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인니에서 가장 미움 받는 정치인, 아혹
O 인도네시아 차세대 정치인 특집 <1> 종만학, 혹은 아혹
O 차별 받던 화교 사업가에서, 위도도의 파트너이자 국가 혁신의 선봉장으로
O 2016년 이후 "신성모독" 정치파동의 주역, 인니 극우가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 1위
글 | 김 정 호 / 재在 인니사업가
작성일 | 2015년 7월 1일
인니 차세대 정치인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
인도네시아는, 한국에서 볼 때는 매일 같이 화산이 폭발하고, 비행기가 추락하고,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가는 나라에 불과하겠지만 이 사회에도 정치적 역동성이 존재한다. 특히 최근 몇년 사이에 소수이기는 하지만 개혁적 성향의 정치인들이 속속 주요 지자체장에 선출되면서 기득권 세력들의 독무대였던 정치권에 의미 있는 변화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리고자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 동네에도 박원순 시장, 이재명 시장, 안희정 지사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 와중에 많은 음해와 정치적 압 박에 시달리는 점도 비슷하다. 한국 보다는 시민사회의 성장이 상대적으로 더뎌서 정치적 지원세력이 극히 부족한 가운데 시민들의 지지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점도 흡사하다. 흥미롭게도 인도네시아의 차세대정치 인들은 주요 도시의 시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1위 도시 자카르타 Jakarta, 2위 도시 수라바야 Surabaya, 3위 도시 반둥 Bandung을 이끄는 민선 시장을다뤄보겠다. 그들이 펼쳐가는 시정은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인도네시아의 정치지형에 만만 찮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청년층과 많은 지식인들이 그 들에게열광하고 있다. 기득권층의 저항에 맞서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그들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게 된다.
아혹Ahok 혹은 종만학 鍾萬學
지금 인도네시아 국내 정치에서 가장 핫 한 인물은 메트로폴리탄 자카르타 주지 사인 아혹 Ahok을 꼽는데 이견이 없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혹이라는 이름 이 흔치 않은데 그것은 중국계 이름이기 때문이다. 본명은 바수끼 짜하야 뿌르나마 Basuki Cahaya Purnama로 중국 식 이름은 종만학鍾萬學이다. 그의 가족 은 중국식 아명인 아혹 Ahok 阿學으로 불렀는데 인도네시아 식 이름보다는 이 아명으로 더 자주 불리운다.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에서 불과 1.2%에 불과한 중국계는 완전 정 한지 백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정책적인 차별에 시달려왔다. 특히 독재자 수하르토 Suharto 대통령 시절에는 중국계에 대한 강제 동화 정책이 실행되어 한자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고, 화인(華人)을 위한 학교와 미디어도 다 문을 닫아야만 했다. 화인 특유의 단합으로 경 제 영역에서 만큼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정치계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아니 아예 정계 진출을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도 자카르타를 지키는 배트맨 인도네시아의 중국계에게는 아직도 여전히 상흔으로 남아있는 ‘1998년 5월 폭동’은 아혹의 가족도 비껴가지 않았다. 동남아시아를 휩쓸었던 IMF발 경제 위기로 촉발된 사흘간의 폭동은 자카르타와 그 일원에서 발생했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정권은 의도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돈을 다 갖고 있는 중국계가 경제 위기의 배후라는 식의 루머를 퍼뜨렸고 이는 군중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광기가 폭도들을 사로잡으면서 중국계들에 대한 대규모 강간과 린치로 이어졌다. 폭동의 결과로 철권 통치자였던 수하르토 대통령이 하야하고 본격적인 민주화가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중국계주지사 배출은 역설적으로 중국계가 큰 희생을 치렀던 ‘1998년5월 폭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서구 언론으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동시에 미움을 받는 주지사(the most loved and hated governor)”라는 별명을 얻은 아혹의 정치적 야망은 수마트라에 딸린 블리뚱 Belitung 섬에서부터 싹텄다. 가족 전체가 고등학교 때 고향을 떠나 자카르타에 정착한 후, 명문 뜨리삭띠 대학 Trisakti Univ.에 진학해서 지질학을 전공하고 경영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를 마친 후 고향에 다시 돌아가서 시작했던 광산업은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다.
돈이 좀 벌린다 싶자, 지역 공무원들이 뇌물을 요구하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다. 공무원들의 부패에 진절머리가 나 서 사업을 다 접고 외국으로 가려던 아혹을 막은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부패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차라리 그런 부패와 맞서 싸울 방법을 찾으라는 아버지의 충고에 정계 입문을 결심하게 된다.
2004년 지역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한 젊은 아혹은 금권 선거가 만연한 풍토에서 유권자들을 직접 접촉하며 니즈를 하 나하나 파악하는 선거운동으로 지역 정가에 기린아로 등장했다. 바로 다음 해에는 블리뚱 시장 선거에도 무난히 당선되었다. 지역에서 쌓은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2009년도 인도네시아 국회의원 총선 거에 도전해 당선되어 중앙 정치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40대 초반의 국회의원 아혹이 국회에 일으킨 바람은 신선했다. 블리뚱 지역 의회 의원 시절부터 아혹은 직설적인 문제 제기와 정책의 투명성으로 유명했는데 그것은 국회에 진출해서도 계속되었다. 국회의원들의 모든 의정 활동 내역과 심지어는 급여까지 하나도 빼지 말고 국회 홈페이지에 공개해야 한다는 법안을 제출해서 동료 의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인도네시아 국회의원들은 중요한의사 결정을 국회보다는 유명 휴양지의 최 고급 호텔에 묵으면서 하는 관행이 있다.
국회 예산의 거의 70%가 의원들의 이런 초호화판 의정 활동에 쓰이는데 아 혹은 여기에 제동을 건 것이다. 개혁적인 국회의원으로 명성을 날리면 서 당시 제1야당인 투쟁 민주당 PDI-P 소속으로 메트로폴리탄 자카르타 주지 사 선거에 출마하는 조꼬 위도도Joko Widodo 후보로부터 러닝 메이트가 되어달라는 러브콜을 받게 된다. 다른 정당 소속이었지만 의기투합한 조꼬 위도도-아혹 조합은 2012년에 임기5년의 주지사-부지사 선거에 출마한다.
예민한 이슈에 ‘정면 대결’
이 무렵 인도네시아 국회는 지자체장 선 거 비용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지자체장을 선거가 아니라 정당의 의석수별로 국 회가 지명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그린다 당 Partai Gerinda 소속 의원이었던 아 혹은 이 법안이 통과되면 지자체장은 아무리 지역 주민의 이익에 부합하더라도 당의 입장에 반하는 정책은결코 추진할 수 없게 된다며 반기를 든다.
자신이 속 했던 그린다 당도 이 법안에 찬성하자 아 예 당적을 스스로 포기해 버렸다. 이슬람계가 절대 다수인 인도네시아는 중국계이자 기독교인인 아혹에게 수도가 있는 메트로폴리탄 자카르타의 부지사 자리를 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선거 당시 상대편 후보로부터 중국계 부지사가 당선되면 ‘1998년 5월 폭동’이 재현될 수 있다는 공공연한 위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혹은 이런 협박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보란 듯이 중국 전통 의상을 입고 선거 캠페인을 벌였다. 선거 결과가 발표되자 과격파인 이슬람 수호전선 FPI, Islamic Defenders Front이 주도하는 폭력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으나 수도 자카르타에 새로운 개혁을 원하는 시민들 의 적극적인 지지로 취임에는 별 문제 가 없었다.
2014년7월에 있었던 제3회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에 조꼬 위도도 주지사가 출마해 당선되면서 아혹은 주지사직을 승계하게 된다. 수도를 이끄는 수장 이 되면서 아혹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색깔을지닌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한다.
자카르타는 지대가 낮아서 우기雨期가 되면 만성적인 홍수 문제에 시달린다. 도심을 흐르는 강 주변에 빈민들이 잔뜩 세운 무허가 가옥들이 배수를 방해한다고 판단한 아혹은, 무허가 가옥들을 대부분 철거하고 강을 깊이 파는 준설 작업을 계획한다. 이와중에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결국 실행에 옮겼고, 75개에 달하는 침수 지역 이 1년 만에 35개 지역으로 축소되면서 반대파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의 정책은 보수적인 인도네시아에서는 너무 앞서간다고 느껴질 정도로 진보적이다. 그 예로 청소년에 대한 성교육과 자카르타 특정 지역을 성매매 특구로 지정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국적을 불문하고 마약 밀매자들에게 사형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사형 제 반대를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마약 밀반입 혐의로 사형이 확정된 외국인 죄수들을 교도소에서 직접 면회하기도 했다.
무슬림이 절대 다수인인도네시아에서 매우 예민한 종교 문제를 건드리는 데에도 아혹은 거침이 없었다. 기독교인들의 예배 장소를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소수파 이슬람인 아흐마디야파 Ahmadiyah sect의 모스크를 새로 열도록 하고, 일종의 주민등록증인 KTP 카드의 종교란을 없애도록 하는 등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정책들을 거침없이 추진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를 정치의 길로 이 끈 것은 부패 및 관료주의의 폐해와 싸우겠다는 결심이었다. 그 일환으로 아혹은 자카르타 주 정부의 모든 행정을 인터넷에 다 공개해버렸다. 각종 인허가 과 정에서 공무원들이 수수료의 일부를 뇌 물로 받는 것이 당연시되어왔는데 그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국립은행의 해당 구좌에 직접 각종 수수료를 납입하도록 했다.
기득권층엔 가시 같은 존재 교통 안전과 치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혹의 정책도 과감하기 그지없다. 도로에서의 무단 쓰레기 투척, 무면허 운전, 불법주차, 오토바이 운전자 헬멧 미착용, 정거장 아닌 곳에서의 승합차 무단 정차 등을 시민들이 사진으로 찍어서 고발할 수 있도록 공식사이트tertiblantas.com를 만들었고 교통 경찰이 올라온 사진을 토대로 범칙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심지어는 우범지역의 치안 확보를 위해 경찰들이 잠복해 있다가 조폭이나 흉악범을 사살해도 좋다는 안건까지 만들어서 지지자들까지 우려하게 만들 정도였다.
기득권층의 눈엣가시 "이상주의자"
인도네시아 국민은 1등, 2등, 3등으로 구분되지 않고, 다수파와 소수파로 나뉘지도 않으며 모두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역설하는 정치적 이상주의자 아혹은 인도네시아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신선한 정치인이다. 한편으로 지나치게 앞서가서 정치적인 고립도 자초하고 있다. 소속한 정당이 없어서 정치적 우군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 그의 개혁적인 정책들이 얼마나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또 한 과감한개혁정책으로 인해 기득권층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반발과 저항은 거세지고 있다.
반면 불과 2년의 임기를 남긴 아혹이 재선에 성공해서 부패와의 전쟁을 계속 치르고 개혁을 완수하기를 바라는 시민들의 조직적인 지원도 갈수록 구체화되고 있다. 고담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과 홀 로 맞서 싸우는 배트맨을 자처하는 아혹은 진정으로 기득권층으로부터 가장 미 움을 받는 동시에 의식 있는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주지사임에 틀림없다. [계속]
PS.
1.이 글은 아혹이 구속을 반복하기 1년 전인 2015년에 작성된 글임.
2.자카르타 전 주지사 아혹Ahok은 인니의 극우세력이 가장 미워하는 정치인임. 한국의 조국 장관 표창장 사태와 흡사할 정도의 강력한 탄압을 오랜 기간 받았음.
3.인니 극우는 중국계인 화교계가 나라의 대표 정치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인종적 종교적(이슬람) 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 때문에 유능한 아혹이 타겟이 된 것임. 현재 아혹은 잠정적인 정계 은퇴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