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컨텐츠 발신자가 된 '아시아'
글 | 정호재
작성 | 2021년 7월
1978년도에 출간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란 책을 애정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오리엔트란 서양에서 '동양(東洋)'을 의미하는 말로 이 광활한 지역에 대한 서양의 지식 혹은 편견이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고 전개되었는 지를 촘촘하게 풀어낸 책이다. 출간 이후 반세기 넘게 아시아에 대한 하나의 대표적 사상으로 활용되어 왔다. 즉, 서양이 현대문명의 '주체'이며 동양은 일종의 '신비롭지만 열등한 객체'였다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아시아라는 개념이 전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배경에는 아주 여러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경제적인 역동성이 이미 서양에 근접했다는 것이 결정적 이유가 될 듯 싶다. 2020년 세계 경제규모만 따지고 볼때 이미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아시아 국가인, 중국/2위, 일본/3위, 인도/6위, 한국/10위 등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동남아 10개국 연합인 아세안/8~9위를 끼어 넣을 수 있다면 그 비중은 더욱 높아질 수도 있겠다. 과거 서구식민지 시절의 가난함과 무지함의 편견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
한류의 역할
얼마 전 종영한 송중기 주연의 tvN의 인기드라마 <빈센조>는 올 상반기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컨텐츠가 되었다. 과거와 크게 달라진 환경이란 '넷플릭스'와 ‘유튜브’라는 글로벌 플랫폼 덕분에 어느 지역에서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는지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게 된 것이다. 불과 5년 전만해도 객관적 통계 부족으로 “한류는 없다”라는 주장도 팽배했었다. 악을 응징하는 마피아 변호사를 전면에 내세운 이 한류드라마는 5월 초까지 동아시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드라마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일본에서부터 시작해서, 홍콩과 싱가폴 말레이시아를 거쳐 태국과 인도네시아까지 싹쓸이한 것이다.
사실 아시아 지역에서 한류드라마의 인기를 언급하는 일이 조금은 쑥스러운 일이 되었다. 당장 지난해만 해도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래스> <사이코지만 괜찮아> 등이 연달아 아시아 시장을 석권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시아 지역에서 미디어 콘텐츠의 재미와 완성도 측면에서 한국의 수준에 이른 나라를 찾기란 쉽지 않다. 사실 웬만한 국가체계를 갖춘 대부분 나라는 자국의 문화에 기반을 둔 방송산업을 갖고 있고, 기왕이면 외국 컨텐츠에 미디어 시장을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서 치열한 투자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최근 한류드라마, 영화, 케이팝의 선전은 아시아 수준을 뛰어넘은 글로벌 현상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한류의 경제적 역할보다, 지역을 창출하는 힘에 대해서는 과소평가된 측면이 없지 않다. 최근 많은 학자가 한류컨텐츠가 "아시아 지역 형성의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과거 독립 이후에는 주로 미국과 유럽의 방송콘텐츠가 아시아 지역을 장악해 전통문화와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면, 이제는 한국이라는 꽤나 적절한 ‘역할 모델’이 생겼다라는 찬사다. 한류는 지금도 사회문화적으로 극히 보수적인 이란, 미얀마, 인도네시아, 북한 등의 지역에서 파격적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 이유로는 전통을 크게 희생하지 않고도 현대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한국이라는 정치체제가 자국에 크게 위협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미국이나 중국, 일본과 같은 나라들의 대중문화는 장기적으로는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한국이 1997년까지 일본의 대중문화를 금지한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일본의 쇠락, 중국의 각성
필자 역시도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한류의 성장이 아시아인의 각성과 유럽에 비견되는 "현대 아시아"의 탄생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찬사이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과 경쟁자 역시 없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나라는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2016년 이후 한류를 적극적으로 통제한다는 '한한령(韓限令)'을 앞세우고 있는데, 여기에는 단지 문화적 이유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경제적인 배경도 작동한다. 한류에 내재한 서구지향적인 문화의 위험성도 우려도 있지만, 중화문명이 이제까지 지켜온 아시아에서 유지해온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안방 시장부터 한류컨텐츠에 내어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중국은 "아시아 = 중국문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국의 거대한 영토와 경제규모, 나아가 오랜 역사에 자부심이 큰 나라다. 심지어 나라밖 화교의 경제적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중국이 현재 진행중인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핵심은 유라시아 및 아프리카의 모든 길이 중국으로 통하게 만들겠다는 비전에서 비롯됐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의 대중문화 컨텐츠가 아시아 지역에서도 큰 변수가 없다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중국의 문화컨텐츠는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한류와 뚜렷한 경쟁 체제를 갖춘 것이 사실이다. 어디에나 중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적지 않고, 그들이 선호하는 중국적 컨텐츠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쇠락도 주목할만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GDP는 중국과 인도 등 여타 아시아 전체의 GDP와 엇비슷할 정도로 일본의 경제력은 아시아를 압도한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이를 활용해 1990년대까지 일본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제이팝이 아시아 전역에서 '첨단 유행'으로 활발하게 소비된 것이다. 하지만 한류의 붐과 동시에 찾아온 '일본의 쇠락'은 21세기 아시아의 커다란 징후적인 특징으로 꼽히기에 충분하다. 이에 대한 해석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본이 "아시아"를 그리 중히 다루지 않았다는 과거가 발목을 잡았다고 본다. 이미 1세기 전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국가비전을 내세우고, 아시아의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기 보다는, 서양문명을 따라하는 것에 관심이 더 컸기 때문이다.
아세안의 한류 따라잡기
아시아의 중요성이 날로 커짐에 따라 새롭게 주목할 지역이 바로 동남아시아(일명 ASEAN)다. 동남아 지역은 오랜 식민지배와 압도적인 자연환경 덕분에 지하자원은 많지만 경제발전이 쉽지 않은 지역으로 꼽혀왔다. 정치발전 역시 더뎠는데, 군부독재와 왕정체제가 민주주의의 발전을 막아왔다. 최근 벌어진 미얀마 쿠데타가 대표적이고, 태국과 캄보디아의 정치체제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이다. 또한 정치부패와 경제양극화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동남아 역시도 '아시아의 시대'라는 커다란 문명의 순환적 흐름의 동참하는 형국이다.
아시아 지역의 가장 큰 특수성이라 함은, 각 지역아마 대체할 수 없는 역사와 문화가 뿌리깊다는 얘기다. 수백년 넘게 서양세력이 동남아 지역을 지배하고 착취했음에도 끝내 자신들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남다른 개방성도 주목해야 할 특징이다. 수천년간 아시아 여러 지역의 문명―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무슬림, 기독교― 등이 차례차례 도착해서 차곡차곡 문화적인 전통과 역량을 쌓아왔다. 이는 동남아 지역의 문화적 역량의 크기를 설명하는 것으로, 한류가 왜 동남아 지역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지에 대한 한가지 설명도 된다. 외국의 좋은 문화에 대해, 여느 국가들처럼 크게 편견이 없이 개방성이 크다는 얘기가 된다.
아세안 각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활용한 컨텐츠도 당연히 한류와 더불어 해당국가나 지역에서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다. 물론 최근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는 한류 컨텐츠에 감화받고 모방한 측면도 없지 않다. 문화의 교류에 있어서 "모방"이라는 측면에 대해 특별하게 나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원래 대중문화는 국적을 부여하기가 어렵고,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면서, 발전시켜나가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은 모방은 아시아적인 동질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지역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다.
최근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베트남이 가장 대표적이고, 전통적인 동남아시아의 맹주국가인 태국과 인도네시아 역시, 자국의 문화컨텐츠의 발전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국가로 손꼽힌다. 이들 3개 국가들은, 자국의 음악과 영화 드라마에 대해서 크게 관세 장벽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특유의 저임금과 발빠른 문화적 감식력과 왕성한 소비력을 지닌 MZ세대를 발판으로 빠르게 자국의 문화경쟁력을 키우는 국가로 꼽힌다.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미래를 말할 때 꼭 빼놓지 말아야할 지역이 바로 남아시아의 맹주 인도다. 인도의 문화와 문명의 역사에 대해서는 여기서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는 없을 지 모른다. 인도는, 한국에서는 크게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지만, 한반도를 조금만 벗어나면 쉽사리 그 영향력을 쉽게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영화의 본거지로 불리는 볼리우드가 바로 인도의 특산품이나 다름 없다. 아시아의 핵심 참여자이지만, 워낙 독특한 문화로 쉽게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인도 역시도 최근 동아시아에 대한 높은 관심과, 특유의 영어문화 덕분에 빠르게 아시아 정체성의 주요 핵심으로 부각하고 있다.
아시아의 부흥
'오리엔탈리즘'이 주는 이미지는 앞서 설명한 대로 미스터리하고 정확하게 분석이 힘든 신비로운 존재로 묘사가 된다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태도는 아시아가 현대 경제체제와 동떨어진 무지몽매한 존재라는 얘긴데, 지금도 그런 환상을 갖고 계신 분들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아시아 시대란, 아시아의 생산력과 경제력이 유럽과 대등해지고 나아가 유럽을 뛰어넘어 미국과 함께 세계를 이끄는 역할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시아를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위해서 필요한 점은 아시아 지역간의 보다 적극적인 소통일 것이다. 유럽이 지금의 유럽으로 성장하기 까지는 1000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과 경쟁이 근간이 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시아는 과거에 뚜렷한 교류의 역사가 뒷받침 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시아 교류의 빈곤함을 최근 1세기 사이에 저렴해진 항공권과,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인터넷 미디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값싸고 압도적인 품질을 지닌 한류 컨텐츠가 아시아 부흥의 새로운 징후를 보여주기 시작했. 그러니까 현재 아시아는 차근차근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한류 성공의 밑바탕이 되었고, 아시아는 현재 한류의 많은 부분을 닮고 싶어하고 있다. 인종적인 특수성에 기반을 둔 중화권 문화와, 경제력을 활용한 일본의 문화상품 보다는, 보다 아시적인 보편성에 기반을 둔, 한국 컨텐츠가 아시아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 새로운 현실이 되어버린 셈이다.
PS.
1.한류는 아시아 지역의 집단적 부흥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2.미국이 만들어 낸 '세계화'라는 플랫폼의 장점 역시 인정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