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인류학자, 발리에서 호텔사업하다①

O 끊임없이 겸손하라, 아는 것과 비즈니스는 달랐다
O 헛똑똑이 교수 출신 발리 호텔업에 뛰어들다
O 은퇴이민의 최적의 장소, 동남아를 더 깊게 알아보자

필자는 동남아시아 인류학anthropology of Southeast Asia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학자로서, 2010년 초반에 4년여 동안 발리에서 ‘생뚱맞은’ 영리사업 판을 벌린 적이 있다.
사업 분야는 발리현지에서 ‘뻐르호뗄란perhotelan: 호텔업’으로 분류되며 한국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풀빌라pool villa 사업’이었고, 당시 세간의 화두였던 ‘은퇴이민’ 사업과도 연계하여 ‘은퇴이민촌’ 운영도 구상하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확신했고, 인도네시아에 관하여 공부할 만큼 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고가 발생하기 전 수많은 징후가 반드시 선행함을 증명하려 했던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헛똑똑이’로 수많은 무지와 실수를 저질렀다. 이 글은 한 명의 헛똑똑이가 발리에서 좌충우돌 사업하면서 저질렀던 바로 이 무지와 실수에 대한 고해성사적인 회상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경험담들을 풀어놓을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오늘은 발리사업 초기단계에 현지 사무소를 준비하면서 겪었던 경험담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김 예 겸 | 문화인류학자, 부산외국어대학


"창발적인 송충이가 되려 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필자가 왜 학문을 하다가 사업현장에 뛰어들었는지 먼저 설명해야 한다. 필자는 국제적인 명망을 지닌 영국 학자Dr. Victor King 밑에서 동남아 인류학을 전공했다.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북부 술라웨시Sulawesi의 미나하사Minahasa라는 고산지역에서 1년간 현지조사를 수행하기도 했다.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 온지 6개월 만에 경기도의 한 사립대학교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교수로 재직한지 3년쯤 된 던 해에 전공을 살려서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부푼 꿈을 안고 ‘강남지역 사무실의 끝자락’이라는 서초구 방배동에 사무실을 얻고 “H” 주식회사를 설립 했다. 강의실에서 이론적인 이야기만 하다 보니 따분해지기 시작했고, 학문과 현장을 엮어보고 싶다는 지적 갈증도 피어났고, 궁극적으로는 돈을 벌어 국제교육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야심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대개 만류하는 분위기였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여야 한다”, “교수, 군인 그리고 공무원이 사업을 하면 망한다”는 식으로 우려를 나타냈다. 심지어 친척 한 분은 용한 점쟁이 집에서 필자의 점을 봤더니 “이 사람은 송충이라서 솔잎을 먹어야만 산다”라고 했다고 전할 정도였다. 그러나 필자는 솔잎만 먹는 송충이가 아닌, 잡식을 하는 ‘창발적創發的인’ 송충이가 되고자 독하게 결심하고 사업을 결심했다. 이 ‘창발적’ 송충이는 2년 후에 재직 중이던 대학교에 전임교원 겸임금지 복무규정이 생기자 전임교원 자리를 과감히 사직하고, 서울소재 모 여대 겸임교수직으로 자리까지 옮기면서 사업을 지속했다.

발리의 호텔 사업에 투자하다

발리 사업의 출발은 비교적 순탄했다. 당시 필자가 설립한 “H” 주식회사는 한국과 동남아를 잇는 ‘교량적 사업’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았다. 세부 내용으로는 국제PR마케팅 대행, B2B 문화관광기획, 동남아투자 컨설팅 그리고 동남아 해외직접투자였다. 발리 사업은 국제PR마케팅 대행 및 동남아 해외직접투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왜 멀고 먼 발리를 투자 대상지로 삼았던 것일까? 첫째, 필자는 인도네시아 전공배경 때문에 인도네시아어가 가능했고, 인류학자로서 현지문화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둘째, 당시 회사가 국내에서 인도네시아관광청 PR마케팅을 대행하면서 발리 현지 공무원들 및 사업가들과 기본적인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다. 셋째, 회사직원들의 대다수가 인도네시아 전공자들이기에 경쟁력도 있었다.

첫 번째 아이템은 발리현지 호텔업계의 한국 내 홍보와 관련된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전문 PR마케팅 웹사이트를 만들고, 발리현지 계약 호텔업체들도 늘려가면서 사업을 차근차근 늘려

갔다. 그러나 큰 규모가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발리에 현지법인을 두고 진행된 사업은 아니었다. 엄밀히 하자면 회사의 본격적인 발리 현지사업은 동남아 해외직접투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발리 현지법인 설립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격적인 발리사업을 위한 현지법인의 설립은 처음에는 순탄한 듯 보였다. 무엇보다도 발리 현지로부터 발리 호텔업과 관련된 꽤 전망 있어 보이는 솔깃한 제안도 있었다. 발리 현지법인 설립을 위한 한국회사의 내부적인 행정체계 구축을 시작으로, 현장을 총괄할 부장급 책임자 한 명을 선정했다. 다음으로 한국에서 해외직접투자를 위한 공식적인 절차를 진행해 나갔다.

운도 따라주었었다. 주식회사법인이 한국은행이나 한국수출입은행에 정식 신고를 하고 해외직접투자를 진행하려면 해외직접투자 유형, 해외지분 관련 문제, 해외송금 문제, 해외수익에 대한 세금문제 등을 면밀히 검토해야 하는데, 마땅히 컨설팅을 받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에 당시로부터 3년 전 건네받은 “W” 회계법인 명함 한 장이 불현듯 떠올랐다. 3년 전 우연히 작은 교통사고를 계기로 알게 된 전문가에게 주저하지 않고 연락을 했는데, 이분은 그사이 승승가도를 달려 대형 회계사무소의 해외법인담당 이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흔쾌히 무료로 상세한 컨설팅을 해주기도 했다.

발리 현지직원을 채용하다

한국인 감독관이 있어야 하나 없어야 할까? 한국에서의 공식적인 해외직접투자 절차를 진행함과 동시에 발리현지에서도 현지 규정에 맞게 공식적인 사업허가 절차를 밟아가며 발리사무소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해나갔다. 현지인 매니저를 비롯한 현지직원들을 채용하고, 사무용 차량도 계약하고, 발리 현지에서 사무실을 얻는 등 발리 현지사무소 구축을 하나하나 구체화 시켜나갔다.

발리 현지사무소 운영은 현지인 직원 매니저를 축으로 현지인 중심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사실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사업을 하시는 몇몇 지인들은 “이것이 무모한 시도”라고 만류하면서, 현지인 직원들을 현장에서 감독할 수 있는 한국인 매니저를 반드시 두라고 조언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인류학개론 수업 때마다 영국의 철학자 제리미 벤담Jeremy Bentham이 감시체계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한 파놉티콘panopticon적 양식을 현대사회의 가장 부정적인 체계로 비판을 해왔었고, 또한 문화상대주의를 고집하는 인류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좀 색다르게 박애주의博愛主義 차원에서 현장을 운영하고 싶었다. 그래서 필자나 한국회사 책임자가 현지에 상주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또는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발리를 방문하는 셔틀shuttle경영 방식을 택했다. 그리하여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이러한 ‘박애적 셔틀경영’을 지원할 수 있는 능동적이면서 성실한 현지 직원이었다.

인격적 사장 가능할까?

직원을 뽑을 때는 ‘다양한 잣대를 들이대서 뛰어난 직원을 선발하는’ 인사채용방식을 취하던지 아니면, ‘회사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직원을 사전에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인사채용방식을 취해야 한다. 대개의 한국회사는 전자의 채용 방식을 선호한다. 우리 회사도 이를 따랐다. 우리 회사는 또 요즘에 화두로 떠오른 ‘공감각 능력’보다는 ‘창의력’과 ‘인성’을 평가하는 인터뷰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고, ‘실무기획력’과 ‘시장조사능력’을 기본적인 직무능력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발리 현지직원을 채용할 때도 이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다. 필자는 장기적으로 발리직원들이 셔틀경영 체제하에서 능동적으로 발리사업을 확장시켜나가길 기대했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능동적이면서 성실한 직원을 채용하고, 이들을 잘 훈련시키고 싶었다.

최초로 채용됐던 현지인 매니저와 현지직원은 현지 첫 사무실을 찾으러 다니던 중에 채용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발리 토착민이 아니었다. 이들 대부분은 인도네시아 수도인 자까르따에서 태어났거나, 자까르따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비토착민이었다. 의도적으로 외지인 직원을 채용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수도인 자까르따와 지방의 관광지역인 발리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인적자원의 차이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듯하다. 수백여 명의 지원자들에 대한 서류전형 및 면접을 통해서 이 차이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었다.

이 합격자의 또 다른 특징은 중국계라는 점과 경영학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간시간에는 현지 라디오 방송국에서 음악방송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사실 현지인 매니저 채용면접에서 최종 단계까지 통과한 경영학 및 경제학 배경의 쟁쟁한 말레이계 인도네시아인들이 있었다. 이들도 다들 자까르따 출신이었는데, 발리사무소의 첫 번째 현지인 매니저였던 중국

계 인도네시아인 “K”씨가 결국 채용된 이유는 “한국인이 아니면 최소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을 매니저로 두라”는 주변의 조언 때문이었다. 또한 필자 개인적으로 “K”씨에게 끌렸던 이유는 경영학과 예능분야를 넘나드는 ‘융합적 재능을 가지고 인재”인지라 발리사무소를 유연하게 잘 운영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융합적 인재의 '덜컥' 횡령

그러나 문제는 “K”씨를 채용한지 1년도 채 못돼서 발생했다. 당시 발리사무소의 모든 수입 및 지출에 관한 사항은 발리현지 매니저 명의로 한국회사 책임자 직원에게 매월 말 정식보고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K”씨가 한국회사 책임자 직원의 승인 없이 판공비 명목으로 1천여만 원의 발리사무소 운영비를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문제는 결국 술과 여자 문제였는데, 횡령액 대부분은 승인 받지 않은 접대명목으로 한국의 고급 술집에서 탕진하고 말았다.

“K”씨의 횡령은 몇 달 동안에 걸쳐서 저질러졌는데, 현지 회계 담당 직원 및 다른 직원들도 눈치를 채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회사에는 알리지 못하고 있었고, 매월 말 수입 및 지출 보고서에는 해당 내용이 누락이 되어 있었다. 결국 “K”씨의 횡령사태는 형사고발로 마무리되지 않고, “K”씨가 횡령금액을 매월 정기적으로 변상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사직서를 제출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K”씨는 2년여에 걸쳐 총 200여만 원만을 변상하고 더 이상 변상을 할 의지가 없었고, 필자도 직접 채용해서 한 솥 밥을 먹었던 직원과의 좋지 않을 일로 지루하게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아 나머지 횡령액은 탕감해 주었다.

“K”씨의 사직 이후에 채용된 매니저는 한 통신회사의 발리사무소에서 관리자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A”씨였는데, “A”씨도 발리 토착민이 아니었으며, 또한 발리힌두교도가 대다수인 발리사람들과는 달리 이슬람 교도였다. 이러한 매니저 및 일반직원들의 비토착민으로서의 문화적 배경은 발리사무소의 비즈니스 네트워크 구축에 있어서 주요한 변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전 매니저였던 “K”씨가 매니저 역할을 담당할 때에도 주변으로부터 사소한 ‘문화적 텃세’가 심해서 비토착민인 발리사무소 직원들이 ‘문화적 스트레스’에 대한 불평을 털어 놓기도 했었다.

(계속)

PS.

Photo: The Mansion Hotel Ubud Bali Indonesia from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