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웅산 수찌의 실패 이끈 '다수결주의'와 '다극체제'의 등장
작성일 | 2023년 6월 27일
●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 '아웅산 수찌', 쿠데타를 막지 못한 비운의 지도자
● 1988년부터 미얀마 야당 사실상 지휘...노벨상의 폐해? 혹은 다수결주의 오류
●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에서 '정권 교체' 성취...다극체제가 펼쳐지자 마자 낙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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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아시아의 3대 민주주의 지도자라는 표현이 있었다. 2000년대 초까진 '김대중' '아웅산 수찌' '코라손 아키노'라는 쉬운 답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퇴색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란 개념이 상당히 '서구적'인 탓도 있을 듯싶다.
그래서 요즘엔 '덩샤오핑' '리콴유' '박정희' '마하티르' 등의 발전주의에 대한 평가가 후해진 느낌도 없지 않다. 그렇다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완전히 식은 건 또 아니다. 여전히 아시아의 '리더십'은 여러모로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자연스레 시민들도 판단의 기준이 때에 따라 오락가락하곤 한다. 대중은 민주적이면서도 권위적인 지도자를 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1. 수찌의 실패
아시아 민주주의 3대장 가운데 막내인 1945년생 아웅산 수찌는 한동안 아시아 민주주의의 최전선에 서 있는 '위대한 인물'로 통했다. 그는 주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에 비교되었는데, 수찌가 경험했던 16년에 이르는 가택연금 기간이 만델라의 27년 감옥형에 버금갔기 때문이다. 각종 역경과 고난에도 흔들림 없이 "비폭력 저항 노선"을 지킨 것도 서방세계에 큰 울림을 주었다.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사실상 "민주주의의 성인(聖人)" 지위에 오른 분인데, 안타깝게도 2016년 집권이후 평가는 그 전에 미치지 못했다. 로힝쟈 난민 이슈를 '애국주의 관점'으로 매몰차게 해석한 것이 대표적인 실책이자, 오랜 소수민족 갈등을 혁신적으로 접근하지도 못했다.
수찌의 더 큰 실책은 결과적으로 군부의 발호, 2021년 재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아쉽게도 수찌가 이런 오판을 내린 데는 "선거로 이기는 게 민주주의의 요체이다"라고 정치 자체를 단순하게 판단 내린 게 아닌가, 하는 비판이 제기된다. 일종의 "다수결주의 majoritarianism"의 함정에 빠졌다는 지적이다.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80%)를 얻은 것은 사실인데, 공권력을 장악한 군부를 통제하기엔 역부족이었다는 얘기다.
2. 노벨평화상의 폐해?
수찌에 대한 비판은 2005~2007년 무렵 미얀마 전문가들 사이에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포악한 군부정치에 대한 선명한 반대, 서방세계로부터의 확고한 지지, 조국 버마에 대한 대를 이은 사랑으로 무장한 것은 맞지만, 현실 정치를 타개해 나가는 "정치력"을 1988년 이후 20년 가까이 단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9년 시민과 학생들이 다시 한번의 거대한 봉기를 준비하자 수찌는 "나를 밟고 가라"면서 격렬하게 비폭력 노선을 주장했고, 1995년에는 군부와의 헌법 개정 협상테이블을 걷어 차고 나왔으며, 2000년대에는 끊임없이 서방세계에 "미얀마 경제제재"를 요구해 미얀마 나라경제가 사실상 파탄에 이르렀다는 비판이었다. 단 한 번도 군부와 협상테이블을 갖지 못하고, 선명한 불복종만 선언했으니, 정치적 해결 없이 강대강 무한 대치가 30년 이어진 것이다.
쿠데타로 실각 이후엔 보다 본격적으로 "수찌의 실패"에 대한 담론이 확산되고 있는데, "노벨상의 폐해"라거나, "다수결주의 오류", "영웅주의 오판" "비타협 노선의 실패" 등 여러 원인들이 지목되고 있다. 금기가 사라진 형국이다. 대개 수찌의 정치에 대한 평가는 결론이 난 것이다. 수찌의 긍정적인 대목이 분명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여러모로 씁쓸한 대목.
3. 외교주의, 이승만 노선
이미 1989년부터 수찌에 대한 버마 민주화 인사들의 비판적 평가가 기록되어 있긴 하다. 버마의 실정을 잘 모르고, 권위주의적인 데다가, 지나치게 '서구적'이라는 지적이다. Westernized, 즉 서구적이라는 지적은 조금은 이중적인데, 현대적인 정치 문법을 따른다는 표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서구 세력"에 의존적이라는 평가이기도 하다.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이 "서구"에 대한 느낌 역시 이중적이다. 잘사는 선진국이라는 존경의 눈빛과 함께, 우리를 착취해온 제국주의라는 적개심이 공존한다는 얘기다.
1990년대까지 버마는 고립상태였기 때문에 서방세력과 연결된 "수찌"는 그야말로 존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항공모함이 달려와 포악한 군부를 무찔러 주기를 바랬다는 얘기다.수찌의 정치 노선은 서방의 힘에 기댄 측면이 실제로 있었고, 1991년 노벨평화상은 버마 민중들의 환상을 가속화 시킨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수찌는 서방세계로부터 존경을 받기 때문에 분명 버마의 개방과 개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어찌보면 일제시대 이승만 노선과 흡사한 측면이 없지 않다.
4. 짧았던 미국의 시대
엄밀하게 검증되는 주장은 아니지만, 2021년 군부 쿠데타는, 미국 중심의 단극주의가 해체되는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주장이 더 간명하게 이해되기가 쉬워 보인다. 조심스레 얘기하면, 이 주장은 어디 논문에서 나온 얘기는 아니고, 미약하지만 필자의 어수룩한 생각에 가깝다. 미얀마 군부가 경제실패를 인정, 사실상 항복 선언과 함께 다당제 의회주의를 도입한 시점이 2008~2012년 무렵이다. 이 시기 미얀마는 정말 심각했는데, 서방의 경제제재로 인해 국가체제 자체가 너무 낡아버렸고 산업인프라 역시 여타 아시아에 비해 20년 넘게 뒤쳐지게 된다.
이 와중에 샤프론 혁명(2007), 태풍 나르기스(2008년)으로 인해 나라경제가 쑥대밭이 된 것이다. 당시 미국의 힘이 전세계를 휩쓰는 단극 시대(monopolarity)였는데, 미얀마 군부도 어쩔 수 없이 수찌와 서방세계의 힘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경제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해선 "다당제 의회제" 도입이 필요했고, 그 유일한 대안 세력이 수찌였다는 거다. 결국 수찌는 2015년 선거에 승리해 단독정부를 수립한다.
5. G2 시대, 쿠데타
그런데 2014년부터 묘한 분위기가 감지되는 데 바로 중국이 G2로 급부상하는 대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원래 버마는 불교식 사회주의를 택해 머나먼 쏘비엣과는 친밀한 관계를, 국경을 맞댄 중국과는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중국이 미국과 맞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대국으로 급성장하자 생각이 점차 바뀌게 된다.
실제로 2010년 이후 미얀마는 민주화를 위한 지정학적 요건이 그다지 용이하지 못했다. 우선 인도는 민주주의 국가라지만, 동쪽 소수민족 분리독립 움직임에 상당히 민감했다. 즉, 이웃한 미얀마가 군부독재인 게 차라리 편했다는 얘기다. 중국 역시 중국식사회주의 1당 독재였고. 심지어 이웃한 태국까지 2014년 이후 군부정권이 들어선다. 주위가 전부 미얀마의 '민주주의 정권'과 어색한 관계였던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과거 미국이나 영국이나, 직접 군대를 파견해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군사 작전"은 단 한번도 고려대상인 적이 없다. 서방 군대가 인도와 중국의 텃밭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웅산 수찌는 안보적으로 "고립" 된 것이다. 이 점을 간파한 군부는 2010년의 다당제 약속을 폐기하고, 2021년 쿠데타로 정권을 접수하고야 만다. 즉, 아웅산 수찌에게 주어진 시간은 미국 일극체제 시절의 10년뿐이었다는 얘기다.
PS.
1. 외교를 통한 민주화 운동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결국 국내에서 "실력 배양"이라는 키워드도 중요하다는 교훈
2. 아웅산 수찌가 전적으로 틀렸다는 데는 동의하지 못함. 하지만, 주변의 지정학적인 환경 악화를 고려해 군부와 권력을 분점하는 형식으로 위기를 타개해야 했다고 생각
3. 이런식으로 보면, 국가의 운명에 지리적 요인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을. 중국은 미얀마 쿠데타의 배후는 아닌데, 결과적으로 배후 느낌적 느낌의 역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