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레닌주의 지속 or 부패 극복?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경제권이 베트남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한국 기업에도 베트남은 이미 최고의 투자처로 떠올랐다. 동북아와 동남아의 접점에 있는 베트남은 우수한 인력과 낮은 생산비, 지리적 근접성, 게다가 내수 인구도 1억에 달해 미·중 갈등 국면을 타개할 구세주에 가깝다는 평가다.
모든 게 완벽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미심쩍은 대목도 적지 않다. 한국인이 선뜻 이해하기 힘든 폐쇄적 관료제도와 그리고 말단 공직자들에게까지 만연한 부패 문제 등이다. 베트남에 장기 거주해본 한국인이라면 십수 년째 지지부진한 SOC 인프라 건설과 일방적 행정 및 정치행태에 속을 썩인 경험을 갖기 마련이다.
응우옌 쑤언 푹 실각
52세의 새 얼굴 등장
지난 3월 2일 전 세계를 놀랜 빅뉴스가 전해졌다. 권력 서열 2위의 국가주석 자리에 보 반 트엉(52) 공산당 상임서기가 발탁돼 의회의 승인을 받은 것이다. 그는 지난해 한-베 수교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 한덕수 총리를 만나고 돌아갔는데, 이정도로 빠르게 최고 권력자로 변신하리라곤 예측하지 못했다. 현재 베트남 최고 권력자인 응우옌 푸 쫑서기장(78)과 올 초에 실각한 쑤언 푹 전 국가주석(68)의 나이를 고려하면 순식간에 20년 정도의 세대교체를 이뤄지며 본격적인 전후세대 정치를 개막한 셈이다.
트엉 신임 주석은 1970년생으로 남부 경제도시 호찌민에서 청년 당조직을 중심으로 정치 이력을 쌓아온 것이 특징이다.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2016년 46세 때로, 당시 최연소 정치국 위원으로 데뷔해 최근까지 주로 선전 부문과 청년 관련 장관직을 맡아왔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베트남은 분단의 역사 때문에 북부 출신은 주로 ‘당성(黨性)’이 강조되고 남부 출신은 ‘경제통’으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신임 트엉 주석은 남부 호찌민 대학 철학과 시절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집중한 점이 특징이다. 그를 전격 발탁한 쫑서기장 역시 소련과 중국의 사회과학원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연구한 이론가 출신이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부패와의 전쟁
쫑서기장은 지난 수년간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해이해진 당과 행정부를 개혁하기 위한 고강도의 반부패 운동을 펼쳐왔고, 최근엔 코로나 기간 중 백신 수입비리 등 행정부 만연한 부패에 대해 강력한 사정의 칼날을 휘둘렀다. 그 결과 지난해 팜빈민 부총리가 물러났고 보건부 장관(응우옌 타인 롱), 하노이 당위원장(추 응옥 아인)이 체포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외교부 고위인사 대부분이 사정의 대상이 되었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 결과적으로 쑤언 푹 국가주석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차세대의 핵심인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생 정치인이 대거 숙청되기도 했다. 쫑서기장은 이참에 만연한 부패의 고리를 끊기 위해 1970년생 50대 초반의 수도 하노이가 아닌 호찌민시 출신의 공산주의 이론가를 발탁하는 ‘정풍(整風)’운동에 나선 것이라는 게 외교가의 분석이다. 실제 신임 주석은 “외국에 땅을 파는 일은 없다”(2018), “마르크스-레닌 철학과 호찌민 사상의 역할을 명확히 해야”(2020), “2045년까지 베트남은 완전하고 현대적인 사회주의 이론체계를 가져야”(2021) 등 공산주의 지도자로서의 선명성을 앞세워왔다.
여전한 레닌주의
지금도 베트남 곳곳에서 수많은 러시아 관광객과 소련 시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979년 중국과 국경분쟁이 시작되자 전략적으로 친소정책을 편 결과이자 1920~1930년대에 베트남 혁명가들은 소련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접한 역사적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도 베트남 정부는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레닌주의’ 전통’을 충실히 실천하는 나라로 손꼽힌다. 최고 지도부에 의사 결정 권한이 집중된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는 것도 일종의 레닌이 주창한 ‘민주집중제’의 영향이다.
이밖에 정치 권력이 1인으로 집중되는 게 아니라 당서기장, 국가주석, 총리, 국회의장 등으로 분산돼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된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이로 인해 당과 행정부 그리고 의회가 서로 견제하며 책임 있는 정치를 펼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뚜렷한 주도 세력이 없으면 부패 경쟁을 벌이며 지리멸렬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쫑서기장은 2011년 취임 이후 적잖은 당 간부와 재계 지도자들을 체포한 반부패 캠페인을 주도하며 개혁을 이끌어 왔다. 2016년 베트남의 대표적인 시장주의자인 응우옌 딴 중(Nguyễn Tấn Dũng)을 부패 혐의로 실각시킨 것이 대표적. 하지만 그의 독선적 정치행태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그간 횡령, 뇌물 수수, 권력 남용 등에 대한 처벌은 계속되었지만, 체감 부패가 줄지 않았기에 대중의 광범위한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전시행정이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연간 7% 이상 성장”
이번 신임 주석의 등장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워낙 혁신적인 인사였던 탓에 혹시나 그의 배경에 공산당과 깊은 인연이 있을 것이라는 뜬소문도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오로지 당에 대한 충성심과 개혁 의지가 인정을 받았다는 평가다.
결국 이번 세대교체 결정은 쫑서기장을 중심으로 한 원로그룹의 결단으로 해석된다. 급성장하고 있는 베트남 경제로 인해 마음이 콩밭으로 향하고 있는 고위 관료와 군인집단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내부규율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회복으로 공산당을 다시금 혁신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권력이 분산된 베트남에서 쫑서기장은 이미 세 번째 연임이기에 은퇴가 예고된 상황. 그런데 자신의 분신이 될 후계자를 선정하면서 수많은 경쟁자를 뿌리치고, 무려 28살이나 어린, 그것도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한 새얼굴을 골랐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이는 베트남 지도부가 뿌리깊은 부패와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고육책이자 자기 개혁 의지로 읽기히 때문이다.
1986년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시작한 베트남은 연간 GDP 성장률 7% 이상과 2020년까지 중진국, 통일 60주년인 2035년까지 중상 선진국 달성을 공공연한 목표로 밝혀왔다. 코로나라는 악재로 잠시 주춤했지만 실제로 2022년 8%대의 GDP 성장률을 이끈 베트남은 올해도 지난해와 유사한 6.7~7.2%의 고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또 1인당 국민소득은 올해 5천 달러를 넘길 것이 확실시된다. 과연 베트남은 이웃한 아세안 국가들이 빠졌던 “부패로 인한 중진국의 함정”을 인사 혁신으로 넘어설 수 있을지, 이번 세대교체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