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리콴유와 싱가폴, 과잉 '가족' 국가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이자 내각선임장관 및 고문장관을 역임한 정치인 리콴유가, 李光耀 1923생, 2015년 3월 23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그의 사망은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로 이어졌으며 전후 동아시아 정치인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불러오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리콴유는 총리 시절 유교적 철학에 바탕을 둔 ‘아시아적 권위주의’로 유명했으며, 영국 식민 지배를 받았던 싱가포르를 글로벌 무역 및 금융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독재자’와 ‘싱가포르를 눈부시게 발전시킨 공로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아시아 권위주의 정치인의 대명사인 그를 의미를 정리해봅니다.
문 재 승 | 루트아시아 편집위원
작 성 일 | 2015년 10월
“나는 종종 싱가포르 국민들의 개인적인 삶에 간섭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서있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웃이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소리를 내고 사는지, 어떻게 침을 뱉는지, 무슨 언어를 구사하는지 등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을 간섭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경제성장은 이루지 못했을 것 입니다. 뭐가 옳은지는 우리가 판단합니다” ------- 1986년 리콴유 총리의 독립기념일 연설 중
리콴유 당시 싱가포르 총리의 말에는 강한 확신이 넘쳐나고 있었다. 1965년 독립한 이래
국가를 줄곧 운영해왔던 자신감에서 비롯된 표현이었겠으나, 그는 어쩌면 진실로 자신이
싱가포르의 아버지로서, 1986년 당시, 스무살이 갓 넘은 국민들을 옳은 길로 양육한다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國父, 리콴유 Lee Kuan Yew
이 글은 싱가포르를 자신이 낳아 길러낸 자식이라고 여긴 아버지 리콴유에 대한 이야기다.
싱가포르가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죽어서도 벌떡 일어나 바로잡겠다2) 고 일갈했
던, 무척이나 엄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 리콴유는 철저한 실용주의 정치인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글은 그를 국민들을 가족처럼 여기던 ‘가족주의’ 정치인이라고 여긴다.
정치인 리콴유의 가족주의는 그가 가진 국가관을 통해 잘 설명된다.
그는 서구와 대비되는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3) 를 지닌 싱가포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로 ‘개인’이 아닌 ‘가족’을 꼽는다.4) 가족은 개인과 달리 구성원의 의식주를 해결해
삶을 영위해 가는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개인이 아닌 가족들로 구성된 사
회라면 그 사회의 주된 이슈는 구성원들의 생존에 관한 문제, 즉 의식주 해결이 우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가족으로 구성된 싱가포르는 수많은 개별적인 가족이 모여 국가라는 대가
족 을 이룬 셈이고 정치 지도자의 역할은 단순히 가장Breadwinner의 역할로 축소되
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의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우선 아버지라는 타이틀에는 유효기간이 존재
하지 않는다. ‘前 아버지’와 같은 호칭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언제든지 자녀의 삶에 등장할 수 있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었든 여전히 미성년이
든 간에 직접적인 개입과 간섭이 가능한 존재가 아버지다. 드러나는 개입이 아니더라도 어
쩌면 아버지는 자녀들의 무의식에 남아 평생 존재감을 과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로
아버지는 자식들의 존재를 늘 상정한다. 자식들이 없으면 아버지라는 말은 지칭한 대상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아버지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늘 자식들에게 집착한다.
가족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그 정도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집
착과 접착 사이의 감정을 오간다.
한 나라의 정치 지도자와 국민들의 관계가 부모 자식간의 관계로 치환되는 순간, 아마도,
지도자가 권력에 대해 가진 집착은 국민들에 대한 애틋함으로 그려질 것이다. 또한 “다
너를 위해서”라는 설명이 따라붙는 비상식적 행위가 국민적 공감대를 통해 받아들여질
수 있다. 지도자가 선보이는 국민들에 대한 피도 눈물도 없는 조치는 엄한 아버지 상으로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가기
싱가포르의 역사는 곧 리콴유의 인생이었다. 1959년 영국으로부터 자치정부를 허락받은
싱가포르에 첫 의회선거가 열렸을 때 승리한 정당은 리콴유가 주축이 된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이었으니 정치인으로서 리콴유의 인생은 싱가포르의 역사와 함께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리콴유가 총리에 취임한 1960년대 싱가포르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1963년 싱가
포르를 포함한 영국 식민지 지역이 합쳐져 새롭게 태어난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부로 출발
했으나 연방정부와 정치적인 계산이 뒤틀린 나머지, 불과 2년만인 1965년 연방에서 축출
되어 싱가포르는 혼자 남겨지게 된다.5) 조그만 섬나라에 마땅한 자원도 없었고 마실 물조
차도 말레이시아에 의존해야 했던 싱가포르에게 현실은 그야말로 벅찬 것이었다. 게다
가 국가로서 정체성도 확실치 않은 시기에 국민들의 인종과 문화 역시 다양한 나머지 갈등
의 요소6) 가 다분했다. 싱가포르에게 생존의 방법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단련시 키는 한편, 실체도 불분명했던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대해 끊임없이 정의내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아버지 리콴유의 문법은 간단했다. 위험이 판치는 정글의 맹수들이 우리를 잡아먹
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신생국 싱가포르가 한가하게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논할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리콴유의 경고는 언론과 정부조직을 통해 효과적으로 국
민들에게 전달되면서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실렸고 국민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자칫 생존
조차 어려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싱가포르의 빈칸이 채워지기 시
작했다. 민주주의, 노동권, 언론의 자유, 야당의 존재 등이 외부의 위협을 이유로 제한된
형태로 운영되는 대신, 국민들의 의식주가 확실히 보장하는 국가 싱가포르가 형성되기 시
작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거친 외부 환경 속에서 이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
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라.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어냐고. 이들이 원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 따위가 아닌, 살 집과 치료약 그리고 학교다”7)\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여실히 드러낸 그의 발언 속 싱가포르 국민들은 리콴유에게 그저
식구食口였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던 비장한 심
정의 가장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 리콴유가 이끄는 ‘싱가포르 가족’은 성공했다. 리콴유 재임기간 동안 급
성장했던 경제분야의 성취 외에도, 싱가포르인들은 점차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
다. 유엔개발계획United Nations Development Planning이 매년 인간의 삶의 질
에 관한 지표들을 종합해 평가하는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에 따르
면 싱가포르는 매년 대한민국과 비슷한 수준인 3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부의 증대에는 싱가포르 정부 특유의 ‘가족주의적’ 사회 정책이 뒷받침
되었다. 싱가포르 정부가 1960년 주택개발공사Housing Development Board를 설립
하고 각종 혜택과 지원을 통해 국민들을 대상으로 자기집 갖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2014
년 싱가포르인들의 주택 소유율이 90.3%에 이를 정도로 국민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 주
려던 정부의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또한 소위 CPF라고 불리는 중앙후생기금Central
Provident Fund을 만들어 국민들이 벌어 들이는 소득 중 일부를 강제로 저축하게 만들
어 주택구입자금과 노후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왔다.8
정부는 국민들의 의식주뿐만 아니라 배우자를 고르는 법에 대해서도 훈수를 두는데 망설
이지 않았다. 1983년 독립기념일 집회 연설에서 리콴유 총리는 대졸 남성들에게 자신들
만큼 우수한 아이를 원한다면 자신보다 교육 수준이 낮은 아내를 고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이라고 언급하며 이른바 결혼 대논쟁Great Marriage Debate을 유발했다.
리콴유는 훗날 이 발언을 두고 당시 싱가포르 대졸 여성들이 2/3 가량이 미혼이라서 이들
을 결혼을 시켜야 후손들이 똑똑해 질 것이라 믿었기에 나온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자
신보다 교육을 덜 받은 여성과 결혼하는 대졸 남성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아이들을 가질 기
회를 극대화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9) 그의 이러한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
해 1984년 싱가포르 정부는 정부부처 산하기관으로 사교개발기구Social Development
Network를 설립해 대졸 남녀 간의 교제 활동을 돕기도 했다.
이러한 가족주의 정책과 함께 껌 판매 금지, 화장실 사용 후 물 내리기를 강제하고 엘리베
이터 내 소변금지 등 정부가 국민들에게 들이댄 시시콜콜한 제한들10) 은 일부 국민들의 불
만은 물론, 이를 바라보는 해외 언론의 조롱을 감수해야 했다. 이른바 유모국가Nanny
State라는 별명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리콴유는 이러한 정부의 개입이 싱가포르를 더욱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었다고 믿었다.
“만약 이런 것이 유모국가라면 나는 내가 싱가포르를 쭉 길러온 유모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겠다.”11)
그렇게 싱가포르를 길러온 아버지 리콴유도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1959년 영국 식
민정부 아래서 자치정부 수반으로 뽑힌 이래 31년간 싱가포르는 곧 리콴유였지만, 1990년
정치적 동지였던 고촉통Goh Chok Tong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고촉
통이 총리직을 수행하는 기간에도 리콴유는 선임장관Senior Minister으로 내각에서
활동하였으며 2004년 리콴유의 큰아들 리센룽Lee Hsien Loong이 고촉통에 이어 새
로운 총리에 오르자 선임장관 자리에는 고촉통이 오르고 리콴유는 고문장관Minister
Mentor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이동한다.
이후 2011년 내각에서 사퇴하기까지 리콴유는 내각의 주요 일원이자 국가 중대사를 결정
하는데 무시 못 할 발언권과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12) 쉽게 말해, 싱가포르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되었을 뿐이었다.
반항하는 자녀, 싱가포리안Singaporean
2006년 4월, 총선을 한 달여 앞두고 국영방송인 채널뉴스아시아Channel News Asia
에서는 흥미로운 토론회가 벌어졌다. 당시 고문 장관으로 활약하던 리콴유와 싱가포르의
20~30대 청년들이 싱가포르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격의 없는 이야기를 나눈다는 취지로
마련된 자리였다. 프로그램 제목은 “내 투표는 왜 중요한가: 고문 장관과의 대화”Why
my votes matter: A dialogue with the Singapore Minister Mentor였다.
방송은 시종 일관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제목처럼 왜 투표해야 하
는가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싱가포르의 제한된 정치적 자유문제에 대해 작심하고 이의
를 제기하는 젊은이들의 날 선 질문이 주를 이뤘다. 당시 젊은 패널 중 한사람으로 출연
했던 싱가포르 신문 스트레이츠 타임즈The Straits Times, 기자와의 논쟁이 길어지자
리콴유는 기자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방송에서 언급한다고 면전에서 구박을 주기에 이른다. 뒤이어 나온 그의 발언은 세트장의 분위기를 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나는 내 손자 손녀들이 말대꾸를 하면 대부분 받아주지만 때로는 찍어 누른다.”13)
국민들 중 젊은 세대들과의 대화이긴 했지만 리콴유에게 국민은 어쩌면 손자와 같은 존재
였을 것이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 그 기자는 몇 마디를 더하고 말문을 닫았고, 프로그램
방영 이후, 이유는 확인되지 못 했지만, 결국 신문사를 떠났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젊은이들이 보여준 공격성에 리콴유는 조금은 슬픈 모습이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는 서글픈 감정까지 드러내고 만다.
“만약 여러분 세대가 내가 물러나길 바란다면 나로서는 슬픈 일이다”14)
리콴유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정치에 남아서 조언을 해주기를 원하고 있다고 밝혔
지만 서운한 낯빛을 감추기엔 어려워 보였다.
리콴유가 구축한 싱가포르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은 당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세
대의 입을 빌려 격하게 표출되긴 했지만, 갑작스레 폭발한 것은 아니었다. 주로 2000년
대 이후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국가와 국민 사이에 등장해 국민들의 의견이 상당 부분 여
과 없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정부가 국민들의 의견을 심각하게 여기고 이에 대한 나름
의 조치를 취하는 양상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2000년 정부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완화한다는 의미로 도심에 위치한 공원 일부
를 국민 발언대Speakers’ Corner로 지정해 운영해 오고 있다.15) 또한 2008년 리센룽
총리는 독립기념일 연설을 통해 싱가포르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자유를 더 많이 부여할 의
사가 있음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그 내용의 첫째는 정당 및 정치와 관련된 영상물에 대한
금지를 풀고, 둘째로 선거운동에서 팟캐스트Podcast와 보드캐스트Vodcast 등, 동영
상을 이용한 캠페인을 인터넷 공간에서 허용하겠다고 밝혔으며, 마지막으로 지금껏 일절
금지되어 왔던 장외 시위를 일정한 공간에서 허용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2011년 5월에 열린 총선은 리콴유를 비롯한 싱가포르
정부를 혼란으로 밀어 넣을 만한 결과를 불러왔다. 이날 선거에서 리콴유 정치 인생의 상징
이었던 인민행동당은 득표수 60.1%를 기록함으로써 싱가포르 독립 이래 역대 최저의 득표
율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싱가포르 선거제도의 영향16) 으로 의회 의석수의 39.9%를 야당
에 내주지는 않았지만 사상 최초로 의회의석 87석 중에 6석을 야당에게 빼앗김으로써 나
름 아슬아슬한 승리를 기록한 것이다.
2011년 총선에서 여당이 사상 최저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을 두고 대부분의 언론은 정부가
펼치는 여러 굵직한 정책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고 설명한다.
‘인색한 유모’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정부가 국민들의 노후에 대한 복지제도를 소홀
하게 여긴 가운데 늘어나는 노인인구에 대한 부양 부담은 국민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에 충분했다.17) 또한 2010년 현재 3백만 명의 노동인구 중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35%에
이를 정도로 급속하게 증가해 일자리의 위협을 느끼는 로컬 싱가포르 인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18
그러나 근본적인 요인은 어쩌면 정치를 가족관계로 치환시킨 아버지 리콴유의 정치철학
에 원인이 있을지 모른다. 2006년 젊은이들과 나눈 대화에서 리콴유가 밝힌 정치의 정의
를 다시 들여다보자.
“여러분은 정치가 선거 혹은 선거를 통해 정당이 경쟁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나
는 정치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정치에 대한 가장 올바른 정의는 ‘한 국가가
가진 통치예술이자 통치학이며 내부와 외부적인 관계를 운영해 나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실생활에서 ‘정부에 의해 내 인생은 어떻게 영향 받는가?’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치란 지금 국민들에게 직업이 있는지, 살집이 있는지, 필요할 때 치료할 약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19)
정치가 곧 구성원에게 필요한 사회적 가치를 권위적인 방법으로 배분하는 것이라고 한다
면, 리콴유가 생각하는 사회적인 가치는 생존을 위한 의식주라는 매우 좁은 범주의 가
치들이며 이에 대한 권위적 배분 역시 국민들과의 충분한 소통 없이 얻은 권위라는 비판
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배분할 지에 대해 국민들이 발언이 제한되고 국
민의 대표들을 통해 정책에 반영될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은 곧 국민이 느끼는 불편함이 무
언지 정치인들이 알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민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생활의 불편함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국민과 정치인들의 소통은 놀랍도록 높은 수준이다. 싱가포르의 각 지역에는 매주
지역구 정치인들과 만날 수 있는 공식적인 면담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른바 ‘지역구민
과의 대화’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Meet the-People-Session”이 바로 그것인데, 이 자리에는 의회 의원이 직접 참석해 주민들의 어려움을 듣고 처리한다. 짧은 시간 사진
을 찍기 위해 개최하는 형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실제로 주민들의 고민을 듣다보면 자정을
넘겨서 진행되기 일쑤인 실제 상황이 매주 이어지는 것이다.20)
‘지역구민과의 대화’에서 주민들이 자신의 대표들에게 하는 청탁은 사실 시시콜콜하기
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것들이다. “수도가 새는 간단한 문제부터 시작해 병역면제
문제와 가족부양 문제에 이르기까지”21) 다양한 문제들을 들고 의회 의원들과 상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서 가족들의 저녁식사 자리에 나올 법한 주제의 이야기들
이 지역구 의원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로 하자면 지역구 의원들이 각 가정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수 있을 정도라는 말인
데, 국민들과의 소통이 이러한 생활적 이슈에 묻히다 보면 정작 굵직한 이슈에 대해서는 국
민들의 의견을 들을 새조차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결국 세계 최고의 월급을 받는 싱가포
르 행정가22) 들의 엘리트주의는 자신들의 판단과 계획에 의해 나라의 이민정책, 교통정
책, 물가정책 등을 결정해 왔고, 이러한 결정들에서 소외된 국민들의 불만이 서서히 끓어
올랐을 것이다. 이에 대해 리콴유는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무엇이 옳은지는 우리/국가가 판단합니다’23)
아버지의 퇴장
성인이 된 자식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숙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해온 역
할들을 자연스레 자식들이 대체하면서 할 일이 없어질 뿐이다. 따라서 이 시기를 맞이하
는 아버지와 이를 바라보는 자녀들은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2011년 5월 총선에서 나온 충격적인 결과에책임을 지고 리콴유와 고촉통은 갑작스럽게
고문장관과 선임장관의 자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이 발표한 내각 사퇴 선언문
에는 서글픔이 꾹꾹 담겨져 있었다.24)
“더 어렵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싱가포르의 젊은 세대가 나라를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시
간이 왔다.”
“젊은 세대들은, 부패 없는 능력주의 정부의 존재와 높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것 이
외에도,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에 더 관여하고 싶어 한다. 일종의 분수령이 된
금번 총선을 계기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우리 두 사람이 사퇴함으로써 내각의
젊은 피들이 바로 이 젊은 국민들과 소통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싱가포르의 미래를 만들
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항상 기성세대들의 입장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기성세대
들은 지금의 싱가포르에 기여한 이들이며 당연히 이에 걸맞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25)
발표내용에는 리콴유가 자신의 사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가 내각을 떠나는 주요한 이유는 2011년 총선결과이며 두 사람은 그 결과를 다분히 세대
간 갈등이라는 틀에 넣어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선거 직후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싱가포르 정치지형의 변화를 갈망하는 세력은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다수의 장년층이 포함되어 있어 정치적 변화에 대한 열망에 있어 세대간 뚜렷
하게 차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26)
결국, 젊은이를 지칭하는 ‘younger’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출현하는 이 짧은 발표에는
당시 87세였던 리콴유가 국민들의 은퇴요구를 자신이 생존을 보장해 주었던 자식 같은
이들의 요구라고 받아들이면서 서운함을 내비 췄던 것이다.
어쩌면 리콴유는 이런 모습으로 은퇴하는 것이 자신의 가족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27) 자신이 평생 자식이라고 생각했던 싱가포르 인들이 더욱 성숙한 미래를 맞이하
기 위해 필요한 길이라고 생각했을지, 아니면 실제 큰아들이었던 리센룽 총리를 위한 길이
라고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가 만든 그늘
2011년 내각 은퇴후 4년만인 2015년 3월, 리콴유는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싱가포
르와 국제사회의 추모열기를 불러일으킨 죽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주
식시장은 놀랄만큼 평온했다. 국부의 죽음과는 관계없이 그가 만든 싱가포르 시스템은 견
고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1년 내내 해가 쨍쨍한 열대국가 싱가포르에서 구석구석 깊게 드리워진 아버지의 그늘을 누
구보다 절실하게 느낄 사람은 리콴유의 아들 리센룽 총리였을 것이다. 1984년 서른 두 살
의 나이에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에 입문한 후 통상산업부 장관, 부총리 등을 거치
며 오랜 기간 국정경험을 쌓은데다 2004년부터 싱가포르를 이끌어온 리센룽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에도 능력에 대한 의심의 눈길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국가적 안정감
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늘 궁금하다. 리콴유가 만든 싱가포르라는 업적은 언제까지 이어
질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 싱가포르를 이끌어가는 리센룽은 오히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싱가포르 국민들에게 보인 집착을 서서히 풀
어주는 것만으로도 리더로서의 온화함이 두드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센룽은
리콴유의 내각 은퇴 이후 2013년과 2014년 8월 독립기념일 계기 국정연설을 통해 국민
들과의 소통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거듭 선언한 바 있다. 주택, 교통, 의료 복지 등 민생 문제 개선방안과 복지정책 대폭 확대를 발표하는 등 ‘사려 깊은 성과주의compassionate
meritocracy’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이다.
리센룽과 인민행동당이 추구하는 이러한 수정 노선은 앞으로도 한동안 싱가포르 국민들
에게 지지받을 것이다. 다만 2015년 현재 63세인 리센룽이 총리에서 물러서는 순간이 그
유효기간의 끝일지 모른다. 국민들은 여전히 리센룽을 리콴유의 생물학적 아들로 기억하
고 있으며 이는 “나라가 잘못된다고 생각하면 죽어서도 벌떡 일어나겠다“던 리콴유의
생전 다짐이 현실로 다가올 것 같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켜 왔기 때문이다.
싱가포르가 아버지 리콴유의 유산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국가적 정체성을 새롭게 모색
할 수 있을지 여부는 온전히 리센룽 이후에 나올 정치지도자의 몫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서
구화된 나라임에도 한때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했지만 언젠가 이를 옛일로 묻어두고 서구
형 자유민주주의를 구사하는 국가로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동남아시아 현대사는 리콴유와 함께 아세안을 창설했던 이웃 4개국의 철인 지도자들인
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필리핀의 마르코스, 태국의 타놈 등이 모두
불운하고 혼란스러운 정권교체를 맞이했다고 기록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리콴유의 업적은 언제나 돋보인다. 싱가포르는 지도자가 물러나도 흔들
림 없이 유지되는 제도를 만들어 냄으로써 안정적이고 민주적인 세대교체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어느 자녀를 염두에 두었든 간에, 리콴유의 싱가포르 모델은 ‘가족주의 정치
인’이 빚어낼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형태이자 최고의 업적이었다.
PS.
- 2015년 여름, 리콴유의 죽음을 지켜보고 쓴 글입니다.
-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실질적 정신적 '국부'라는 점이 후임들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