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도시에 디자인을 입힌다' 리드완 까밀

O 자바섬의 "파리" 반둥의 혁신가 리드완 까밀Ridwan Kamil
O 인니 최고의 창업센터로 변신한 "반둥"의 혁신 주역
O 인니를 바꿀 차세대 지도자들, 현실정치의 벽 넘을 지 관심

글 | 김 정 호

작성일 | 2015년 7월 1일


인도네시아 제3의 도시 반둥 Bandung 시민들이 8명의 후보가 난립한 2013년 시장 선거에서 45%의 압도적인 지지로 선택한 인물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저명한 건축가인 리드완 까밀 Ridwan Kamil이었다. 행정과 정치에 전혀 경험이 없는 까밀이 시장으로 당선된 것은 반둥을 완전히 탈바꿈 시키겠다는 그의 비전이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반둥 소재 국립대학 교수로 재직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까밀은 일찍부터 건축학에 뜻을 두었다. 인도네시아 명문 공대인 반둥 공과대학 ITB, Bandung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UC버클리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7년간 뉴욕, 샌프란시스코, 홍콩에서 일하다가 귀국해서 뜻 맞는 친구들과 함께 건축설계와 도시계획 컨설팅 회사인 Urbane을 설립한다.

저명한 건축가의 행정 도전

국내외의 여러 도시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부와 명성을 거머쥔 까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태어나고 자란 도시 반둥의 너저분한 풍경이었다. 다른 도시들은 완전히 새롭게 업그레이드 하면서 정작 자신의 고향은 방치해두고 있다는 반성이 들자 반둥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건축가의 감성으로 도시로 리모델링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관료주의의 벽이 높음을 잘 알고 있었다. 까밀이 도달한 결론은 자신이 정책의 입안과 집행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구태의연한 정치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인물을 찾고 있던 정의복지당 PKS, Partai Keadilan Sejatera와 그린다 당 Partai Gerinda의 지지를 받아 시장 선거에 출마해서 당당하게 당선된다.

까밀이 시장이 될 무렵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자바섬의 파리’로 불렸던 반둥은 과거의 영화와 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급속한 경제 성장에 힘입어 도시의 덩치는 커졌지만 체계적인 도시계획이 없었던 탓에 도시 곳곳에는 난개발과 무질서가 판을 쳤다. 전임 시장이 빈민층 예산 전용 혐의로 부패근절위원회 KPK, Corruption Eradication Commission에 의해 구속되었을 정도로 만연해있는 부정부패도 큰 문제였다.

시장이 된 후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만성적인 교통난 해소를 위해 교통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260만 명이 거주하는 반둥에서 시민들의 80%가 자가용과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하고 나머지 20%의 빈민층은 폐차 직전의 낡은 미니 버스를 이용해 통근한다. 비좁은 도로를 가득 메운 차와 오토바이의 댓 수를 줄이려면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이용할만한 대중교통 수단을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처방이었다.

그래서 까밀은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운영되는 모노레일과 홍콩의 명물인 스카이워크를 도입하는 중장기 계획을 세운다. 고지대 주민들을 저지대의 교통 허브까지 모노레일로 운송하고 번잡한 도로 위에 나있는 스카이워크로 보행자들이 이동하도록 해서 교통량과 통행량을 대폭 줄여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이같은 대형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에 할당되는 중앙 정부의 예산이 적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펀딩 모델을 응용, 모노레일 정거장의 공간을 임대해주고 임대료를 예산에 반영하도록 했다. 또한 교통혼잡을 줄이기 위해 자카르타의 3-in-1, 세 명 이상 탑승한 차만 도심지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보다 더한 4-in-1 정책을 실시했다. 더불어 유럽식의 주차미터기도 인도네시아 최초로 도입했다.

자바섬의 ‘파리’ 반둥의 부활

도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까밀의 노력은 강력한 벌금 정책으로 나타났다. 모든 차량은 내부에 반드시 쓰레기통을 비치해서 창밖으로의 쓰레기 무단투기 근절에 나섰다. 위반 차량에는 25만 루삐아, 약 2만 1천원의 벌금을 물렸다. 길거리 행상이 없는 ‘클린 스트리트’에서 음식을 팔거나 사먹는 사람들에게는 100만 루삐아(약 8만6천원)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집 주변의 거리나 강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인도네시아에서 까밀의 벌금 정책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까밀이 지나쳐 보이기까지 한 벌금 정책을 실행에 옮긴 것은 시민들의 의식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도시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의식변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까밀이 또한 집중해서 개혁을 시도한 것은 비효율적이고 무능하기 그지없는 시市 공무원들이었다. 시의 모든 행정을 온라인화 한 e프로그레스 시스템을 통해 시가 추진하는 모든 프로젝트의 진행상황을 낱낱이 공개하도록 했다.

특히 모든 인허가는 이 시스템을 통해 처리하도록 해 담당 공무원과 관련자들이 직접 만나 뇌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지를 차단했다. 시의 각 부서들마다 공식 트위터 계정을 만들도록 해서 시정을 홍보하고 시민들의 피드백을 받도록 했다. 부패에 연루되거나 자기소임을 다하지 않는 공무원들에게는 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해 반둥 공무원들이 바짝 긴장한 상태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반둥 공과대학 ITB의 도시계획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디자인과, 도시계획과, 전기공학과학생들과 함께 전기를 생산하는 Enerꠓbike를 만들었을 정도로 까밀은 친환경 문제에 민감했다. 반둥을 친환경 도시를 변모시키고자 하는 까밀의 비전은 8개의 테마 공원으로 현실화되었다. 시민들이 어떤 용도로 공원을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친숙한 이름을 지었다.

예를 들어 노년층을 위해 발바닥 지압용 조약돌 길이 나있는 공원은 ‘따만 란시아 Taman Lansia(노인 공원)’, 청년층이 데이트 목적으로 자주 이용하는 공원은 ‘따만 좀블로 Taman Jomblo(싱글 공원)’라고 이름을 붙이는 식이었다. 전력소비를 줄이기 위해 상업용 건물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매주 화/금요일 저녁 9-10시에 전력을 차단하는 정책도 실행 중이다. 매주 3회 시장을 포함한 모든 시 공무원이 참여하는 15분간의 쓰레기 줍기 활동도 지속하고 있다.

인니에 꼭 필요한 "혁신"

서민층에게 좋은 디자인을 까밀이 만든 Urbane의 모토 “좋은 디자인이 좋은 비즈니스다 Good Design is Good Business”는 도시계획과 건축에 디자인적 요소를 가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이 되어서는 이런 컨셉을 시민들의, 특히 빈민층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데 응용하고 있다. 그냥 보기에 좋기만 한 디자인이 아니라 서민들의 삶의 질을 업그레이드하는데 디자인을 활용하는 것이 까밀의 아이디어다.

서민층이 애용하는 재래시장도 디자인을 완전히 새롭게 하고 푸드 코트나 스포츠, 레저 시설을 만들어서 중상류층도 찾도록 하고 있다. 서민층에 대한 까밀의 지대한 관심으로 인해 반둥에서는 인도네시아 최초로 119 긴급전화와 병원 간의 핫라인이 만들어졌다. 병원비가 없는 빈민들도 응급 상황에 닥치면 119에 전화해서 응급실로 이송되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여유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고 스스로 큰 부를 일궜지만 시장이 된 이후 까밀의 행보는 친서민적이다. 자주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시장 관용차도 중형차에서 경차로 교체해서 절약한 예산은 소방차와 청소차 구입에 보태도록 하는 등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시장 집무실에서 보고서나 들여다보는 시장이 되지 않겠다며 매일같이 현장으로 향하는 까밀 시장에 대한 반둥의 시민의 기대는 높기만 하다. 반둥을 더욱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려는 까밀의 노력은 눈에 보이는 결실을 거둬서 반둥은 그의 임기 2년 차에 인도네시아에서 살기 좋은 도시 7위에 올랐다.

반둥 시장을 거쳐, 서자바주 주지사, 그리고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리드완 까밀 (출처: 반둥시)

그 외 주목할 만한 정치인들

앞서 언급한 3명의 지자체장과 더불어 눈 여겨 볼만한 정치인들이 더 있다.

우선 자카르타 인근의 휴양 도시 보고르Bogor 시장을 맡고 있는 비마 아리야 수기아르또 Bima Arya Sugiarto다. 수기아르또는 높은 학벌을 자랑한다. 반둥 소재 빠라향안 대학 Universitas Parahyangan Bandung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호주 멜버른의 모나쉬 대학 Monash Univ.에서 같은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에는 정치 컨설팅 및 리서치를 하는 Lead Institute를 설립하고 TV에 자주 등장하는 정치평론가로 이름을 알려왔다.

2013년 보고르 시장 선거에 출마해서 무난히 당선되는데 프로야구 해설자가 프로야구 감독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격이었다. 다른 지자체장들과 마찬가지로 수기아르또도 공무원들의 관료주의를 무너뜨리는데 공을 들였다.

인도네시아 공무원들은 마약 판매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은데 보고르 시 공무원들에게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자 한 치의 관용도 없이 전부 사법처리를 시켰다. 휴양 도시라 계속해서 호텔과 쇼핑몰이 들어서고 있는데 신규 인허가를 엄격히 제한했다. 굴지의 Giant 슈퍼마켓 체인이 짓던 것이라며 공사를 강행하자 공사 현장을 아예 폐쇄해버렸다.

시민들의 의료문제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서 시립 보건소가 24시간 운영되도록 하고, 경영난에 처한 개인병원들을 인수해서 시립 보건소로 전환시켜 보다 많은 시민들이 의료 혜택을 입도록 했다. 또한 지역 의과대학 정신과와 연계해 시 소유의 차량으로 곳곳을 찾아다니는 정신건강상담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획기적인 시도다.

높은 학력과 글로벌 마인드 겸비

다음은 자바섬 동쪽 끝에 위치한 바유왕이 Bayuwangi 의 압둘라 아즈와 아나스 Abdullah Azwar Anas시장이다. 국립 인도네시아 대학 University of Indonesia에서 교육공학으로 학사와 정치학으로 석사를 취득하고 불과 25세에 대통령자문위원회 청년 멤버가 될 정도로 일찍부터 정치에 눈을 뜬 케이스다. 2004년에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2010년에는 바유왕이 시장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본인이 공부를 잘했던 탓인지 신규로 채용하는 공무원들에게도 높은 학점을 요구한다. 평점 4점 만점에 최소 3.2점이 못 되는 경우에는 아예 임용하지 않는다. 공무원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야 양질의 서비스를 시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바유왕이 시는 인근은 산과 해변과 숲이 어우러진 관광지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아나스 시장은 바유왕이 공항을 그린 에어포트로 만드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공항 건물 내외부를 수목으로 단장해서 에어컨이 필요 없는 친환경 공항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공항으로는 최초로 시도되는 것이라 미디어의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지역의 주력 산업인 농업과 축산업의 생산성 증대를 위해서 친환경 농법과 유기농 비료를 사용하도록 하고 문맹률이 높은 주민들이 반드시 고등학교 교육까지 마치도록 하는 등 지역에 맞는 시정으로 큰 호응을 얻어내고 있다.

끝으로 간자르 쁘라노워 Ganjar Pranowo 중부 자바 주지사를 언급해 야겠다. 보수적인 경찰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자신의 정치적인 커리어는 야당인 투쟁 민주당 PDI-P에서 시작했다. 2004년에 국회의원에 당선 된 후 국회 내무소위원회에서 대형 수뢰 및 부패 사건의 조사위원으로 맹활약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의 활약을 눈 여겨 본 야당 수뇌부의 권유로 2013년 중부 자바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앞서 다룬 다른 지자체장들과 마찬가지로 쁘라노워 주지사도 모든 행정을 온라인화해 정책의 투명성을 높였다. 각종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서 ‘라뽀르 거브’ Lapor Gub, ‘주지사에게 보고하세요’라는 뜻의 사이트를 운영하며 시민들로부터 직접 제보를 받고 있다. 본인도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는 타입이 아니어서 과적차량 단속 공무원이 촌지를 받고 그냥 통과시켜준다는 제보를 받자 아예 새벽에 암행감찰을 해서 해당 공무원을 해고 하는 식의 발로 뛰는 주지사로 명성이 높다.

또한 쁘라오워 주지사를 특별하게 하는 것은 자바어와 문화에 대한 사랑이다. 중부 자바 주에서는 매주 목요일마다 인도네시아어가 아닌 자바어를 모든 학교와 관공서에서 사용하는 정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자바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려는 그의 의지가 잘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정치적 우군 만들어 낼지 주목

지금까지 다룬 6명의 인도네시아 지자체장들에게는 전반적인 공통점이 있다.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성을 갖춘 40대 엘리트들이 지방의회를 거쳐 중앙의 국회로 진출했다가 고향으로 내려가 지자체장에 선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의 토호 및 그들과 결탁한 공무원들과 한판 힘겨루기를 하면서 자신만의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도 대동소이하다.

아직까지 중앙 정치무대는 기득권층이 좌우하는 ‘그들만의 리그’에 불과하지만 지역으로 내려간 개혁파 정치인들의 의미 있는 정치실험은 조용하지만 깊이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필자가 만나본 여러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기득권층의 대대적인 반격을 염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개혁적 정치인들의 행보가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다며 무시하는 분위기였으나 그들이 추진하는 개혁이 만만찮은 영향력을 갖게되자 차기 선거에서 해당 지자체를 탈환하자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적 정치인들이 정치적인 우군 없이 각개전투를 하고 있는 형국이라 결국 그들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인도네시아의 민초들이다. 시민들에 의해서 선택되었기 때문에 시민들을 믿고 앞으로 나갈 뿐이라는 그들이 견고하기 짝이 없는 인도네시아 정치구조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화를 일으키기를 희망해 본다.

PS.

  1. <참고 서적> Robert Junaidi, <슈퍼 히어로, Super Hero>, PALAPA (2015)

2. 리드완 까밀은 2018년 서자바 주지사에 당선되어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거듭났음. 차기 대선 후보군에 포함되기도.

3. 구시대적 정치 문법에 좌지우지 되지 않은 젊고 개혁적인 정치인들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는 가에 따라서, 그 국가의 운명이 뒤바뀌기도. 물론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정치인들은 구습에 포섭이 되기도 함. 그것을 견제하는 게 언론과 시민사회의 성숙도라고 판단됨.