’을 외치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공급망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경을 맞댄 사이인 만큼 역사적으로나 민족적으로 간단하게 상대방이 구분이 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중국의 경제력이 급속히 커진 1980년대 이후의 미얀마 경제는 중국의 의존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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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주요도시 어느 곳에 가더라도 ‘윈난회관(雲南會館)’이라는 간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미얀마와 국경을 접한 윈난성 출신들이 상부상조하는 일종의 상공회의소라고 말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 전역에 그토록 많은 화교들이 경제권을 휘어잡고 있는데, 미얀마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특히 군부독재 시절 양곤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화교들의 경제활동은 상당 부분 억제됐지만, 미얀마의 북부지역에선 이 같은 조치가 별 효과가 없었다.
특히 미얀마가 서방세계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한 1990년대 이후는 그야말로 중국의 공산품이 미얀마를 싹쓸이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다. 아예 가스와 보석 등의 천연자원은 물론 유통망까지도 중국인이 사실상 주도권을 잡는 상태까지 됐다.
2012~2014년 전세계를 깜짝 놀래킨 ‘미얀마의 부동산 폭등’ 역시도 중국계 자본이 주도한 거품이기도 했다. 현재도 일대일로 특수를 노린 수많은 중국계 자본과 청년들이 미얀마로 적잖게 유입이 되고 있다. 특히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을 펼치는 중국에게 미얀마는 파키스탄과 함께 인도양으로 나아가는 전략적 요충지가 된다. 미얀마를 절대 다른 열강에 빼앗길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미얀마 내부의 정치잡음과는 별개로 미얀마의 지정학적 가치의 현실화를 위한 세계 열강들의 각축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거세지는 것은 분명한 셈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