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오래가는 냉전, 팜응옥헌 콴키호이
O 북베트남 vs. 남베트남, 종전 반세기에도 불구한 냉전
O 콴키호이는 이미 자신의 모국과 화해
O 팜응옥헌 <뉴진스> 하니 역시 전쟁과 무관한 세대
글 | 정 호 재
작성일 | 2023년 3월 17일
1. 인디아나 존스, 그 꼬마
엊그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의 주역인 콴키호이(1971년생)는 한국의 X 세대에게는 추억이 스민 인물일거다. <구니스> <인디아나존스: 저주받은 사원>에 등장한 귀여운 중국 꼬마로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런 그가 양자경의 남편 역으로 <EEA>에 등장하자 크게 놀라야 했다. 어릴 적 귀여웠던 그가 어느새 나이를 먹어 이민자 아버지 역할로 나선 것이니, 세월의 무상함을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의 영어 이름은 Jonathan Ke Quan인데, 한국 언론도 베트남식 이름인 '키호이콴' 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성과 이름을 동양식으로 쓰면 Quan Kế Huy 가 되고, 실제 한자 이름도 關繼威(관계위)다. 동양식으로 부를거면 콴키호이, 가 맞다는 얘기다.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자체인데, 사이공에서 태어났지만 1975년 온가족이 보트난민이 되어 홍콩으로 건너가 그 유명한 홍콩의 수상난민촌에서 4년을 견디다 1979년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 짧은 기간에 영어와 무술을 배워서 1983년 영화에 데뷔한거니, 참으로 영특하다고 해야할런지.
2. 팜응옥헌, 하니
베트남 출신으로 일찌감치 해외에 알려진 이른바 "무비스타"들은 대개 남베트남 출신이다. 얼마 전 소개한 영화 1992 <인도차이나>의 린당 팜, 도 그렇고 <씨클로>의 짠누엔케 역시 마찬가지. 1990년대에 데뷔한 이 두 여성 스타는 사실상 프랑스가 키운 인물이다.
당시 남베트남의 상류층 인사들은 재빨리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나 미국으로 갈 수 있었고, 카톨릭 계열의 자유주의적 중산층 가문들은 어쩔 수 없이 허술한 보트라고 타고 무작정 도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당연히 남베트남 체제에 강하게 연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이 몰려오면 가족의 위험을 예감했기 때문. 이는 한국 전쟁 당시 1951년 북한 쪽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집안 가운데 요즘 인기 있는 <뉴진스>의 호주국적의 베트남인 팜응옥헌范玉欣 조부모도 끼어 있었다. 팜 하니(Hanni 2004년생)는 호주 멜버른 태생인데, 이곳은 아예 "사이공 거리"가 있을 정도로 베트남계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1975년 패망직후 약 200만명의 보트피플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데, 이가운데 6만 명이 호주로 건너와 멜버른을 중심으로 정착한 게 계기가 되었다고.
3. 비엣남의 비토?
케이팝 대세 걸그룹 <뉴진스>의 하니가 베트남계 인물이라는 뉴스는 빠르게 아시아 전역에 퍼졌고, 당연히 적잖은 비엣남 케이팝 팬과 언론들도 그녀의 가계를 추적하긴 했나 보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베트남판 위키나 인물정보에선 하니의 호주 관련 정보를 드러내놓고 강조하지는 않는 눈치다. 그러는 가운데, 이런저런 부정적 루머도 적잖이 퍼진 듯 싶다. 하니의 할아버지는 멜버른에서 "무술 관련" 도장을 운영하는데, 관련 페북에서 남베트남 관련 단체 깃발을 내걸었다던지, 하니의 외가는 매년 4월 25일 ANZAC 데이를 기념하는 글을 올렸다는 등의 비난 아닌 지적 등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호주군도 1960년대 비엣남전에 미군을 따라 참전했고, 호주에서 열린 전몰장병 기념일에 가족이 동참했다는 얘기다(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ANZAC) soldiers). 그러니까 비엣남 케이팝 팬들이 호주에서 온 비엣남 소녀의 가족 SNS를 살펴보니, 이 가족들이 남비엣남 공화국과 관계된 단체와도 적잖은 인연이 있으니, 비엣남 정부와 관영매체들이 케이팝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른 "하니"에 대해서 떨떠름한게 아닌가, 하는게, 루머의 핵심을 이룬다. 그러고 보니 이는 2014년 <트와이스>의 쯔위 사태와 어느정도 닮았다. 본토중국과 대만의 갈등을 당시 18살의 쯔위가 견뎌야 했던 사건 말이다.
4. 망명 정부
서둘러 보트를 타고 나라를 떠나야 했던 이들이 몰락한 '남비엣남 공화국'과 강한 연관을 맺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게다가 그들은 공산주의와 정 반대에 서 있는 자유시장주의 국가들로 흘러갔으니, 이후에도 줄곧해서 반-공산주의, 친-서방주의 활동을 했던 것을 선택의 여지가 없이, 처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다. 마치 1948년 이후 한국에 거주 중인 화교들이 자유중국 국적을 유지해야 했던 것과 차이가 없다.
그러고보니 1980년대까지도 미국의 비엣남인들을 중심으로 적잖은 공산정부의 전복을 획책하는 남비엣남 망명정부(?) 혹은 반정부 세력이 적잖이 활약을 했다고 한다. 베트남해방전선(NUFL), 남비엣남인민군(VPAVN), 자유비엣남회복운동(MRVN) 등,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자금과 군대를 모았고, 당연히 1990년대 들어서 조직은 뿔뿔히 흩어졌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2백만이 넘는 보트피플이 단기간에 생겼지만, 1990년대 비엣남이 개혁과개방정책을 실시하자 적잖은 보트피플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 영향도 있을테고. 해외에서 혁명조직을 꾸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부분은 그 사회에서 동화되어 삶을 영위하기 바빴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거리에선 정치 문제가 쉽게 해결이 안된다. 어찌보면 비엣남 이민자들이 여러 선진국에서 자신의 문화를 지키며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일종의 "독립운동"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5. 질긴 냉전
엊그제 BBC는 "베트남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키 호이 콴을 크게 반기지 않는 이유"라는 논쟁적 제하의 기사를 만들었다. 영국과 미국의 시각에서는 이 같은 의문이 터져 나올 수도 있겠다. 한국처럼 기뻐해야지? <뉴진스>의 하니를 보는 외국의 시선도 이와 빼닮았다. 이것은 과연 "체제"의 문제일까. 그러나 비엣남 입장에서 보면 그의 아카데미 수상에 '열광'할 정도의 이유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가 사이공서 태어나 4년을 산 것은 맞지만, 아카데미상이 비엣남의 문화적 역량과는 뚜렷한 접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콴을 비난하거나 저격하는 반응이 나온 것도 아니다. 어차피 200만이 넘는 보트피플이 생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한 과정이지, 누구누구의 책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20년 전 콴은 비엣남을 방문해 영화 작업을 한 일도 있어, 그리 불편한 관계도 아닐라고 한다. 내가 듣기도 보트피플 출신이 비엣남을 방문하거나 국적을 회복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아마도 자유세계 사람들이 "중국-대만, 남한-북한의 대립"의 관점에서 사소한 갈등을 먼저 키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렇다고 카퍼레이드까지 해줘야 하는건 아니지 않을까.
과연 보트피플 2세대 3세대는 비엣남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까?
PS.
- 냉전冷戰 프레임은 아시아에서 오래 지속되고 있음. 한일 문제만 봐도 마찬가지임. 이것을 뛰어 넘는게 K컬처의 정신이 되어야.
- <뉴진스>는 아직 데뷔한 지 1년도 채 안되었음. 당연히 멤버 하니의 인기는 전세계적으로 높고, 비엣남 친구들도 좋아함. 다만 비엣남 관영 언론도 꼰대라 연예기사에 그리 진심이진 않게 발단인 듯.
- 보트피플 출신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지에서 과거 반공산당 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반대도 마찬가지). 냉전의 잔재를 오늘날의 시빗거리로 삼는 것 만큼 구시대적인 일도 없을 듯.
- 1940년대 상하이, 하얼빈, 파리, 블라디보스톡 등에서 임시정부를 세워서 독립운동 하신 선조들이 더 대단하다는 생각도 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