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시아' 개념의 중요성과 저널리즘 역할

○아시아를, 이야기 주제로 삼아야하는 이유
○정세분석이란, 나와 연계성을 이해하는 과정
○지역에 대한 이해를 넓혀하는 게 저널리즘의 역할

글 | 정호재

2020년 10월 10일


필자의 관심 주제는 주로 “아시아”가 만들어 진 과정에 관한 것인데, 특별히 동남아시아의 눈을 통해 비친 아시아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 역시 얼마나 넓고 깊은가. 간단한 수치만 봐도 10여개 국가와 6억 명 이상의 인구가 사는 지역이다. 그래서 한국과의 비교의 포인트이자 기준점으로 삼은 지역이 과거의 버마, 오늘날의 미얀마가 된다.

근래 필자의 코스워크가 끝나서 이리저리 논문이라는 것을 써보기 시작했는데, 주로 학술지를 읽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산자로 입장이 바뀌면서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겪기 시작했다. 이른바 “학술적 글쓰기”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차이에 관한 내용이다. 아무래도 형식과 내용에 뚜렷한 제약이 적은 저널리즘 분야에서 일했기 때문인지, 첫 논문심사부터 여러 날선 지적을 받게됐다. 예를들어 “전반적으로 저널리즘적 표현이 많고 그러한 기술방식을 취한게 문제”, “조작적 정의의 엄밀성이 떨어짐”, “연구의 목적이 분명치 않음”…. 쉽사리 고칠 엄두도 못낼 정도로 호된 질책을 당한 것이다.

지역area에 대한 이해

동남아 지역을 어떻게든 이해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니, 그 어려움을 초래한 구조적인 이유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째서 한국인에게 동남아는 어려울까? 이 주제는 개인적인 한계는 물론이고 특정지역을 살핌에 있어 우리 공동체의 한계라는, 조금은 보편적 담론으로 확대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제 3세계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영국인에게도 어렵고, 일본인도 마찬가지고, 이는 미국인이라고 쉬운게 아니다. 한국인에게만 특출난 난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현시기 한국인에겐 특히 더 어렵다고 느낀다.

그 이유를 탐구해 본다면, 첫 번째로 역사적 친밀도의 차이일 것이다.

우선 한중일 동아시아권은 공통의 역사와 문화라는게 있다. 서로를 알아야 우리 역사를 알 수 있기에 상보相補적이다. 한국사를 배우면서 중국의 왕조를 살펴볼 기회가 있고, 임진왜란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시대를 통해선 일본의 발빠른 서구화 과정에 대해 자연스레 알게된다. 불교, 유교 및 도교라는 공통의 사상적 기반에 대해서도 익숙하고 잦은 교류와 전쟁을 통해서도 대략은 실체적 느낌도 있다. 중국식 고사성어와 일본식 한자조어만 훓어봐도 한 특럭 분량의 기본상식은 갖게 되는 것이다.

서양의 경우 근대화 이후 한국이 마땅히 배워야할 상대였다. 한국인의 영어콤플렉스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낯설고 우월한 힘에 대한 주눅에 가깝다. 거의 모든 대학에서 배출되는 무수한 인문학도와 사회과학도는 적어도 15세기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역사와 문화사에 대해서 차근차근 배우며 서구문명의 저변을 이땅에 넓혀왔다. 특히나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 이후의 근세사는 한국 지식인들에게 필수 교양에 속한다. 한국인도 프랑스의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계급의 의미와 국가의 역할에 대해 논할 수 있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을 통해서 경제이론의 토대를 쌓는다. 그게 바로 서양 문명의 힘, 상식의 힘이다.

반면, 동남아시아라는 지역은 이 두 가지 카테고리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 서있다. 어디를 둘러봐도 한국서 동남아시아가 상식으로 대접받던 시기도 없었고, 그럴만한 공간적 여유도 없었다. 남쪽 아시아의 역사적 인물이 한국에 영향을 끼친게 단 두 번의 시기인데, 첫째는 기원전 3세기 인도에 살았다는 불교왕 아소카 대왕이고, 둘째는 20세기 초반 일본을 오가며 한국에 특별한 인상을 남긴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다. 물론 마하트마 간디도 여기에 포함되지만, 이 둘은 동시기 인물이기에 하나로 묶었다.

인도를 제외하곤 한국에 특별한 인상을 남긴 남쪽 국가는 1970년대 베트남 정도에 불과하고 그러한 관심 역시도 피튀기는 전쟁사 수준에 그칠뿐,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진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는 멀고도 아주 먼 남과 다름없는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2. 신新세계에 대한 3가지 지식층위

한 지역이 다른 지역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대략 3가지 단계의 지식의 상호작용이 요구된다. 크게 세가지 범주인데, 1)체험적 접근 2)저널리즘적 접근 3)학술적 접근이 바로 그것이다. 이 3가지 지식에 어떤 우위나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관계일 것이다.

첫 번째인 경험적/실용적 접근이란 탐험가들의 답사기, 여행기, 체험기 등으로 요약된다. 프론티어들이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경험하면서 얻는 날 것 그대로의 지식이다. 단순히 여행정보로 한정짓지 말고, 선교사나 기업인 외교관 등 모든 직업군에서 겪는 타문화와의 직접적인 소통 및 갈등을 포괄하는 모든 기록물을 뜻한다고 보면 좋겠다. 고수들의 여행기엔 단순히 박물기적 정보만 담기는 것만도 아니다. 박지원의 청나라 답사기인 『열하일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한국을 서양에 소개한 『하멜표류기』는 역사의 한 부분이 된 사례다. 이런 저작은 고국의 대중과 정치인에게 지적인 즐거움과 탐험에 대한 욕구를 고양시키며 이후 펼쳐질 본격적인 상호관계의 토대를 이루는 아주 충요한 초기 데이터가 된다.

잠시 두 번째는 건너 뛰고, 세 번째인 학술적 접근이라 함은, 주로 학자들이 취하는 방법이다. 쉽게 말해 논문을 쓰는 거다. 연구자에게 가장 중요한 대목은 당연히 개념과 이론이며,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학제學制적인 구분이 줄기를 이룬다. 기존 아카데미아의 체계인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지리학 등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이 있을테고, 생물학이나 지질학 생태학 등의 자연과학적인 접근 방법도 있다.

학술이라는 영역은 따지고 보면 “지식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낯선 신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하지만, 학수의 목적은 온 세상을 아우르는 이론理論과 새로운 개념이 주된 목적이 된다. 실용적인 정보 전달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보니 당연히 대중에겐 낯설기 마련이다. 게다가 학술지식은 현상보다 한참 늦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반면 학자들의 성취란 당연히 이론을 포함한 정치한 세계관 구축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영역도 된다. 한국인에게 동남아가 어렵게 다가오는 이유는, 주로 학자들에 의해 소개되고 안내된 이유도 일부 있다.

3. 아시아, 정세政勢 분석의 어려움

그렇다면, 이 글의 중심 주제인 두 번째 지식 ‘저널리즘적 접근’에 대한 소개를 해야할 차례다.

저널리즘은 일종의 “대중적 지식”을 말한다. Journalism이란 말 그대로 종이에 뭔가를 써서 최대한 많이 팔아먹으며 세상을 바꿔가는 ‘매체비즈니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지식의 요강은 무엇인가? 혹자는 ‘재미’라고도 하고, 혹자는 ‘의미 있는 팩트’라고도 하지만, 국제뉴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필자는 “정세분석”이라고 본다. 가장 대중적인 주제는 역시 ‘정치’이며, 독자에게 의미 있고 실감나는 정보는 “여러 세력 간의 역학 관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언론이 미국이나 일본에 관해서는 나름 수준높은 정세분석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유독 중국과 동남아에서는 그같은 역할을 해오지 못했다. 중국에 대해서 한국언론이 유의미한 정세분석에 실패해 온 이유는, 학계나 정부기관지 이외에 정치권 깊숙한 딥스로트deap throat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고, 보다 정확히는 중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남아시아의 경우는 이런 경우와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동남아 지역의 정세를 분석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거의 없었던 탓이 크다. 언론이 설령 틀린 정보를 주더라도 한국인 독자들이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정치경제적 득실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관심한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기자와 독자들 사이에 공유된 지식 자체가 남아있을 리 없다. 그 결과 매번 사건이 터지면 선진국 뉴스통신사인 AP, AFP, UPI, CNN, 블룸버그, 닛케이 등을 해석해 옮겨왔을 뿐이다.

4. 내러티브 입히기

대중적인 글쓰기의 실력이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특정 세력의 지도자급 인물에 대한 정교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경우다. 다르게 표현하면, 저널리즘이 특정 인물에게 어떤 내러티브를 입히는가다. 미디어에는 편집자, 즉 에디터가 존재하고, 이 직업은 기자와 매체의 종합적 판단을 사실 그 이면에 내러티브를 입혀 전달하는 직업이다. 더 쉽게 얘기하면, 누가 영웅이고 누가 악당인가를 가늠해 주는 역할이다.

저널리즘은 언제나 이런 과정을 통해 대중에게 정세분석의 최종 결론을 얘기한다. 미국의 CNN이 1990년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악당로 묘사하거나 버마의 아웅산 수찌 여사를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묘사한 데는 CNN이 포함된 문명권이 바라본 세계관이 반영된 중간 결론에 가깝다. 오늘날까지 미국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에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확산”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영미계 언론은 사담 후세인의 비인권적 정치행태를 파헤치고, 수찌 여사의 영웅적인 군부와의 투쟁을 집중 보도해 왔다.

2000년 이전, 냉전체제가 남아있던 시절에는 적과 아군이 뚜렷해 한국언론이 미국과 일본의 국제뉴스를 그대로 따라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제는 확연히 시대가 달라졌다. 한국의 독자적인 이해관계가 생겼고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당장 한반도의 문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를 넘어서 아시아 전체가 기존의 틀로는 우리의 이익과 지역의 평화를 담보하기 곤란한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예를들어, 2017년 미얀마의 소수민족인 로힝쟈Rohingya 사태 이후 미국과 서방언론은 아웅산 수찌에 대한 지지를 멈추고 비판적 논조로 갈아탄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문제해결을 위한 심모원려한 방법이 있다거나 수찌의 지나치게 심각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지나치게 컸던 기대가 실망으로 돌아선 것 뿐이다. 그런데, 한국 언론도 부화뇌동하듯이 곧바로 아웅산수찌에 대한 논조가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뚜렷한 근거도, 취재결과도 없는 형편이다.

5. 정세분석의 중요성

한국인에게 제3세계가 특별히 어려웠던 이유는 앞서 언급한 현장지식과 학술지식은 늘었지만, 제2의 지식인 저널리즘적인 접근이 턱없이 적고 서구에 의존했던 탓이다. 2010년 무렵까지 한국의 동남아 특파원은 공중파와 연합뉴스 중심으로 방콕과 자카르타, 호치민 정도에 그쳤고, 다행이라면 최근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 한국인 기자들이 부쩍늘었다는 점이다. 점차 동남아와 한국의 경제가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생겨난 것이다.

이 3가지 층위의 지식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현장 답사가와 대중의 지식이 없이 학술적인 분석의 유의미 할 수가 없다. 학자들이 여러 사건을 묶서 통일된 이론과 개념을 제시할 경우, 이는 다시 현장에서 방향을 읽고 헤매이는 프론티어에게 막강한 무기가 된다. 정보와 지식 그리고 이론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전적으로 상승작용을 거치는 셈이다.

앞서 결론 지었듯, 한국은 여전히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저널리즘적인 접근의 양이 절대부족한 상황이다. 현장에 투입된 모험가적 기업인들과 학자들만이 고군분투 하는 상황이다. 대중의 호기심을 끌어들일 수 있는 더 많은 정세분석가, 내러티브라는 당의정을 입혀 보다 자극적으로 그 지역의 스타를 알리고 악당을 간파할 수 있는 현장저널리스트들의 증대가 필수적이다. 동남아가 어려운 이유는, 절대로 독자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다. 한국의 언론계의 국제화가 덜 된 것도 한 이유가 된다.

PS.

1.<루뜨아시아>의 역할과 목표

2.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협업이 꼭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