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동남아 관점에서 본 싱가폴 체제: 중국, 아세안, 서방의 교차점
2023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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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 '정치체제'를 압축해 설명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1965년에 독립한 인구 400만 남짓의, 인민행동당(PAP)과 총리중심제 아래의 작은 도시국가 역시도 아시아 여타 국가들만큼 굴 곡이 적지 않다. 한국어로 된 싱가폴 설명은 주로 화교 이민자들의 "도전"과 "혁신" 측면에서 긍 정적 해설에 집중한다. 자연스레 한국 미디어는 싱가폴을 "현대적 도시국가" "스마트 강소국(强小 國)"으로 설명하는데, 이런 경향이 가속화되면서 아세안과는 다른 차원의 정치체제이자, 미래형 국가로 인식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싱가폴 역시도 "아세안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선 아 세안 정치체제를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들을 찾아서 적용해 보았다. 이러한 키워드로 설명이 되는 부분도 있고, 역시 도시국가에 1인당 GDP 8만 달러의 부자 나라인만큼 일치하지 않는 대목도 있 겠다.
1. 빤짜실라 (Pancasila)
빤자실라는 주로 인도네시아의 "포용성"을 상징하는 헌법 정신으로 유명하지만, 실은 말레이-브루 나이-싱가폴-인도네시아 등 "해양부 아세안" 정치체제의 핵심을 이루는 가치라고 보는 게 옳다. 싱가폴 역시 과거 인니 문화권이었고, 다종교 다문화 사회인 만큼, 이 "통합"의 가치, 즉 "빤짜실 라"를 크게 의식하고 지키려고 노력한다. 대표적인 게, 인종과 종교에 대한 엄격한 자유와 상호 존중이다. 싱가폴은 과거 인니-말레이 문화 권의 일부분이었고, 서양 세력이 점거했으며, 중국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왔기 때문에 "이슬람" 문 화와 "기독교" 그리고 "도교" 문화가 공존한다. 공무원이나 대학 입시에서도 "화교"가 독점하지 않 고, 인도계와 말레이계에 일정 부분을 양보하기도 한다. 총리는 화교가 해도, 대통령은 소수민족 에게 넘기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2. 부미푸트라 (Bhumiputra)
이는 주로 말레이시아의 핵심 정치 철학으로 알려졌는데, 이러한 "토착민 우대" 정책은 싱가폴에 서도 엇비슷한 맥락으로 통용이 된다. 즉, 싱가폴 국적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군대를 나 온 사람은 외국인 이주자와 비교해 "세금" 및 "각종 정부 혜택"에서 특혜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 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도 한데, 워낙 이민의 역사가 깊고, 지금도 이주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다. "토착민"을 어느 기준으로 보아야 하는 지 쟁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싱가폴 땅은 과거 말레이 술탄국의 땅이었고, 영국 군대와 동인도회사가 소유했으며, 지금은 대개 싱가폴 정부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수의 "말레이계"는 이 부미푸트라 철학은 자신 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중국계"는 당연히 화인이 싱가폴 주인이라고 여긴다.
3. 가산제 (Patrimonialism)
과거 중세시대 장자상속 제도가 대표적인 "家産制"의 한 형태다. 정치의 세습과 정당의 사유화 역 시 동남아와 남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퍼진 "패트리모니얼리즘"으로 볼 수 있을 듯싶다. 특히 싱가 폴은 "리콴유 집안"이 사실상 계몽군주이자 봉건영주라는 두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흥미롭 다. 리콴유(1923년생)는 사실상 싱가폴을 만들고 부흥시킨 창업1세대인데, 집권여당(PAP)를 강력한 1 당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경제참모들을 대거 싱가폴의 국영기업의 대주주로 만들면서 국가의 헤 게모니를 장악했다. 그의 유산은 아들 리센룽(1952년생)에게 갔고, 아마도 손자인 리홍이(Li Hongyi, 1987년생, MIT 졸업)에게 갈 가능성도 높다. 이러한 권력 대물림은 의외로 동남아에서 보 편적 현상이기도 하다.
4. 정실자본주의 (Crony Capitalism)
동남아의 '부정적(negative)' 현실을 묘사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패거리" 문화다. 앞서 "가산제"와 동떨어질 수 없는 정치 용어다. 우리도 1980년대에 "정경 유착"이라는 표현을 썼 는데, 딱 그 표현이고, 특히 정부 관료를 중심으로 "관급 공사"가 자신들의 친구(동기), 판검사, 귀 족가문, 재벌에게만 향하는 경향성을 일컫는다. 한국의 민주화란 정확히 표현하면 "정경유착"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민주주의와 시 장경제라는 건, 기왕이면 "실력"과 "아이디어"로 하자는 취지였는데, 인간 사회라는 건 사실 그렇 게 쉽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싱가폴은 좁은 사회인 만큼 "엘리트 독점"이 더 쉬운 나라다. 그런데 도 싱가폴은 "패거리"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그에 따른 부정부패를 극복하고 경제성장과 혁신을 이뤄낸 대목은 경탄이자 주요한 분석 대상이 된다.
5. 후견주의 (Clientelism)
그래서 싱가폴 정재계, 관계에선 "선배님"의 중요성은 결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이는 한국 사회와도 엇비슷한 측면이 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야, 거대한 집단, 혹은 세력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과거 아시아 의 군부와 공산당 체제가 대표적인 후견주의가 작동하는 집단이다. 선배가 선택한 인물이 차세대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절대적이었고, 이는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가산제" "정실자본주의"는 사실 후견주의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들은 정치와 경 제 공동체를 이룬다. 이런 사회에선 "은퇴"라는 건 없다. 죽어도 다시 아들과 딸을 통해 대를 이 어 기득권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봉건시대 "관료=귀족"이 일치되는 사회인데, 싱가폴 역시 후 견주의가 절대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다.
6. 이중 경제 (Dual Economy, Dual Society, Pluralism)
동남아 사회는 "중산층"이 없는 사회다. 이 얘기는 상류층과 하류층이 압도적이라는 얘기이고, 이 두 사회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고 서로 다른 경제체제를 이루며 굴러가게 된다. 정치가 통합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체제 유지를 위한 안정적인 경제 정책을 고집하기 때문이며, 동 시에 "전통의 삶"을 유지하는 로컬 주민의 삶이 그만큼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러한 이중경제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모두가 세금을 적게 내고, 정부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적 을 수밖에 없다. 의료보험도 취약하고, 복지 혜택 역시 별반 기대할 게 없다. 싱가폴은, 동남아 국 가 답게 이중경제 사회임에는 틀림없는데, 그나마 중산층이 가장 강한 국가로 분류가 된다.
7. 관영 미디어 (State media Oriented)
동남아 대부분이 미디어 발달이 덜 하다. 왜냐하면, 선거에 의한 엘리트 성장이 제한되어 있고, 양극화된 경제 때문에 서민층의 불만에 정부가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냉전의 영향도 큰데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에선 국영 언론이 대부분이다. 태국과 말레이 인니 같은 민주 정 국가에서도 대형 언론사는 대개 군부와 토지 재벌이 소유한 경우가 많아, 정부와 긴밀한 친연 성을 가진다. 싱가폴은 언론통제의 정도가 아세안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거센 국가다. 방송국과 신문사도 정부 가 간접 소유한 1방송국 1신문사 체제인데, 형식으로는 민족언어별 작은 신문사를 몇개 허용하는 것으로 면피를 하는 형국이다. 오래전부터 "정부 비판"을 하는 지식인, 블로거, 유튜버에 대한 통 제가 심했는데, 최근에는 체제 안정의 자신감 때문인지 서서히 '검열(censorship)'의 압력을 낮추는 모습도 보인다.
8. 호구제 (Hukou System)
호구제도는 아세안 전통과 관계가 없다. 물론 아시아에서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는 나라도 있지 만, 중국과 북한처럼 이주하기 힘든 나라도 적지 않다. 중국식 "호구戶口제도"는 싱가폴에서 반복 된다. 자신이 태어난 본적과 원적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일반적인 동남아는 땅이 넓고 인 구가 적기 때문에, 과거엔 땅보다는 사람이 더 귀한 대접을 받았던 전통을 갖고 있다. 요즘엔 상황이 달라졌다. 토지의 가격이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이주가 힘들어진 것이다.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하는 경우는 거의 빈민층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고향을 버리는 경우가 줄어든 것이다. 또한 동남아 대부분 상속세가 적기 때문에 부모님이 물려준 고향에서 사는 게 대부분이 다. 싱가폴은 극도로 좁은 도시국가이자, 통제의 편리함을 적용하기 쉽기 때문에 중국식 "호구제" 에 가까운 나라다. "집 주소"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모든 행정처리의 기본이 바로 "호구"가 된다.
9. 정치적 이슬람 (Political Islam)?
동남아 사회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특징이 "이슬람"이라는 강력한 정치조직의 존재감이다. 불교 국가에선 "불교"라고 바꿔서 생각해도 된다. 종교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 으로 강하다고 보면 된다. 일부 국가에선 "이슬람"은 주류 정당의 원천이며, 대개 제2 정당의 중 심 철학이 된다. 다만, 싱가폴에서는 종교 정당은 힘이 없으며, 취약한 시미사회가 "야당"의 역할 을 하고 있다.
10. 총평: 리콴유주의
싱가폴을 설명하기에 앞서 9가지 키워드는 불충분한 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핵심 키워드 가 무언지를 예전 글에서도 몇 번 적은 적이 있는데, 1) 리콴유 정신과 2) 미디어 없는 사회라는 대목이다. 이 두 가지 역시 연결이 되는데, 철인(哲人) 정치를 꿈꾸기 때문에, 혼란을 유발하고 정 제되지 않는 주장이 난무하는 "경쟁체제 미디어"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리콴유 정신이 쇠하고, 그 가치가 시대와 괴리될 때 쫌, 싱가폴은 쇠퇴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