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현대사, '폴 포트 평전'으로 보는 약소국 현대사의 찐한 서글픔
작성일 | 2023년 8월 30일
● 2023년 7월에 치러진 총선...훈센의 캄보디아 인민당 120석 석권
● 40년 총리 거친 훈센, 아들 훈 마넷에게 총리직 대물림 결정
● 친 비엣남과 친 중국을 넘어 이제는 친 미국까지 꿈꾸는 동남아시아의 저개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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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하철 출퇴근 길에 읽는 책은 2008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 된 《폴포트 평전》이라는 캄보디아 현대사다. 진보적 출판사인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다. 매끄러운 번역을 하신 분은 이혜선 님. 저자는 필립 쇼트Philip Short라는 영국계 저널리스트. BBC에서 오래 근무한 베테랑 기자인데, 기자 출신 작가들이 그렇듯 그는 마오쩌둥, 미테랑, 푸틴 등 주요 인물에 초점을 맞춘 현대사 서술에 매진했다.
이 책을 손에 넣은 건 대략 10년도 훌쩍 넘을 듯 싶다. 캄보디아 이해를 위해 야심만만 책장을 펼쳤다가 스무장도 채 읽지 못하고 책장에 쳐박아두고, 다시금 도전했다 실패하길 반복한 것이다. 이번에 싱가폴서 마지막 짐을 정리하다 "이젠 버려야지", 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마지막 심정으로 집어왔다.
책 제목에 어느 정도는 오류가 있다. 이 책은 "폴 포트(본명: 살토르 소르)"에 대한 전기적 기술이 아닌, 저널리스트가 취재해 종합한 캄보디아 현대사에 가깝다. 당연히 크메르루즈의 민주캄푸치아 설명이 많고, 폴포트 역할이 크니 그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평전" 까지는 절대 아니다. 평전이라 함은 그 인물을 중심으로 시대와 갈등하는 과정을 담아야 하지만, 거기까지 나아가진 못했다. 게다가 원제는《폴포트: 악몽의 해부》인데, 제목이 주는 무거움과 '평전' 이라는 어려운 컨셉 탓에 독자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알고보니 실천문학사가 "평전"으로 이름 높은 곳이었다고.
1. 복잡한 현대사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캄보디아에 대한 핵심적인 지식과 이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략 프랑스 식민지를 겪은 동남아의 작은 나라가 왕정 회복->친미 정권->공산당 혁명->친베트남 정권->친중 정권 으로 바뀌는 과정에 대한 편년체적인 지식이 가장 중요하다. 당연히 촛점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크메르루즈 집권기의 "킬링필드(Killing field)" 사건일 것이다.
이후 통일 베트남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중국이 크메르루즈를 적극 후원하자, 이에 용기가 충만해진 폴포트는 조국의 영토를 대거 앗아간 이웃 비엣남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당연히 약소국 캄보디아는 미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운 비엣남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킬링필드에서 자국의 국민이 다수 사망한 것에 분노한 비엣남 정부에 의해 프놈펜을 함락당하고 되레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후 1999년까지 북부 산악지대에서 일종의 빨치산으로 남았다가 훈센 정부에 진압되었다.
이 정도 편년체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 책을 소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캄보디아 현대사 이해를 위해선 이곳을 지배한, 프랑스, 중국, 비엣남의 혁명사를 연결지어 사고해야하기 때문이다. 특히 호찌민, 마오쩌둥, 김일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게다가 이웃한 태국 정세는 물론 1975년 막을 내린 미국-비엣남 전쟁에 대한 지식 역시 알고 있어야 한다. 즉, 약소국의 역사가 복잡하고 어려운 이유는 강대국 외교의 종속변수인 탓일 것이다.그러니까 10년 전에 이 책은 도저히 알아챌 수 없는 난해한 "인물"과 "사건"들로 점철된 암호문 같았기에 차마 진도가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읽기 힘들긴 매한가지지만 뒤적뒤적 읽다보면 이해할 정도는 된다. 배경 지식이 쌓인 덕분이다. 폴 포트를 직접 만나보지 못한 기자가 방대한 자료를 종합해 이런 책을 쓴 것도 대단하고, 어디서 어디까지 편향된 관점인 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출간된 자체가 멋진 책이다.
2. 약소국 비애
캄보디아나 미얀마 같은 동남아 약소국의 현대사를 읽을 때는 무의식 중에 '한반도'를 떠올린다. 특히 1900년대 한국 역사는 한반도 주위 4대 강국의 외교사와 교차해 읽어야 한다. 심지어 중국은 그 사이에 나라 주인이 4번 정도는 바뀌며 한반도의 상황을 더욱 꼬아 놓았다.
지난 100년간 한국의 정치 현상은 우리 내부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외부에서 주어진 압력에 따른 후폭풍이 압도적이다. 그러한 현상이 집약된 기간이 1900~1910년 무렵, 그리고 1945-1953년 두차례일 것이다. 중국-일본-러시아-미국의 간섭이 한반도에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그때마다 한반도 정세는 요동쳤다. 예를들어 1947년 무렵 장제스의 국민당이 공산당에 크게 밀리지 않았다면, 김구나 여운형이 초대 정부의 수반이 되었을 것이다. 대륙을 공산당이 지배하면서 친미 이승만에게 기회가 넘어간 것이다. 친일 세력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꾸준했고 말이다.
20세기 캄보디아 현대사 역시 국제적 역학 관계 속에서 아주 복잡하게 움직였다. 물론 캄보디아는 종속변수였을 뿐이었다. 프랑스 지배 기간 사이공 근처의 영토를 죄다 비엣남에 빼앗긴 것은,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3등 식민지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 1975년 북비엣이 통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혁명사업을 완수하자, 중국은 소비엣과 연결된 통일 비엣남이 부담스러웠고, 결과적으로 폴포트를 후원하면서 나라 운명이 꼬이게 된다 (중국이나 북한이나, 폴포트가 비엣남에 대항해주길 부추긴 거다).
3. 훈센, 가족 왕국
엊그제 캄보디아 총선이 있었다. 그 결과에 대해 전세계 언론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훈센의 아들 훈 마넷(Hun Manet)이 총리에 오른다는 보도가 전부다. 체념한 모양새다. 집권 여당이 총선에 승리를 했는데, 워낙 커다란 압승이라 숫자를 나열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 125개 선거구 가운데 120개 지역을 싹쓸이 한 것이다. 득표율은 78%. 야당 지도자 삼랑시는 진즉 불법화돼 쫓겨났고, 그 후예인 촛불당은 갖은 탄압 탓에 선거에 존재감이 없다.이쯤 되면 캄보디아가 훈센에 심리적으로 지배당하는 셈이다.
1979년 비엣남 군대가 프놈펜으로 진격했을 당시, 어영부영 26세의 나이로 일종의 크메르루즈 군대의 배신자 그룹으로 고향에 복귀한 훈센은, 전세계 최연소 외무장관직을 달고, 1981년엔 부총리를, 1985년 35살엔 총리직에 올라 그 뒤 권력을 놓지 않고 끝끝내 아들에게까지 물려주는, 희대의 괴물 정치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략 40년 가까이 총리직을 쥐고 있으니 사실상 "훈센 왕국"을 만든 셈이며, 별다른 이변이 없는한 이 왕국이 무너지기도 쉽지 않을 듯 싶다. 아들도 잘 생긴 훈남에다 미국에서 사관학교를 나왔다. 보다 결정적 이유는 캄보디아가, 비엣남의 심리적 속국이자,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삼중의 카스트 맨 끝에선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비엣남 입장에선 훈센이 그나마 편한 상대다.
4. "학살자"의 "독립 추구"
크메르루즈 군대의 학정과 실패는 상당히 널리 알려졌다. 이 책에선 학살극을 자세히 묘사하기 보다는 그러한 결정에 대한 내부적 동인과 외부적 환경을 묘사하는데 집중했다. 물론 중국이나 비엣남 모두, 처음엔 상황을 잘 모르고 있다가 도출된 결과에 대해 경악해야했다. 폴포트의 학살극은, 프랑스 혁명기 로베스피에로, 레닌의 러시아 혁명, 중국의 대약진 운동, 제3세계 반미 운동, 비엣남의 처절했던 독립운동사를 보고 배운 결과였다.하지만 변방의 맨 끝에서 "선배"들의 고충과 자신들의 "고난의 행군"에 너무 감정 이입되었던 건지, 아무런 견제 없이 무자비하게 이뤄지고 말았다. 100만 프놈펜 시민을 전부 소개(evacuation) 하여 이들을 집단농장에 몰아 넣고 "증산"을 강요한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엔 "먹물들도 노동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라는 복수의 감정이 어느정도 있었다는 것을 저자는 기록한다.
그런데 여타 서술과 다른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캄보디아가 처한 지정학적 한계에 대해서 말이다. 이 나라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강대국들에게 시달림을 받은 것이다. 태국과 비엣남 사이에 끼이고, 중국과 프랑스 미국이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해 먹었다. 나라의 비극은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 와중에 어찌저찌 독립을 꿈꾼, 시하누크와 폴포트는 이상주의 앞에서 우왕좌왕했고, 결국 나라를 파탄에 빠뜨린 것이다.
5. 독립과 종속
1980년 킬링필드가 끝나고도 캄보디아 내전은 1993년까지 지속됐다. 훈센이 권력을 강화한 계기는 폴포트의 학정과 더불어 비엣남이라는 "줄"을 잘 잡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2000년대 훈센은 "중국"이라는 또 하나의 줄을 잡아챈다. 결과적으로 캄보디아는 중국과 비엣남 모두의, 사실상의 식민지 역할로 전락한다. 독재자 훈센의 권력이 더 강화되었지만, 국민들의 삶이 비참해진 배경이다.
결국 약소국 정치라는 건 정치 리더들이 어느 강국과 더 친한가에 따라 결정이 된다. 한국 정치 역시 정권이 바뀜에 따라 "후견자"가 팍팍 뒤바뀌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많은 유권자들은 "이럴 줄 몰랐다"고 푸념하곤 하는데, 이럴 줄 몰랐다고 하는 게 더 충격적이다. 한국 정치는 내부의 정책 차이로 정치색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외부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끌려가는, 약소국임을 현 시국은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PS.
1. 이 책은, 폴 포트와 크메르루즈의 긍정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약소국이 독립국 지위를 얻기 위해선 얼마나 치밀하고 잘 준비되어야 하는지가 중요함을 보여주기도 하는 듯. 뭔가 해보려는 의지만으론 부족함.
2. 하지만 종속을 택한 결과는 고작 "훈센" 치하의 캄보디아임. 미래가 깜깜함.
3. 베트남 호치민 주석의 바통을 이어 받은 차기 국가 주석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 사람의 인생은? 이 질문에 5초 안에 대압이 나오지 않는다면, 여전이 이책은 암호책과 같은 수준의 어려운 내용이 될 지도. 애당초 한국인이 캄보디아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