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란을 사로잡은 나쁜오빠들

ㅇ이란, 의외의 한류와 아시아의 프린스가 된 한국의 팝스타 " SS501 김현중"
ㅇ호메이니 시대를 연 철학자 "샤리아티"
ㅇ남성성이 지배하는 대륙부 아시아, 사근사근한 오빠들에 대한 갈구

글 | 정 호 재


2000년대 이전 남중-남고-경영대-군대를 나온 한국 사람이라면 위압적인 마초문화를 잘 알 수 밖에 없고, 자동적으로 나쁜 선배-형님들의 습성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실제 20~30년 전 한국의 학교엔 군사문화가 횡행했고, 폭력서클이 학교 분위기를 주도하곤 했다. 이른바 상명하복의 군기가 셌던 시절이었다. 욕설의 강도는 어마어마했고, 선생님이나 선배의 손찌검이 당연시되기도 했으며, 실제 삥을 뜯는 선배도 종종 있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사실 다큐에 가까운 영화다. 그래서 곧잘 주눅이 들어 어깨가 축 처지곤 했다.

나이 들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1980년대 당시 농촌 커뮤니티가 빠르게 붕괴하고 도시로 향하는 "이촌향도(離村向都)"가 가속화되면서 불어온 가치관 붕괴와 계층의 심화가, 많은 비행청소년(?)을 낳은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해 본다. 혹은 많은 청년들이 이토록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한 남성성을 갈구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원래 농촌사회가 도시문화보다 훨씬 폭력적이고 남성중심적 문화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교과서에 등장한 단편소설에 "삵"이라는 캐릭터를 접하고 꽤나 충격에 빠진 적이 있는데, 시골동네 불량배 "삵"은 그러니까 부녀자를 겁탈하고 동네주민을 갉아먹는 흉폭한 남자였는데, 그런 친구에게도 민족의식이 있었고, 종국엔 일제 공권력에 비극적으로 죽는 내용이었다. 마초문화, 강한 남성성에 기반을 둔 센 캐릭터가 전근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보다 보편적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른바 "북두신권"에 나오는 무법천지의 세상 말이다. 문명화라는 건 야만적 남성성의 억제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성향은 어디나 잠복해 있는 것일까?

이란, 의외의 한류

이란(페르시아)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도는 미얀마 못지않게 처참하기 그지없다. 이란에 대한 상식은 단 두 가지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테헤란이 그 수도이며 1979년 호메이니의 "이란 신정 혁명"이 있었다는 것 정도다. 팔라비 왕조 이름까지 알면 상당한 수준인데, 필자도 종종 헷갈렸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한국과의 관계는 주로 석유와 일부 건설 사업이 전부였고, 오히려 이란은 일본과 강한 외교적 관계에 있었다. 그러니까 고대 페르시아는 익숙한데 이란은 한국과 데면데면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이란이 이슬람권에 속했다는 전형적 이미지를 바꾼 사건이 바로 15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한류 열풍이다. 인근 아랍지역보다 엄청나게 거세다. 이란의 한류 사랑은 지금은 꽤나 널리 알려졌는데, <겨울연가>, <대장금>, <주몽>, <허준> 등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일종의 신드롬 급의 문화적 임팩트를 건넨 것이다. 필자가 이란을 안 가봐서 체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싱가포르에 있을 때 테헤란 국립대학과 학생교류 프로그램이 있어 하마터면 갈 뻔한 기회가 있기는 했다. 모 교수님이 "호재씨, 이란 한번 가보지? 가면 인기 장난 아닐걸? 거기 싱가포르 사람에게도 엄청 호의적인데, 한국 사람이 가면 진짜 난리날거야" 하고 귀띔했기 때문이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2주 체류비용이 150만 원이기에 포기했더랬다. 아쉽다.

이란 혁명과 사상가 샤리아티

1978년~1981년 사이의 이란혁명은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무척 크다. 이미 40년도 더 된 역사책 속 얘기만은 아니다. 현재까지도 아시아는 물론 세계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란의 정치체제가 호메이니의 유산인 것은 물론이고, 중동지역 전체가 호메이니 혁명의 반작용으로 거센 영향을 받았으며 아시아의 미얀마, 인도네시아, 심지어 북한에도(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물론 필자가 이란을 거의 모르기 때문에 감히 호메이니 체제를 논평할 깜냥은 안 되고, 필자가 아는 인물은 당시 이란의 최고 학자인 알리 샤리아티(Ali Shariati 1933~1977) 정도이기에 이분을 중심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는 1979년 이란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학자로, 실제 팔라비 왕조가 호메이니만큼 경계하던 인물이고, 그의 혁명이론, 시아파이론 강좌테이프가 무제한으로 복제되어 이란의 혁명적 상황을 고조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혁명의 "이데올로그"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나이로 보면 겨우 44살에 죽었는데 (일종의 암살?) 참으로 불꽃같은 이력이다.

이분이 1964년에 프랑스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시대는 반제국주의 열풍이 그야말로 지성계를 강타하던 시점이었다. 68혁명 바로 직전이 아닌가? 그 당시 중동은 영국의 반식민지배를 오랫동안 받았을 때고, 팔라비 왕조는 개혁정책, 세속정책을 무차별적으로 실시해 이란의 테헤란에 미니스커트가 출몰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샤리아티에 강한 영감을 준 인물이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학자 "프란츠 파농"이란 심리학자인데,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the wretched of the earth>라는 탈식민주의 명저로도 유명한데, 샤리아티는 이에 영감을 받아서 한참 낡았다고 평가받은 "이슬람주의"를 충분히 현대의 사상적 물질적 제도적 혁명의 "중심철학"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른바 "토착적 철학"에 기반한 정치혁명을 중동에서 본격적으로 구상하고, 이를 대중과 혁명가들에게 전파한 것이다. 이슬람주의에 기반한 모더니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반제국주의를 이슬람주의로 적극적으로 포섭해 낸 것이다. "이슬람주의는 원래 혁명적인 사회 이론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바람대로 호메이니가 영웅처럼 등장해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영광스러운 이슬람주의 신정정치가 복구되어 가동된 것이다. 일종의 이란판 주체사상이자 주체혁명인 셈이다.

문제는 반제국주의 운동을 성공시키고 자주권은 탈환했는데, 사회분위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다. 1979년 이란 혁명엔 당대 여성들의 적극적 정치참여가 성공의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호메이니 이후엔 봉건주의가 활화산처럼 되살아나 사회의 절대가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샤리아티가 꿈꾼 건 모더니즘이지 봉건주의가 아닐 텐데…. 여하튼 호메이니 이후의 "이란 여성"들은 다시 히잡에 둘러싸인 채 집안으로 쫓겨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탈식민지주의를 꿈꾸었는데 엉뚱하게 여성인권이 잡아먹힌 케이스라니. 사실 이는 여러 나라에서 종종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충격적인 이란의 여성인권

최근 유튜브에 "이란 여성"이란 주제로 한국어 방송을 하는 이란 유학생들이 부쩍 늘었다. 내용도 무척이나 재미나고 알차다. 어쩌다가 이란에서 한류를 만나서 한국에까지 유학을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간간히 토로하는 이란 사회의 보수성과 남성 중심성이 어마어마 한가 보다. 실제로 간간히 뉴스에 나오는데 이란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다가, 혹은 남성의 프로포즈를 거부했다며, 종종 염산을 얼굴에 끼얹는 믿지 못할 수준의 테러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도 1970년대 가수 김추자 선생의 매니저 폭행사건이 있기도 했다).

그런 이란 사회에 충격을 던진 게, 앞서 소개한 한류 드라마, 특히 한류 사극 시리즈가 된다. 한국의 사극이 중동과 동남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끈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여성의 노출이 없고 격한 애정씬이 적으며, 종국에는 왕정체제에 복종하는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일면의 모습이고, 한국의 사극에는 여성 주인공이 남성 주인공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장금>이나 <주몽>의 소서노, 이런 여성의 주인공 역할에 중동의 여성들이 큰 감명을 받는다는 것이다. 한국 사극에 엄청난 진보성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얘기가 돌아 돌아 왔는데, 이 같은 중동과 동남아 사회를 강타한 드라마가 2009년 대만 드라마 판권을 기반으로 제작되어, 2010년 경에 해외배급을 타기 시작한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다. 구준표(이민호)와 김현중이 그야말로 동화속 왕자님 같은 캐릭터로 등장해 일본에서 시작해 동남아를 넘어 중동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버린 것이다. 이란에서는 그 당시까지 젊은이들은 터어키 세속드라마를 보는 것으로 사랑과 연애에 대한 감정을 연습했다는데, <꽃보다 남자 F4>에 그냥 홀딱 반해서 미친 듯한 한류 사랑을 꽃피웠다는 것이다. 마초와 같은 눈빛을 지닌 김현중이 이란에서 끼친 영향이 상당했던 것이다.

2010년 이란의 히잡을 입은 학생과, 1970년대 검은색 교복을 입은 한국 학생 (출처: 위키피디아)

더블에스 501, 김현중

사실 한국 남자들은 이 SS501의 인기를 그다지 실감하지 못한다. 그런데 해외에 나가면 은근히 이 그룹 출신 김현중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다. 태국에서도 그렇고 이란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이란학을 전공한 구기연 박사님을 만났는데 곧바로 "김현중"의 인기부터 언급하시기에 깜짝 놀랬다. 그랬다. 그러니까 또 한번 대성기획dsp가 나와서 너무 편중된 것 같지만, 2010년부터 2015년까지의 김현중은 그야말로 아시아의 프린스, 제2의 욘사마 라는 칭호가 절대 과찬이 아닌 정상급 인기였다는 얘기다.

이 친구의 이력이 꽤나 훙미롭다. 2005년에 데뷔를 했는데, 그러니까, 조금은 나쁜 오빠 출신이었나 보다. 눈에 반항기가 가득하고, 집에서 가출도 좀 해보고, 생활비 벌기 위해 공사판도, 식당 알바도 전전해 보고 말이다. 이 친구가 1986년생이니 당시 한국에서 그러한 청소년들이 적지 않았을 때이기도 하다. 적어도 심야에 바이크를 멋지게 몰아줘야 강한 남성성을 인정받았던 거의 막바지 시대였다. 그런 그가 DSP 이호연 대표에 발탁되어, 불과 5년 만에 아시아의 프린스로 등극한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 같이 극적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욘사마 배용준의 청춘 역시도 거칠기로 따지면 김현중의 두 배 이상은 될 것이다. 용케도 여성들은 "나쁜 남자"의 매력을 알아보는 눈이 있는 것일까? 실제 욘사마와 김현중의 눈빛은 거친 야수의 그것을 숨긴 고고한 야성미 넘치는 아시아 귀족의 자태가 엿보인다.

한국에서는 김현중의 인기가 그럭저럭 구준표에 미치지 못했지만, 노래와 연기를 겸한 남자 김현중의 인지도는 사실 지금도 이란을 비롯한 아시아 각지에서 계속되고 있다. 한편 현실은 좀 각박하다. 현재 그와 관련된 국내 뉴스는, 전 여자친구와의 친권자 진위여부나 폭행의 유무를 가리는 무척이나 "막장 드라마" 소재에나 나올법한 뉴스이기 때문에 크게 아쉽기만 하다. 그가 여전히 마초성이 강한 이란과 왕정국가 태국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는 얘기가 생각나, 꽤나 복잡한 얘기를 풀어보았다.

PS.

1.물론 11년이 지난 지금 F4 드라마와 스토리를 접하면, 그 낡은 시대정신에 깜짝 놀랄 수 있다. 원작부터가 상당히 오래된 얘기고 실제 귀족 자제를 다룬 사회 양극화가 주제이기 때문. 그런데 이같은 드라마가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끈 것을 생각해 보면, 여전히 마초적, 가부장적 남성중심 단계를 거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이 적지 않다는 증거가 되기도.

2.아이돌 출신 김현중  밝은 뉴스를 어여 듣고 싶다. 하루 빨리 소송 마무리 하시고 행복한 가정 꾸려서, 제2의 방송생활을 시작하시길. 기다리는 팬들이 아직도 많음.

3.이란Iran의 한류는 여전히 미스터리이자, 한국과의 인연의 역사성의 깊이를 증거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