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개방된 말레이시아가 택한 제 10대 총리, 안와르 이브라힘
글 | 정 호 재
일자 | 2022년 11월 27일
"안와르 총리 등극"
깜짝 놀랄만한 뉴스가 11월 24일 오후 4시경에 전해졌다. 전날 어느 정도 분위기를 풍기긴 했다. 60년 장기집권 세력인 BN, 바리산 내쇼널이 선거 패배(30석)의 책임을 지고 야당에 남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연스레 보수계열 73석의 PN과 보르네오 정당(30여석) 만으로는 과반인 111석에 살짝 모자랐던 것이다.
공은 다시금 1당인 PH에게 갔고 왕실은 타협을 통해 기왕이면 제1당이 "통합정부"를 이끌어 주길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렇게 왕실, BN, 그리고 보르네오 정당들까지 중립에 서버리자 자연스럽게 무히딘 야신, 이 아닌 안와르 이브라힘에게 분위기가 쏠린 것이다.
무히딘은 2020년 총리를 1년 하긴 했다. 왕실이 보아도 사실 너무 못했던 것이다. 지금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기에, 제1당이 내각을 구성해야 경제 안정도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리라.
- 방한訪韓했던 안와르
경상대 황인원 교수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 교수는 국내에 흔치 않은 말레이시아 정치 연구자였다. 아마도 그가 2010년 전에 안와르의 한국 방문을 주선하고 수행하였을 것이다. 당시 안와르의 정치적 고초가 극에 달해 있던 때였다. 한국 정치권에서 그에 대한 인지도가 높을 때도 아니었고 뉴스 한줄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말레이 연구자들은 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 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 누가 안와르를 만나고 싶어 했는 지는 거의 잊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안와르가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했다는 건데 아마 그때는 DJ서거(2009년) 직후 인지, 혹은 건강히 너무 나빴을 때였을 것이다. 여튼 조촐했던 안와르의 방한이 있었고, 아주 많은 한국의 동남아 연구자들의 그의 복권과 정치 재개를 희망했던 일화가 기억에 스친다. 확실히 그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아주 중요했던 인물이었다.
2. 이슬람 정당 급부상
필자는 동남아 이슬람 사회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게 상당히 틀린 내용도 있을 것 같아 조금 우려스럽다. 이번 2022년 말레이 총선에서 가장 결정적인 대목이 바로 말레이 이슬람 정당(PAS)의 향배도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이다.
바리산 내쇼날(BN)은 일종의 말레이 독립을 위한 통합정당의 성격을 지닌다. 세속적인 말레이 토착세력인 암노UMNO가 깃발을 들고 여러 반제국주의 정당이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이 그 출발이다. 1960년대 당시는 세속주의가 힘을 얻었을 때고, 현대적인 국가 건설을 위해 하나의 세력으로 힘을 모아야 했다. 당시 PAS는 이슬람주의를 표방했음에도 상당히 개혁적좌파 정당이었다.
그러나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 이후 상황이 뒤바뀌기 시작한다. 동남아 이슬람주의 정당들도 이 흐름을 서서히 받아들이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1990년대에 들어선 말레이와 인도네시아 무슬림도 서서히 원리주의 색깔을 띠기 시작하고, 2000년대 이후엔 완전히 극우 세력으로 변신을 마치게 된다. 이들은 주로 이슬람 성직자들이 당을 이끌고, 종교를 사회의 통합이념으로 제시하는 식이다. 학교에 이슬람 정신 교육을 강제하고, 여성의 복장을 규제하는 극보수주의 성격을 드러냈다.
3. 극우 세력화
다만 중도보수 세력 암노Umno가 2013년 총선까지 큰 힘을 발휘해 PAS의 존재감이 외부에 별로 드러낼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2018년 총선에서 중도좌파 PH가 정권교체에 성공하자 보수 무슬림 세력에게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나라가 중국계를 복권시키고 지나친 세속주의로 흘러갈 것을 우려한 것이다.
2020년 PH의 한 축을 이룬 말레이 세력이 버사뚜, 라는 말레이 토착당을 만들어 연립내각을 붕괴시킨다. 무히딘 야신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번 총선 돌풍의 주역인 바로 그다. 버사뚜는 불과 28석에 그쳤지만, 이번엔 극우 PAS가 44석을 넘는 진짜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니까 BN이 실패한 것이 아닌 PAS가 버사뚜, 즉 뻬리카탄 내쇼날PN으로 갈아탄 것이 선거의 향방을 결정한 것이다.
말레이 토착 세력 입장에선 부패로 국민의 신망을 잃은 BN을 버릴 배로 판단하고 새로운 배로 갈아탄 셈이고, 안와르와 PH의 부상에 경계감을 느낀 토착 세력은 PAS에 힘을 실어주면서 PN이 제2당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점차 사회갈등을 위한 장작이 쌓이는 거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이미 옆집 인도네시아도 극우 이슬람주의 정당의 발호로 여러 정치적 갈등이 폭발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조국 사태에 비견되는 "아혹 주지사 신성모독" 사건이다.
4. 말레이 통합의 계기
이밖에도 안와르의 등극을 가능케 숨겨진 이유도 있다. 바로 전통의 암노와 신진세력 버사뚜 간의 정통성 대결이다. 암노 입장에선 만약 이번에 보수 내각에 참여했다면, 아예 정당이 폭파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비록 각종 비리 의혹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지만 역사적으로나 정치 계보상 "암노"는 마하티르와 안와르 버사뚜를 배출한 일종의 현대 정치의 적자다. 여기서 2~3순위로 내각에 합류하느니 조심스럽게 때를 기다린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어차피 안와르도 옛 동지에 가깝다.
이같은 복잡한 상황에서 과반에 훨씬 부족한 안와르의 PH가 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꼭 한번 거쳐가야 할 선택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상황에서 무히딘 야신의 PN이 집권한다면 국민통합에 커다란 장애가 있기 때문에, 경제 회복에 아무런 기대감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왕실의 현명한 판단이 빛을 발한 사례이지만, 과연 그 기대감을 안와르가 충족시킬지는 미지수다.결과적으로 안와르는 30여년을 기다려 집권에 성공했다. 제3세계 정치사상 초유의 일이기도 하다. 이는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지정학적으로 개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란과 미얀마는 절대로 이러한 긍정적 선택을 하지 못한다. 자연스레 군부와 종교정당이 정권을 잡고 놓지 못하는 것이다. 말레이의 저력이 드러난 순간이다.
PS.
1. DJ의 집권도 JP와 손을 잡았기에 가능했던 일. 그러니 안와르가 현실과 타협했다고 너무 비난만 하지 마셨으면. 안와르의 집권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음.
2. 버사뚜와 PAS는 지속적으로 안와르의 발목을 잡을 예정임. 어느 순간 밀리게 되면 중도통합 내각은 붕괴하게 될 것. 그야말로 정치가 필요한 시점임.
3. 이슬람주의가 절대 이상한 게 아님. 유교주의와 별 차이가 없음. 현대 사회에서도 교양으로 학생들에게 사서오경을 읽게 할 수는 있음. 그러나 원리주의가 되면, 여성에게 칠거지악을 강제하고 동성동본 혼인 금지, 호주제 유지, 한복을 강제하는 등의 전통사회 윤리만을 강제하는 게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